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매일 뜨고 지는 태양 아래,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두 인류 – 연극 ‘태양’

글 입력 2023.02.19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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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정동극장] 연극 태양_포스터(2.3-26).jpg


매일 뜨고 지는 태양 아래,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두 종류의 인류가 있다. 하나는 스스로를 밤의 인간 ‘녹스’로 칭하는 사람들, 그리고 또 하나는 골동품이라는 뜻의 ‘큐리오’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바이러스로 인해 세계 인구가 급감한 세상에서, 기적적으로 바이러스 항체를 가지게 된 ‘녹스’는 젊고 건강한 신체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초월적 변이를 기반으로 정치와 경제를 이끌어가는 신인류로 부상한다.


그러나 녹스는 자외선에 취약해 오직 밤에만 활동 가능하며, 생식 능력이 현저히 낮아서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겪고 있다.


반면, ‘큐리오’라 불리는 이들은 보다 자연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노화를 겪고, 상처와 질병으로부터 회복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며, 많은 생각과 감정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들. 무엇보다 그들은 생명의 근원으로 표현되는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있는 존재들이다. 

 

10년 전 구인류 큐리오들의 마을인 나가노 8구에서 신인류 녹스 한 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 사건으로 인해 나가노 8구는 10년간 경제 봉쇄를 당하며 고립된다.


그 시간 동안 마을 주민들은 모두 죽거나 떠나서 이제는 겨우 스무 명 남짓만이 남아 있다. 10년이 지나 마을 봉쇄령이 풀리고, 점차 마을의 구인류 주민들과 녹스 간의 왕래가 재개된다.


학교에 가고 싶어 녹스가 되기를 꿈꾸는 데츠히코와 태어날 때부터 녹스였던 후지타는 친구가 되고, 녹스 의사인 카네다는 자신이 녹스가 되기 이전에 친한 친구였던 소이치의 노화한 모습을 오랜만에 마주한다. 레이코는 자신이 큐리오였을 적에 낳은 딸 유가 아직 같은 곳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 호기심을 갖는다.


이렇듯 인물들 간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한편, 봉쇄 해제와 함께 1년에 한 번 30세 미만의 큐리오 중 1%에게 녹스가 될 권한을 주는 추첨 제도 역시 부활하며 마을에는 여러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꾸미기][크기변환]KakaoTalk_20230219_005802673_04.jpg

 

 

<태양>은 디스토피아적인 세계의 이야기를 상당히 경쾌하게 풀어간다. 밤의 인간 녹스의 이질적인 표현은 낯설면서도 경쾌한 극의 분위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플라스틱처럼 생긴 특이한 가발을 쓰고, 직선과 회전을 바탕으로 한 움직임은 짧게 분절되어 속도감이 느껴진다.


반면, 큐리오의 움직임은 보다 더 무게감이 있고 원초적인 에너지를 담고 있다. 로봇과 침팬지, 마블과 지브리를 상상하며 구현된 녹스와 큐리오는 외모, 말투, 움직임까지 모든 면에서 대조되며 이질감을 더한다.


초연에 비해 한층 규모가 커진 무대에서도 대비의 이미지가 드러난다. 일상적이고 낡은 잡동사니들이 언제라도 무너질 듯이 매달려있는 천장은 자유롭지만 불완전한 큐리오의 세계를 의미하는 듯하다. 그에 반해 텅 비고 공허한 바닥은 쓸데없는 생각이나 감정을 모두 배제한 채 이성적인 삶을 살아가는 녹스와 닮았다.


극 중 등장하는 사회에서는 녹스가 훨씬 우월한 존재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무대에서는 낡고 불완전한 골동품의 세계를 위에 배치함으로써 우위의 개념을 반전시킨다.


천장과 바닥, 즉 위와 아래의 사이에서 녹스와 큐리오는 각자의 장단점과 가치를 가진 채로 살아간다. 스스로 만족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가 가진 것을 부러워하기도 하면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누가 더 우월한지’에 대해 감히 판단을 내리겠다는 것이 꽤나 우스운 발상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들은 그저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모순적인 면을 가지고 있고, 누구도 완전하지 못하다. 아름답다가도 때로는 추하며 강한 자에게도 결핍이 있다. 완벽히 선한 자도, 오롯이 악한 자도 없다.



[꾸미기][크기변환]KakaoTalk_20230219_005802673_02.jpg

 

 

녹스인지 큐리오인지와 관계없이, 인물들은 자기 자신만의 열망과 생각을 가지고 결정을 내리며 살아간다.


연극 <태양>에서는 누구의 선택이 더 옳았는지, 어떤 삶이 더 가치 있는지에 대해 결론을 매듭지어 제시하지 않는다. 그 대신 각자의 선택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게 보여주는 것 자체에 중점을 둔다.


포토월 일러스트 전면에 내세운 인물이 다름 아닌 ‘이쿠타 유’라는 점에서도 이러한 작품의 의도가 드러난다. 극 중 ‘유’는 유일하게 큐리오에서 녹스가 되는 것을 선택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당신이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중요시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우선 고민해야만 한다. 뜨고 지는 태양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며, 나의 생각과 감정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시력 차이로 인해 같은 밤하늘 아래에서도 전혀 다른 광경을 보게 되는, 낮의 인간 데쓰히코와 밤의 인간 후지타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글을 마친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 존재했던 것들과 당연히 가지게 된 거라 여겼던 것들을 한 번쯤 새로이 바라볼 수 있길 바라며.

 

 

“너희 큐리오가 맨눈으로 볼 수 있는 건 제일 밝은 1등급부터 4등급까지야. 근데 우린 8등급까지 볼 수 있어. (⋯) 내 눈에는 엄청난 광경이 펼쳐져 있어. 하늘에 별빛이 가득해.”

“와, 좋겠다.”

“그거 진심 맞아?”

“지금 내가 보는 하늘도 엄청 아름답거든. (⋯) 만약에 내가 녹스가 되면, 지금 본 하늘보다 더 아름답다고 느낄까?”

“글쎄. 많이 보인다고 해서 꼭 그게 더 아름다워 보이는 건 아닌 것 같아.

너희한테는, 색깔이 있잖아.”

 

 

 

송진희 컬쳐리스트.jpg

 


[송진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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