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을 반추해 본다는 것, <영원과 하루>

하루를 영원처럼 사는 것에 대하여
글 입력 2023.02.19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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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과 하루>, 테오 앙겔로풀로스

 

우선 워낙에 유명한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작품이라는 점이 시선을 끌었다. 게다가 생소했던 그리스 영화라니! 영화는 <영원과 하루>라는 제목과 걸맞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한층 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풀어내고자 했던 이야기도 생각보다 더 심오했고 복잡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첫 번째 관람 때는 영화를 해석할 수조차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두 번째 시도에서는 어렴풋이 눈에 밟히는 장면이 몇 생겼고, 마지막 세 번째 관람에 들어서야 완전한 감상이 가능했던 영화였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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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

 

그리스에서는 누구나 한 번쯤은 성장기에 알렉산더의 시를 배운다. 교육의 정전에 오른 시인과 함께 동시대를 살아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 시인의 위상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편 그렇게 저명한 동시대 시인이라고 할지라도 외롭고 쓸쓸하게 늙어 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알렉산더 역시 절망과 고독에 둘러싸여 쓸쓸히 여생을 보내게 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병까지 악화되어 이제 내일이면 꼼짝없이 병원에 입원해야만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된 것이다. 병원에 들어가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하루. 알렉산더는 이제 세계에 흩어져 있는 불멸의 시어를 찾음으로써 이 하루를 소비하고자 한다. 그렇게 시작한 인생의 마무리 여정에서 알렉산더는 알바니아 난민 소년을 만나게 되며, 그와 함께 남은 여정을 갈무리한다. 알렉산더는 여정의 끝에서 마침내 아름다운 시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되며, 불멸의 아름다움이란 하루를 영원처럼 보내는 지금 이 순간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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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란 무엇인가?

 

알렉산더의 여정은 우연히 발견하게 된 편지에서부터 시작하여 과거와 현실, 상상, 기억을 넘나드는 여정을 밟게 된다. 이렇듯 영화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과거와 현재의 중첩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혼란스럽게 섞여 있는 모든 장면들이 모여 종국에는 하나의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는 구성이어서 그런지, 사실 처음 볼 때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게 와닿지 않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은 모두 롱테이크라는 계산적인 방법을 통해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장면마다 더욱 몰입하여 관람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좀 더 루즈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영원과 하루>는 이러한 여로의 구조를 통해 노인과 소년의 이야기로 ‘삶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답변을 빼곡히 채워 간다. 죽음을 앞둔 알렉산더에게 내일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희망을 암시하는 단어가 아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마지막 여정을 함께하길 선택한 사람은, 바로 내일이 희망이 될 수 있는 한 알바니아 난민 솔로모스라는 소년이다. 내일이 절망인 자와 내일의 희망인 자, 노인과 어린아이, 모든 것을 누린 자와 모든 것을 잃은 자의 동행이 이 영화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들을 더욱 확장시켜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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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멸의 시어

 

어떻게 본다면 알렉산더의 여정은 죽음을 초월해 보고자 하는 간절한 몸부림과도 같았다. 불멸의 아름다움의 상징하는 '시어'를 찾아 굳이 거리를 헤맨다는 점이 특히나 그렇게 다가왔었다. 그가 그토록 찾던 세 시어를 찾아 주는 것 역시 그와는 대립되는 위치에 서 있는 알바니아 난민 소년이다. 영화를 감상하는 내내 자연스럽게 세 가지 시어를 곱씹을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알렉산더에게 동일시되었던 순간에서부터 잠시 떨어져 나와, 내 삶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기도 하였다.


1. 코폴라

코폴라가 상징하는 것은, 마치 어머니의 품에서 잠들 때 아기가 갖는 감정과도 같다. 가장 근원적인 어떠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그럴수록 나 역시 나의 태초, 어머니의 품,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에 대한 사색이 깊어졌다. 나는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내가 무엇을 위해 태어났을까를 고민해 보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영화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데, 나의 뿌리에 근원을 찾는 데서부터 질문을 확장시켜 나간다는 점이 꽤 흥미로웠다.


2. 세르띠니

세르띠니는 이방인으로 떠돌고 방황하며 살았던 삶을 상징한다. 이 부분에서 많은 생각이 일었던 것 같다. 나는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이방인으로서 살아 왔으며,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도 서울이란 낯선 공간에서 스스로 둥지를 틀며 살아 가야 했다. 그때의 상황에 자연스럽게 몰입해 볼 수 있었다. 꼭 그렇게 특정한 경험이 없다고 할지라도, 누구나에게는 반드시 어떠한 집단에서 이방인이 되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가족들에게도 이방인이 되었다고 느껴 본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때를 대입해 본다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깊이 느낄 수 있을 듯하다. 여담이지만 이 부분에서는 최근 읽었던 소설인 <테오도루 24번지>가 생각나기도 했다. 아프리카 난민, 그리스 소년, 불법 체류자, 가족의 뿌리를 잃고 버림받은 기억에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오합지졸로 모여 유쾌하게 상처를 극복해 나가는 내용이다.


3. 아르기디니

너무 늦었음을 뜻하는 단어이다. 알렉산더는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닫게 되었으나 흩어진 것을 바로잡기에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 만큼 이미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아르기디니'라는 단어는 우리의 삶을 너무나도 잘 담고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비단 알렉산더와 같이 죽음을 맞이할 때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사실들을 이야기하는 데서 나아가, 일을 하는 데 있어, 인간 관계를 맞는 데 있어, 삶을 살아 가는 데 있어 늘 모든 것이 종결된 후 후회하게 되는 우리의 일상과 매우 닮아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제 알렉산더는 이 세 시어들을 통해 자신이 깨닫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된다. 그는 그간 자신이 속해 있었어야 마땅할 공간에 속하지 못했고, 적절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그 공간에 진정으로 녹아 있지 못한 유령 같은 존재로 있었기에 가족에게도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잘못된 기억이거나 그의 상상에 그친 장면일지 모르는 아내와의 행복한 하루, 딸과의 소원한 관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의 상태 같은 흔적들은 알렉산더의 관계 맺음이 순탄하지 못했다는 사실의 증거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알렉산더는 이 모든 고독의 결과가 자신에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다. 

 

마침내 성찰의 끝에 도달한 알렉산더는 사랑하는 사람과 보낸 시간들이 그 어떤 위대한 시어보다 아름답고 영원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토록 찾았던 불멸의 시어는 사실 삶 속에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석해 본다면 영화가 말하고자 하였던 것 역시 생각보다 간단했다. 불멸의 아름다움과 시어는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것이라는 점! 

 

사실 '자신의 직업에만 몰두하느라 가정을 돌보지 못하는 남자'의 모습은 여느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이지만, 이렇게 의식 속의 의식을 탐사하며 자신의 내면 구석구석을 성찰해 나가는 구조 덕분인지, 장면장면의 의미를 읽어 나가는 과정에서의 울림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역시 테오 앙겔로플로스!

 

 

- 내적인 망명자, 하루를 영원처럼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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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는 소년과의 만남을 통해 그간 ‘침묵’으로 둘러싸여 있던 삶에 어떤 ‘소리’가 들리는 것을 경험한다. 소년은 어떻게 본다면 알렉산더의 ‘내적인 망명자’와도 같다. 특히 지하철 장면에서 그 부분을 강하게 느꼈는데, 마치 지하철 장면 속 자전거를 탄 노란 옷의 사람들을 연상하게 하듯 이 노란 점퍼를 입은 소년은 알렉산더에게 한 줄기 빛을 주기 위해서 실재하지 않는 그 어떤 곳에서 온 어린 천사이기도 할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알렉산더는 마지막 하루에서야 비로소 천사와 같은 내적 망명자 소년 영원 같은 하루를 보내지만, 이제 그 영원 이면에 있는 마지막 하루를 준비하기 위하여 소년과 이별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아르기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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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육체는 직선으로, 끝없이,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반복되어 흐르는 일상에서 반드시 맞이하게 될 죽음에 담대해질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바로 오늘을 영원처럼 사는 것이 아닐까? 

 

이렇듯 <영원과 하루>를 통해서는 알렉산더의 상상과 의식을 넘나드는 여정을 샅샅이 살펴볼 수 있다. 영화 감상 내내 생각의 폭이 마구 확장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알렉산더의 여정을 따라가며 나 자신의 내면을 더욱 꼼꼼히 탐사할 수 있었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알렉산더 본연의 호흡에 주목하는 데서 나아가 관객 자신의 삶을 다시 한번 성찰적으로 회고해 볼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 매우 매력적인 영화! 영화를 보는 내내 알렉산더의 내면 속에서 흐르는 시간과 정지된 시간 사이를 왕복하며 나 자신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이 사색해 보고 싶다면, 추천할 법한 영화이다.

 

 

[신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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