[리뷰] 로맨스 없는 로맨스 영화 : 6번 칸

글 입력 2023.03.08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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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카 곁들인 "비포 선라이즈"

 

영화에 딸린 감상평이었다. 그러니 평소와는 다르게 준비물이 필요했다. 그 분위기에 흠뻑 빠질 수 있도록. 뭐, 어느 정도는 핑계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마시면서 보면 좋으니까. 급하게 들린 편의점엔 보드카 대신 위스키가 있었고,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서 도수 35도와 40도 사이에 전자를 골랐고, 생각해 보니 둘이 마시기엔 양이 좀 적은 것 같아 다른 하나를 더, 독주를 그냥 들이키기엔 식도가 조금 걱정되니 토닉워터도. 끝으로 여름철에도 찾을 생각 않던 얼음컵을 손에 쥔 채로 영화관에 입장했다.

 

와작거리는 팝콘과 탄산음료들 사이에서 혹여라도 알코올 냄새가 폴폴 풍길까 위스키를 따던 동행인의 손길은 꽤나 비밀스러웠다. 그 모습이 꽤 재밌는 인상으로 남았다. 거의 맨 앞 줄인 데다 사이드인데 누가 얼마나 신경 쓰일까 싶었던 터라.

 

시야에 걸리는 관람객이 적어서인지 나름 영화 속 횡단열차와 비슷한 것도 같았다. 각자 티켓에 적힌 자리에 앉고, 한 공간 안에 여럿이 함께이고, 방음이 될 리 없으니 부스럭대거나 웃는 소리가 훤히 들리고. 단색으로 스크린이 물들고 제작진들의 이름과 직책이 몇 번 떠올랐다. 그 어둑한 빛에 의지하며 얼음컵 속 토닉워터와 위스키가 섞였고, 프링글스 뚜껑도 열어젖혔다. 이제 그들의 여정을 따라가 볼 차례다.


*

아래부터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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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거리는 열차 안으로 시작할 줄 알았건만, 웬 파티가 한창이었다. 파티라기보다는 문화교류라고 해야 할까. 가볍게 잔을 하나씩 들고 거실 소파에 앉아 저마다 교양 듬뿍 담긴 대화를 주고받던 중이라. 조용하지도 고요하지도 않은데 시끌벅적하지도 않은 느낌. 모두가 하나의 뇌를 공유하는 듯 중간중간 웃음소리가 거나하게 터지고, 점잖은 목소리가 이어지고.


어딘가 모르게 고풍스러운 농담에 한 발 늦은 웃음을 보이던 이가 있었으니, 영화의 주인공 '라우라'였다. 불편하지만 별 수 없이 참여해야 하는 사교파티 같은 것에 초대받았나 싶었다. 알고 보니 이지적인 농담을 건넨 '이리나'는 그와 오랜 연인 관계였다. 불편한 상대가 아니라. 단둘이 있을 땐 서로 다정하기만 한데 사람들 속에 섞여있을 땐 그들 사이에 두터운 장벽이 열 개쯤 쌓인 것 같다.


그럴 만도 한가. 이리나는 문학 교수이고, 라우라는 고고학을 공부 중인 핀란드 출신의 모스크바 유학생이다. 사회적 지위가 다르고, 출신지도 다르고, 공부 분야도 다르고. 하지만 이건 그들의 관심사나 상황을 드러낼 뿐 그 사람의 성격 같은 내밀한 면을 보여주진 못한다. 영화에선 개인의 사적인 영역을 들추질 않는다. 흔히 나오는 가족 관계나 사는 곳에서의 생활 등이 가벼이 생략되고, 몇몇 단서로 유추할 뿐이다. 아, 라우라가 암각화 볼 겸 여행을 가자고 했는데 이리나가 거절했구나. 그래서 그가 혼자 떠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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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만스크로 가는 열차.

 

6번 칸을 열자, 술 취한 남자 하나가 있다. 무슨 말이 저리도 많은지. 그런데 하는 말 중에 어느 하나 듣기 좋은 게 없다. 무례와 모욕을 사람으로 빚어내면 저것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라우라는 열차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다른 칸으로 옮길 방법을 찾지만, 여기는 비좁은 복도와 그보다 더 비좁은 칸 안에서 수십 명이 엉겨 붙는 곳. 불편을 감수하는 게 당연하고도 익숙한 곳에선 뾰족한 수가 없다.


최후의 수단은 식당 칸에서 시간을 때우는 것이었는데 이마저도 끝났다. 다시 돌아간 6번 칸은 곤히 잠든 남자의 옆모습만 보인다. 불쾌함을 삼켜내고 라우라는 잠을 청해 본다.


애석하게도 이 남자의 목적지도 무르만스크다. 곧 여정이 끝날 때까지 같은 칸을 써야 한다는 것. 꽤 답답한 상황에서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캠코더. 자신의 연인 이리나에게 보여줄 생각인 듯 칸 내부 이곳저곳을 담는다. 같은 칸을 쓰는 남자가 들어서자 급하게 캠코더를 숨기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체하고. 소중한 것을 웬 이상한 남자에게 보여줬다간 괜한 헛소리만 들을 게 자명하니, 당연한 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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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칸에서의 라우라는 늘 음식을 먹으며 무언가를 끄적거린다. 이날 좀 다른 게 있었다면, 같은 칸의 그 남자가 건너편 자리에 앉아 라우라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었던 것. 썩 대화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생각보다 대화는 무탈하게 흘러간다. 되려 삐딱선을 탄 건 라우라였다. 이리나와 있을 때의 그 고풍스러운 농담과는 달리 저급하기 그지없던 남자의 말을 인용하기도 하며. 남자는 살짝 입꼬리가 올라간다. 무언가가 통한다고 느꼈을까.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에 닿자마자 공중전화를 찾고, 이리나에게 연락한 라우라. 들려오는 반응은 무심하다. 벌써 돌아올 생각은 아니지? 라우라가 오지 않길 바란다는 듯. 주변에서 이리나를 부르는 목소리도 들리고. 혼자 막막한 마음을 나눌 수조차 없고.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근 하루를 정차하는 역에서 하릴없던 라우라에게 같은 칸의 남자는 아까 라우라가 거절했던 제안을 한 번 더 해본다. 헛헛한 기분을 달래고자 그가 어디선가 빌려온 차에 타고, 남자의 할머니 집으로 향한다. 실망과 긴장으로 피곤한 몸은 할머니만의 환대에, 그들의 터무니없는 대화에, 무르익어 가는 술자리에 서서히 풀려만 간다. '너를 위해 건배'라던 할머니의 말씀이 그에겐 크나큰 위로가 되지 않았을지.


허겁지겁 맞이한 아침. 늦은 와중에 땔감으로 쓸 나무 장작도 만들어 둔 남자. 그의 이름은 어느 순간 툭 나왔는데, '료하'. 라우라가 그를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할 쯤엔 처음의 거부감이 완전히 가신 것 같았다. 평화로운 열차 내 분위기는 또 한 번 꺾이기 시작한다. 라우라와 같은 핀란드 출신의 남자의 등장으로.


친절함을 표방하지만 은근히 료하를 무시하던 남자. 라우라는 자신과 동향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음이 열렸던 건지 머물 칸을 못 찾던 남자를 흔쾌히 들인다. 료하는 전에 없던 모습을 보였다. 퉁퉁거리는 말투나 표정. 라우라가 그와 친근하게 지낼수록 료하는 뒤로 빠져 그들과 거리를 두려고 한다. 흔히 말하는 썸 타던 사람에게 접근한 또 다른 사람에 대한 반응이라기보단 배신감으로 보였다. 처지가 비슷한, 서로 유일한 존재라던 느낌에 대한 배신감. 라우라는 료하 자신과 같은 이방인이 아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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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해진 료하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라우라는 나름 애쓴다. 료하가 좋아할 것 같은 보드카를 건네보기도 하는데, 반응이 차갑기 그지없다. '꺼지라'는 말은 처음의 무례함이 묻어나는 말투인데도 그때와 달리 모욕적이지 않았다. 광부인 그가 살아온 환경에선 모두가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을 테다. 이리나와 정반대로 교양이라곤 찾을 수 없는 료하. 비꼼과 왜곡 하나 없는 투명함이, 웃음 따위로 가리지 않는 솔직함이, 라우라에겐 더없이 편했으리라.


핀란드 출신 남자는 중간 역에서 내리며, 라우라에게 가장 소중한 물건인 캠코더를 훔쳐갔다. 료하가 무례하게 굴 때에도, 이리나가 매정하게 굴 때도 감정을 표출하지 않았는데 이번만큼은 폭발했다. 그 안에 모스크바에서 보낸 모든 기억이 담겼다고. 료하가 차분히 묻는다. 어떤 게 있냐고. 답은 단순했다. 거리, 사람들. 그리고 마치 라우라의 머릿속 기억의 파편들을 보여주듯 영화는 몇몇 장면들을 교차한다.


료하는 말했다. 과거는 보내고 현재를 살라고. 라우라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 아니었을까. 이리나와 좋았던 때를 붙잡아 두려는 노력. 그때의 이리나는 이미 없고, 그때의 라우라도 없다. 지금 여기, 6번 칸에서 웃고 화내고 당황하고 들뜨는 라우라만 있을 뿐.


열차는 끝을 향한다. 그들의 목적지인 무르만스크를 앞에 두고, 식당 칸에서 마지막 만찬을 즐기려 한다. 뜻대로 되진 않는다. 거나하게 먹으려던 음식들은 이미 동났고, 차가운 샌드위치와 값싼 샴페인이 전부다. 6번 칸이 아닌 공간에서 마주 보고 식사를 하려고 하니, 다 끝났다고 말하듯.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는 라우라와 달리 료하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제가 차고 있던 시계를 괜찮은 술과 바꿔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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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라우라는 자신이 그린 료하를 선물로 건넨다. 료하에게도 자신을 그려달라고. 몇 번이고 거절하던 료하는 서툴게 연필을 잡지만, 이내 구기고 만다. 유쾌하게 흐르던 분위기가 삐걱대던 건 라우라의 이어진 말 때문이다. 주소를 알려달라고. 보내 줄 테니. 료하는 격하게 거부한다. 애매한 분위기를 못 견딘 료하가 먼저 자리를 뜨자 라우라가 뒤따른다.


어두컴컴한 6번 칸. 좁은 공간. 둘은 서툴게 입을 맞춘다. 흔히 보던 열정적인 입맞춤, 사랑을 갈구하는 몸짓이 아니라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다. 레일 위를 달리는 내내 흔들리고 삐걱대고 덜컹거리는 열차처럼. 목적지는 다다랐으니, 각자의 길을 가는 것만 남았다. 인사를 건네기도 뭣한 상황을 뛰쳐나오며 6번 칸과 안녕을 고한 둘.


라우라는 숙소 프런트에 암각화 얘기를 꺼내자, 직원들이 작게 쑥덕인다. 겨울이라서 거긴 못 간다는 단호한 말과 오묘하게 불편한 분위기. 언제나처럼 라우라는 순응한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인물, 료하가 로비로 찾아왔다. 길이 막혀서 암각화를 볼 수 없다는 말에 료하는 단숨에 자리를 박찬다. '안 되면 되게 하라'가 삶의 모토인 것처럼,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우여곡절 끝에 배를 타고 암각화가 있는 장소로 향한다.


그런데 영화는 막상 암각화를 제대로 보여주지도 않는다. 이게 다예요? 료하가 묻자, 이게 다예요. 약간은 멋쩍게,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이 라우라가 답한다. 라우라는 입버릇처럼 '암각화'를 말했지만, 사실 그걸 보러 갈 이유는 분명치 않아 보였다. 사교파티에서 누군가가 했던 그럴싸한 이유를 그대로 말했으니까. 정해진 문장을 아무 사고 과정 없이 뱉는 기계처럼.


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해야 하는 게 마땅했을까. 이리나의 연인으로서 걸맞은 행위라고, 어떤 명분을 주는 것 같았을까.


료하와 주소를 주고받는 반전 따위는 없다. 라우라는 택시 안에서 창에 서린, 차갑고 뿌연 공기 너머로 료하와 눈인사를 하고, 그게 끝이다. 여행지에서 만난 낯선 이와의 뜨거운 사랑, 유대, 공감은 없다. 서로의 이름을 알고 대략적인 직업을 알지만, 좀 더 일상적인 이야기는 묻어두고. 각자 고유한 성격이나 버릇, 취향, 진로 같은 묵직하고 깊은 것도 제쳐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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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그 순간, 그때의 두 사람만.

 

누가 훔쳐 갈 생각도 하지 않을, 그래서 영영 사라질 수 없는 투박한 그림 한 장에 이 모든 걸 담은 채.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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