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조선의 태평성대, 그림으로 포착하다 - '조선 미술관' 탁현규 작가

글 입력 2023.03.01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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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전시회가 인기를 끌지만 그중 동양 미술, 특히 우리나라 전통 미술을 주제로 하는 전시는 좀처럼 떠올리기 힘들다. 이미 우리 머릿속에서 ‘미술’이란 현대미술, 서양미술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우리나라 미술이 오히려 서양미술보다 생소한 현실이 아쉬우면서도, 나 역시 한 전시회에만 가야 한다면 우리나라 전통 미술을 선뜻 택하지는 않을 것 같다. 어쩐지 정적이고 지루할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전통 미술에 막연한 심리적 거리를 느끼는 이들을 위해 고미술 해설가인 탁현규 작가가 그림을 모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미술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간송미술관 연구원으로도 일했던 그는 신간 『조선 미술관』에서 조선의 문화절정기였던 17~18세기의 풍속화와 궁중기록화를 소개한다. 작가의 소개로 들여다보는 조선의 그림은 지루하지도 조용하지도 않다. 사진이 없던 시절 그려진 그림은 그 시대의 특별한 순간을 포착해 몇백 년 후를 사는 우리에게까지 생생하게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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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미술관』에서 만나는 그림으로

가장 아름답게 꽃피었던 조선을 상상해보셨으면 해요.”

 


안녕하세요, 신간 『조선 미술관』은 어떤 책인지 작가님에게 직접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조선 미술관』은 조선의 문화절정기였던 17~18세기의 풍속화와 궁중기록화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책이에요. 당대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 7명의 작품 50여 점을 모았습니다. '1관'에서는 풍속화를, '2관'에서는 궁중기록화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 미술’이라 하면 떠올리는 사군자, 산수화와 달리 풍속화와 기록화는 옛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엿보기에 좋은 그림이에요. 풍속화는 드라마, 기록화는 다큐멘터리라고 빗대어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조선왕조 500년 중에서도 17~18세기 그림을 선별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17~18세기는 태평성대가 이어지며 문화 예술이 크게 발전한 시기예요. 이전까지의 그림은 대부분 중국풍이었는데, 이때부터 우리의 것을 우리의 방식대로 그리고자 하는 변화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큰 의미가 있는 이 시대를 정선, 신윤복, 김홍도, 등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그림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조선시대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기도 했어요. 우리가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조선은 대부분 조선 말에서 일제강점기 때라서 땅은 황폐하고 사람들은 가난한 모습이에요. 은연중에 조선을 그런 비참한 이미지로 기억하곤 하는데, 그게 500년 조선의 전부는 아니거든요. 흥망성쇠 중 ‘쇠’에 해당하는 모습일 뿐이죠. 『조선 미술관』에서 만나는 그림으로 가장 아름답게 꽃피었던 조선을 상상해보셨으면 해요. 

 

 

저도 17세기 이전의 그림은 대부분 중국의 풍경과 생활상을 묘사했다는 점이 신기했어요. 그럼 당시의 화가들은 눈앞의 것을 보고 그리는 게 아니라 일종의 상상으로 그림을 그린 건가요?


네. 그때는 그게 관습이었어요. 산수화로 예를 들면 실제 풍경을 보고 그리는 게 아니라 가장 아름다웠으면 하는 상상의 산수를 그린 것이죠. 앞서 말씀드렸듯 17,18세기가 되어서야 화가들이 비로소 우리 것을 아름답게 바라보고, 우리 것을 기준으로 삼는 그림을 그립니다. 제 스승님이자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인 최완수 선생님은 조선의 이 문화절정기를 ‘진경시대(眞景時代)’라고 칭했어요. 

 

 

말씀을 듣고 보니 진경시대야말로 우리 미술의 정수라는 게 확 와닿아요. 관련해서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이전까지 화가들이 조선 사람으로 조선에 살면서도 중국의 산수도를 그렸다면, 진경시대 화가들은 드디어 우리 산천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이를 ‘진경산수(眞景山水)’라 하고, 잘 알려진 대로 겸재 정선이 그 창시자예요. 우리의 산을 그렸을 뿐만 아니라 중국 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화강암과 소나무 등을 그리기 위해 독자적인 화법까지 발전시킨 엄청난 화가였어요. 


진경산수의 연장선으로 우리의 일상과 삶을 그린 그림을 ‘진경풍속(眞景風俗)’이라고 합니다. 이 책에 실린 풍속화는 모두 진경풍속이라 보시면 돼요. 그림에 그려진 사람들도, 생활상도 중국 것이었던 예전과 달리 양반 또는 평민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들의 일상을 담았죠. 진경풍속은 정선을 시초로 조영석, 김홍도, 신윤복 등으로 이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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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첩봉안도御帖奉安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은 한 시대를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사료예요. 거짓말을 하지 않죠."
 

 

책의 전반부가 말씀하신 진경풍속 중심이라면, 후반부는 궁중기록화 중심이에요. 개인적으로는 풍속화에 비해 궁중기록화가 어렵게 느껴졌어요.


맞아요. 앞서 풍속화가 드라마라면 궁중기록화는 다큐멘터리라고 말씀드렸는데, 아무래도 다큐멘터리를 보려면 인내심이 좀 더 필요하니까요. 궁중기록화는 당대 조선 왕실이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해 정성스레 만든 국가 공식 화첩이라고 생각하면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마어마한 돈과 인력이 투입되어 현장을 기록한 작품이죠. 당대 사람과 물건을 볼 수 있으니까 넓은 의미에서는 풍속화로 볼 수도 있어요. 소수의 인물에게 초점을 맞춘 평민 풍속, 양반 풍속과는 달리 국가 행사의 전경을 담았기에 사람을 한 명씩 자세히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죠.

 

 

역시 아는 게 많아야 보이는 것도 많아지는 것 같아요. 우리 미술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이 책을 좀 더 재미있게 읽는 방법으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제가 책에서 신윤복을 드라마 연출가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이라고 말했는데요, 책에 실린 작품들이 영화나 드라마의 스틸컷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재미있어요. 스틸컷이란 작품 전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장면을 고른 거잖아요. 책에 실린 그림도 모두 결정적인 순간을 담고 있어요. ‘우리 전통 미술’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명연출가들이 엄선한 스틸컷’이라 하면 좀 더 흥미가 생기지 않나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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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사문탈사寺門脫蓑〉,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책에 실린 그림 중 작가님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 딱 한 점을 꼽자면 무엇일까요?


정선이 80세에 그린 <사문탈사(寺門脫蓑)>를 꼽고 싶어요. 정선이 84세까지 살았으니, 이 작품은 말년에 신필의 경지에 들어서 그린 그림이라 할 수 있어요. 정선이 말년에 그린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색을 거의 쓰지 않고 먹으로만 그렸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마치 무술의 대가들이 고수가 되었을 때 무기를 안 쓰는 것처럼요. 그러면서도 나무나 사람 같은 형태 표현은 무척 뚜렷해요. 화가로서 어떤 경지에 오른 것 같은 작품이라 제가 정말 사랑합니다. 

 

 

작가님은 해설가이자 도슨트로도 활동하시며 다양한 청중을 만나실 것 같습니다. 강의를 하며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강연은 책을 쓰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어요. 차분하게 정리한 생각을 담는 게 책이라면, 강연에서는 즉석으로 청중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여러 군데서 강연을 했는데, 삼성전자에서 했던 강연이 기억에 남네요. 청중이 대부분 공학자분들이라 강연 주제가 생소할 것 같았어요. 강연에 앞서 여러분은 이제 반도체도 알고 김홍도, 정선도 알게 되니 저보다 나은 사람이 될 거라고 말씀드렸더니 다들 웃으시더라고요. (웃음)

 

 

말씀을 듣다 보니 우리의 옛 미술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작가님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어요.


그림은 한 시대를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사료예요. 거짓말을 하지 않죠. 사진 기술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그림이 일종의 사진 역할을 해왔거든요. 그래서 그림을 보면 그 시대를 알 수 있고, 그렇게 알게 된 것을 지금의 현실에 적용할 수도 있어요. ‘오래된 미래’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래는 이미 과거에 있다는 뜻이에요. 역사를 공부하면 우리 시대의 앞날을 볼 수 있는 혜안을 키울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오늘날 우리나라의 문화 예술이 나아갈 길은 과거가 이미 알려주고 있는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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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기우부신騎牛負薪〉,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피자는 매일 못 먹어도 쌀밥은 매일 먹는 것처럼

우리 미술에는 밋밋하지만 질리지 않는 맛이 있습니다.”

 


사학과 학생 시절 간송미술관에 갔다가 한국미술에 빠지셨다고 들었어요. 그 애정에 대해서 더 듣고 싶어요.


우리 그림을 향한 제 애정은 화롯불 같은 거예요. 마음으로 들어오는 데에는 서양미술이나 현대미술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한번 그 매력을 알고 나면 오랫동안 좋아하게 됩니다. 저도 예전에 우리 전통 회화를 알기 전에는 서양 회화가 제일 좋은 줄만 알았어요. 하지만 우리 회화를 봤을 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동과 떨림을 느끼면서 거기에 푹 빠졌죠. 보면 볼수록 더 좋아져요.

 

 

서양미술이 많은 관심을 받는 데 비해 우리 전통 미술의 매력은 아직 많은 사람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우리 전통 미술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모든 예술의 기본값이 서양이 된 것 같아서 아쉽기도 해요. 고전 음악(클래식) 한다고 하면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되지, 가야금을 연주를 떠올리지는 않잖아요. 고전을 공부한다면 셰익스피어, 괴태를 이야기하지 송강 정철 이야기하지 않듯이요. 춤도 마찬가지예요. 발레나 현대무용보다 승무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우리 전통 미술에서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설악산이나 지리산에 가기 전에 알프스에 먼저 갔다고 생각해볼까요. 아름답긴 하겠지만 그 아름다움이 설악산이나 지리산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과는 다르잖아요. 친숙하고 익숙한 것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이 있어요. 피자는 매일 못 먹어도 쌀밥은 매일 먹는 것처럼 우리 미술에는 밋밋하지만 질리지 않는 맛이 있습니다.

 

 

한국의 전통 미술이 지금보다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지기 위해서 필요한 건 무엇일까요?


한국미술, 전통 미술이라고 해서 엄격하고 진지하게 접근할 필요는 없어요. 저는 무엇보다 좀 재밌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사학과를 선택한 이유도 고등학생 때 들었던 국사, 세계사 수업이 재밌어서였거든요. 다른 시간에 졸던 친구들도 그 시간만큼은 집중해서 들을 정도였죠. 앞서 말씀드렸듯 신윤복과 김홍도를 단순한 화가가 아니라 그 시대의 드라마 연출가로 생각하고 접근해보는 등 요즘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는 재미 요소를 찾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우리나라 전통 미술 작품을 볼 수 있는 곳도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리움미술관, 간송미술관을 추천드리고 싶어요. 이번 책에도 국립중앙박물관과 간송미술관에 있는 작품이 많이 실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선 미술관』 독자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백남준 씨가 예전에 한 기자에게 왜 예술을 하냐는 질문을 받았대요. 백남준 씨의 답은 이거였어요. “인생은 싱거운 것이다. 나는 싱거운 인생을 짭잘하게 만들려고 예술을 한다.” 많은 책을 읽었지만 이만한 이야기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싱거운 인생, 좀 짭잘하게 만들고 싶다면 우리 전통 미술에 관심을 가져 보는 것도 좋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분명 삶이 좀 더 즐거워질 거예요. 이 책을 펼치는 순간 200~300년 전 태평성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 있어요. 저는 해설자로 최선을 다했으니, 여러분도 열심히 즐겨주시면 좋겠습니다.

 

***

 

조선의 색이 가장 선명하고 화려하게 드러나는 진경시대 작품을 탁현규 작가의 설명과 함께 보고 있으면 그 시절을 살던 옛 사람들이 갑자기 가깝게 느껴진다. 복식과 생활은 달라도 나처럼 이 땅에서 희노애락을 느끼며 자신의 삶을 살았을 수많은 이들을 그려보게 된다. 안타깝게도 진경시대가 지난 이후 조선의 그림은 다시 중국풍으로 돌아가는 경향을 보였다고 한다. 18세기 이후 우리나라 역사를 생각해보면 진경시대는 그야말로 반짝 빛나는 시대였으리라. 길지 않아서 더 아쉬운 그 태평성대를 그림으로나마 상상해 본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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