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드라마 '시그널'과 '더 글로리', 복수와 정의 사이 [드라마/예능]

우리에겐 영웅이 필요하다
글 입력 2023.03.07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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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함이 보내온 신호, 드라마 <시그널>



'간절함이 보내온 신호'

 

과거와 현재를 연결한다는 '무전기'를 소재로 과거의 형사와 현재의 형사가 공조하여 장기간 풀리지 않았던 미제사건을 함께 풀어간다는 미스터리 판타지 추리물 드라마, <시그널>.


장르에 판타지가 들어가지만, 사실 소재인 무전기를 뺀다면 오히려 현실적인 면이 많은 작품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김은희 작가의 철저한 국내 미제사건 사전조사와 관련 수사자료 참고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한다. 그런만큼 작품 속에 녹아있는 사건사고들은 이 드라마를 보는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모습들을 하고 있다. 


어떤 면에선 장르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과거에서 온 무전으로 현재를 바꾸고 미제사건을 해결한다는 줄거리 자체가 퍽 슬프게 느껴진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런 말도 안되는 판타지적 상상력을 발휘해서라도 범인을 잡고 미제 사건을 해결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피해자를 위로하고 싶다는 마음이 이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서 온 무전



이 드라마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과거의 형사인 이재한과 현재의 형사인 박해영 경위, 그리고 과거의 이재한을 잊지 못한 현재의 형사 차수현까지. 세 명의 형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어느날 폐기 예정이었던 낡은 무전기에서 박해영이 알 수 없는 무전을 받게 되며 드라마는 시작된다. 모종의 사건으로 관료주의적이고 경직된 경찰이라는 집단에 대해 불신이 가득했던 프로파일러 박해영은 무전을 통해 우직하고 끈기있게 사건을 쫓던 과거의 형사 이재한을 만나게 된다.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같은 사건을 쫓는 둘의 시간은 맞물리고, 여기에 과거 이재한의 후배였던 차수현 형사까지 박해영의 '미제사건수사팀' 선배로 합류하며 본격적인 스토리가 전개되어 나간다. 


개인적으로 '과거에서 온 무전'이라는 설정 자체가 매우 인상적이다. 평생을 우직하게 정의를 쫓아온 한 형사의 '내가 여기서 죽으면 이제까지 쫓던 모든 사건들이 미제가 된다'라는 절박한 무전이 시공을 초월해 미래에 닿았고, 그것이 드라마 <시그널>의 시작이 된다는 점이. 결국 이 모든 사건들이 한 사람의 간절함과 절박함,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의지로 시작되었다는 점이 참 멋있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누군가가 자신의 의지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정말 이렇게 드라마 속 과거에서 무전이 오는 것처럼, 그렇게 거짓말같은 기적이 찾아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그널>의 장르는 휴머니즘이다



이 드라마를 보다 보면 점점 뒤로 갈수록 촘촘하게 톱니바퀴처럼 쌓여가는 사건들, 관계들, 인물들,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완벽하게 첫 장면으로 맞물리는 연출에 소름이 돋게 된다. 이재한 형사의 대사 '이 무전은 그렇게 돌고 돌았던게 아닐까요.'와 꼭 맞는 그런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차갑고 이성적으로 딱 맞물리는 사건들 사이에서 끝내 잃지 않는 인간미가 좋다. 판타지다 미스테리 스릴러다 말도 많지만 사실 시그널의 근본적인 장르는 휴머니즘이다. 이재한 형사가 매 사건에 진심으로 임했던 것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미제사건에 매달렸던 것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던 자신의 슬픔과 고통의 기억을 거쳐, 타인과 피해자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불의 앞에 숨죽이고 고통받을 수 밖에 없었던 피해자들의 아픔을 곧 내 아픔과 같이 여겨 눈물흘릴 수 있었기에...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간절함은 모두 거기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그 간절함과 의지에서부터 이 모든 사건들은 시작된다.


이재한 형사라는 캐릭터를 매력적이게 만드는 요소엔 우직함과 정의로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신념도 있지만 곰같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형사적 예리함, 프로페셔널한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정의감과 신념을 뒷받침할만한 끈기와 근성, 그리고 예리한 감과 형사적 능력까지. 프로파일링이라는 개념이 한국에 없던 시절임에도 이재한 형사의 수사 방법을 보면 그러하다. 프로파일링을 사건과 개념 사이의 맥락을 읽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무런 개념이나 사전지식 없이도 이재한은 충실하고 영리하게 이미 그러한 방법을 따르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파일러인 권일용 형사님이 생각나기도 하는 부분이다.


그와 동시에 이재한 형사의 가장 커다란 형사적 역량 중 하나는 역시 공감능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범죄와 때론 불의 앞에 희생된 피해자들의 고통 앞에서 내 일처럼 함께 눈물 흘릴 수 있는 것. 그러한 공감능력은 이재한이 형사일을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훗날 끝까지 정의를 외면하지 않는 좋은 사람이 될 이유가 되었다.


과거에서 무전이 온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확실한건, 나의 안위나 이익과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란 점이다. 이재한 형사라는 캐릭터처럼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타인을 먼저 생각하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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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시그널>과 <더 글로리>, 복수와 정의 사이



며칠전 요즘 가장 핫한 드라마인 넷플릭스 원작, 김은숙 작가의 <더 글로리>를 봤다. 사실 보면서 <시그널>이 많이 생각났다.


<더 글로리>는 왕자님과의 환상적인 로맨스 작품을 주로 집필해왔던 김은숙 작가의 전작들과는 다르게, '왕자는 필요없다'는 첫 화부터 다소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학교폭력 피해자의 처절하고도 슬픈 복수극을 줄거리로 하고 있었는데, 한 편의 잔혹동화를 보는 것 같아서 보는내내 어쩐지 마음이 힘들었다. 대놓고 소재부터 수사물이고 강력범죄들이 등장하는 <시그널>보다 어떤 면에선 더 불편하고 가슴이 턱 막히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내가 <시그널>을 <더 글로리>보다 편하게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이재한 형사라는 캐릭터 때문이었다는 걸. 정의롭고, 우직하게. 그렇게 어떤 사건과 풍파 앞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드라마 속 정의로운 이재한이라는 캐릭터를 믿었기 때문이다. <시그널>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 현실적인 작품인 동시에 판타지적인 작품이었다. 과거를 바꿀 수 있는 무전기보다 사실 현실에 더 존재하기 힘든건, 모든 순간 언제나 정의롭기를 바라는 우리의 바람이 투영된 이재한과 같은 인물이었기에.


<더 글로리>에는 그런 드라마적 인물도 영웅도 없다. 폭력과 상처, 그 끝엔 피해자와 영광조차 없는 처절한 복수 뿐이다. 그것이 어느 순간 나를 답답하게 했던 것 같다. 드라마였지만, 드라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이재한과 같이 믿을 수 있고, 기댈 수 있으며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사람은 우리의 삶에 얼마나 귀한가. 이 세상에 얼마나 필요한가.


이재한 캐릭터 같이 모든 순간 정의롭지 않아도 된다. 어떤 순간, 단 한 순간만이라도 우리에게 우리가 믿는 정의를 실천할 용기가 있다면, 한 순간만이라도 누군가의 희망과 믿음이 될 수 있다면. 그건 누군가의 인생의 장르가 바뀌는 순간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런 순간들이 모여 이 세상을 바꿀 작은 희망이자 커다란 계기가 될 것이다.


누군가에게 과거의 무전과 같은 존재가 될지, 지워지지 않는 흉터같은 존재가 될지를 선택하는 것은 오늘도 나의 몫이라는 것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

 

 

[박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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