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너의 지금에 ‘가비지 타임’은 없다 [만화]

교실의 부외자들에게
글 입력 2023.02.19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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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인문계 고등학교임에도 대학 입시 성적이 변변찮았던 모교의 자랑 중 하나는 운동부(종목은 정확히 밝히지 않겠다)였다. 스포츠, 더군다나 입시 스포츠에는 관심도 흥미도 없었지만 늘 걸려있는 플래카드로 그들이 전국체전 1, 2위를 밥 먹듯 가져오는 자랑거리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졸업쯤에는 운동부 전용 체육관용 예산을 탔다며 뚝딱뚝딱 공사를 시작하더니 졸업 이후 모교 방문을 했을 땐 번듯한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당장에 낡아빠진 체육관을 새로 지어도 모자랄 판에 운동장까지 침범하는, 오로지 운동부만을 위한 건물이라니! 나를 포함한 학생들의 원성이 자자했던 기억이 있다. 생각해보면 학교 안에서의 운동부는 꼭 그 건물과 같은 존재였다. 학교의 멋들어진 트로피, 수업 분위기를 어지럽히는 눈엣가시, 교내의 부외자. 아무리 운동부가 성적이 좋았어도 결국 우리 학교는 ‘인문계’ 고등학교였으니 어쩔 수 없다고, 점심시간에 우르르 체육관으로 몰려가는 운동부 학생들을 바라보며 나와는 다른 애들이라고 속으로 선을 그었다.


3년간 그 선 위에 단단히 세웠던 벽은 내 입시 결과가 걸린 플래카드를 마주하고 나서야 조금 허물어졌다. 00대 합격 000. 엑셀 파일 속의 항목처럼 나열된 이름들 속 내가 합격한 대학들과 나란히 쓰인 내 이름을 보았을 때에서야 운동부라는 집단이 아닌 학생 선수 개개인에 관한 생각을 했다. 그 애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교무실에 순위별로 걸린 대학 합격자 목록을 볼 때처럼, 그 애들도 운동장 조례에서 상을 받을 때 해준 것 없이 명예만 가져가는 학교에 화가 났을까. 그러나 입시는 끝났고 졸업은 곧이었으므로, 운동부와 나의 접점 또한 거기까지였다.

 

 

 

한국형 엘리트 스포츠 웹툰이 주는 몰입감


 

우습게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시간이 꽤 흐른 지금에서야 그때 ‘그 애들’이 내 안에서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 스포츠라고 해야 배구 정도밖에 모르던 나에게 막무가내로 입시 농구 웹툰을 추천한 친구들 덕분이다. 2사장 작가의 웹툰 <가비지타임>은 엘리트 학생 선수, 즉 체육특기생에 관한 실화를 모티브로 한 입시 농구 만화다. 어렸을 때부터 시작하거나 늦게 시작하는 경우 1년 유급하는 경우가 많은 국내 엘리트 스포츠의 특성상 이야기는 ‘입문-갈등과 성장-강한 상대와 겨루기’라는 고전적인 스포츠 물의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이야기의 시작점부터 이미 농구를 알고 있으며, 훈련에 지쳐 있고, 갈등이 최고조인 상태다. 고등학교 1, 2학년 느낌의 힘차고 생기가 가득한 보통의 스포츠 만화와는 달리 <가비지타임>은 ‘K-고삼’ 그 자체다. 고등학교 입시 시절을 추억보단 트라우마로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은 우리나라에 딱 맞는, 한국형 엘리트 스포츠 웹툰이 주는 몰입감은 다른 나라의 스포츠 만화와는 다른 매력이다.

 

 

가비지타임 포스터.jpg

지상고등학교 선수들 (출처: 네이버 웹툰 <가비지타임>)

 

 

 

조명 아래에서 빛나지 않는 땀방울은 없다


 

주연인 지상고등학교는 넉넉한 벤치 멤버는커녕 번듯한 이동용 버스조차 없는 작은 팀이고, 팀원 중 몇몇은 농구 구력조차 짧다. 작중 시즌1의 시점이 벌써 5월임에도 3학년 ‘성준수’는 지망 대학의 최소 지원 조건인 ‘8강 진출’의 실적을 채우지 못했다. 내가 겪은 인문계 입시로 비유하자면, 대학 입시가 조별 과제인데 6월 모의고사까지 팀원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상황이다. 입시 경험이 있는 독자 대부분을 분개하여 몰입하게 만드는 시작점이다. 연습 경기에서 서로에게 쌍욕을 내뱉는 지상고 선수들을 바라보며 언젠가 학교에 등 떠밀려 응원하러 갔던 모교 운동부의 경기를 생각했다. 지금은 그 경기의 결과도, 선수들의 얼굴도, 인상적인 장면도 기억나지 않는다. 걔네들도 코트에서 저렇게 싸운 적이 있었을까?


작가는 코트에 뭉개져 납작했던 기억 속 그 선수들을 입체로 일으켜 세운다. 인물들이 보이는 붉다 못해 파랗게 타오르는 의지가 그 원동력이 된다. 작중 등장하는 신유고등학교의 조신우 선수의 열정이 그렇다. 다른 선수들보다 작고 발이 느린 조신우는 감독에게 ‘업둥이’로 대학에 입학할 것을 제안받는다. 같은 팀의 유력 선수인 강인석을 받는 대가로 함께 입학하는 대신 농구를 그만두라는 뜻이다. 그는 이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어떻게든 선수로서의 본인을 어필하기 위해 무리한 플레이를 펼친다. 팀에게 피해를 준다. 친구인 강인석과 주먹다짐을 한다. 그런데도 이 선수를 미워할 수 없다. 그가 두 발로 코트를 딛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거칠게 호흡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대로 농구를 포기하면 평생 후회하면서 살 거 같아요.” 조신우는 결국 감독과 강인석을 설득하여 업둥이를 포기한다. 사랑하는 농구를 계속하려는 조신우가, 그의 등을 두드리는 신유고등학교 선수들이, 그리고 그들의 반대편에서 이를 지켜보는 지상고등학교 선수들이 코트 위에서 살아 숨쉰다.

 

 

신유고등학교 조신우.jpg

신유고등학교 12번 조신우 선수 (출처: 네이버 웹툰 <가비지타임>)

 

 

이야기 속 엘리트 학생 선수들은 나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 오로지 농구만을 바라보고 뛰어도 모자랄 판국에 농구가 내 길이 맞는지 혼란스러워한다. 농구를 잘하면 농구만 해야지, 독자가 으레 생각할 때, 이야기는 인물을 관중의 옆에 앉힌다. 옆에 앉은 인물은 진훈정보산업고등학교의 에이스, 김기정 선수다.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분야가 명백한데도 김기정은 농구가 아닌 미술을 택한다. 끊임없이 경쟁하는 입시 농구보단 친구들과 함께하는 공놀이가 더 즐거운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의 팀원들은 에이스와의 헤어짐을 버벅대며 받아들인다. 친구가 새롭게 사랑하게 된 일을, 새로이 흘릴 땀을, 때때로 흘릴 눈물을 “멋있게 살아야 돼”라고 응원한다. <가비지타임>은 오롯이 농구만을 이야기하는 만화가 아니다. 주연들은 선수임과 동시에 아직 어린 고등학생들이다. 김기정을 통해 전하려는 것은 다른 길을 가도 그것 또한 길이라는 긍정이지만, 경쟁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이기도 하다.


진훈정산 마지막 씬.jpg

 

 

작가 2사장은 <가비지타임>을 그리게 된 이유를 설명하며 “내가 아니면 아무도 엘리트 운동부 학생들을 위한 이야기를 그려주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돌이켜 보니 이제껏 나는 엘리트 운동부에 관한 이야기를 한국 내에서 접한 적이 없다. 바로 옆 나라인 일본에 <하이큐!!>, <슬램덩크>, <크게 휘두르며> 등 다양한 고등학교 스포츠 만화가 있는 반면에 우리나라가 고등학교 운동부를 대하는 태도는 상대적으로 냉담하다. 학생 선수들은 대부분 교실 안에서 부외자로 머무른다. 모두가 입시의 추억을 이야기할 때, 체육 입시생들의 이야기는 주목받지 못한다. 내가 입시를 거치며 흘렸던 눈물도 누군가에겐 조명이 꺼진 무대처럼 흑백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조명받지 못하는 청춘’이 얼마나 많을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운동부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작가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까만 무대 위의 인물들에게 시선이라는 조명을 비추었을 때 제각각의 색을 입는 그 순간을 보고 싶다. 한 번 본 공연이라도 눈이 부시게 빛나는 장면은 잘 잊히지 않는다. 뇌 언저리에 자리 잡아 일상에서 자꾸 비슷한 것을 찾게 만든다. 이 웹툰을 일찍 알았다면, 늘 교실 뒤편에서 자고 있던 그 애들이 다르게 보였을까?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그 경기가 조금 더 다채로웠을지도 모르겠다.


 

 

너의 지금에 ’가비지 타임‘은 없다


 

농구 용어인 ‘가비지 타임(garbage time)’은 직역하자면 쓰레기 시간, 풀이하자면 이미 승세가 기운 게임에서의 ‘버리는 시간’이다. 승기를 잡은 팀과의 점수 차이가 클 때의 경기 후반을 지칭하며, 주로 후보 선수를 기용해서 경험을 쌓을 기회를 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가비지타임>이라는 제목은 식스맨(주전 5인을 제외한 6번째 대기 선수)인 기상호를 주인공으로 삼음으로써 통속적인 의미를 벗어낸다. 작중에서 경기를 버리는 것은 경기 밖의 감독이지 직접 경기를 뛰는 선수들이 아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지상고등학교의 학생 선수들, 그 중에서도 기상호다. 그에게 가비지 타임은 후보 선수인 자신의 진가를 보여줄 수 있는 시간이고, 주인공이 활약하는 모습은 만화 속에서 절대 ‘버리는 컷’이 되지 않는다. 작가는 엘리트 스포츠 학생 선수들의 아무도 조명하지 않았던 순간들을 그려낸다. 결국 <가비지 타임>이 기상호를, 조신우를, 김기정을 그리고 농구를 통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너의 지금에, 너의 그 어떤 순간에도 ‘가비지 타임’은 없다”라는 위로와 응원이 아닐까?

 

 

[박주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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