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불쾌의 안경을 쓰지 않고도, 인간을 바로 보겠다는 의지 - 연극 '이백십일'

글 입력 2023.02.1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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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북적한 신촌 오거리에서 네온불빛의 화려한 홍대로 건너가는 그 잠시 조용해진 틈 사이에 '산울림 소극장'이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극단 산울림으로부터 시작된 <산울림 Sanwoolim>은 지하 1층의 소극장뿐 아니라, 1층 카페와 갤러리가 함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학교 다니면서 수도 없이 이 앞을 지나쳤건만! 늘 그렇듯, 바쁜 일상을 핑계로, 찾지 못했었다. 그러다 좋은 기회를 통해 '산울림 소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할 수 있었다.

 

 

 

정통성 존중과 이야기 중심의 순수성 회복, '극인단 이치'의 창단 공연 <이백십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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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관람하게 된 연극은 국내 초연작으로, <이백십일>이라는 작품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마음>, <풀베개>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일본 근대문학의 시초, 나쓰메 소세키의 단편소설 <이백십일>을 원작으로 한다. 1906년 일본 구마모토 아소산을 배경으로 하는, 청년 게이와 로쿠의 아소산 여행기이다. 다른 작품에 비해 비교적 유명한 작품은 아니기에, '극인단 이치'는 소세키의 수많은 작품 중 왜 <이백십일>을 무대에 올렸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한편 이번 공연은, 극단 산울림의 전통을 잇는 공연이라 더욱 기대가 되었다. 한국 연극계의 대부 임영웅 연출가의 제자, 윤영성이 연출을 맡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번 공연을 올린 ‘극인단 이치’의 창단 이유에 ‘정통성 존중’라는 키워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연극의 정통성은 무엇이며, 또 정통성에서 비롯된 '순수함'은 어떤 느낌일까?


다소 어려운 질문과 탐구심일 수도 있다. 쇼츠, 릴스의 1-2분 남짓한 영상을 빠르게 소비하는 시대에, ‘연극’이라는 묵직한 무언가, 여기다 ‘정통성’까지 더한다고 하니 요즘 호흡과는 걸맞지 않은 행보인 건 아닐까 염려했다.


그러나 ‘극인단 이치’의 창단 이유에는 '정통성'뿐 아니라 한 가지가 더 있다.

 

 

“정통성을 존중하고 이야기 중심의 순수성 회복이라는 열정을 가지고 창단하였습니다. 사회적 메시지 전달 목적이 아닌 순수하게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에 집중합니다.”

 

- '극인단 이치'를 설명하는 문구 中

 


‘순수하게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관객에 가깝게 다가가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해석하면, 극인단 이치가 올린 <이백십일>(연극)을 통해, 연극의 순수한 정통성은 살리면서 우리 곁의 공감 가능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그들이 왜 <이백십일>이라는 작품을 창단 공연작으로 택했는지,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었다. <이백십일>에는 현대의 우리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오늘날의 인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친구가 함께 여행하는 것이나 돈에 구애받지 않기 위해 요량을 피우다가 결국 현실에 순응하고 마는 인물이나, 또 자신의 위치에서 할 도리는 다하면서 할 말을 하는 인물 등의 모습은 지금 2023년에도 여전히 마주할 수 있는 인간상이다.


딱딱하게 느껴지는 ‘연극적 형식’때문에 관객 몰입의 문턱이 다소 높을 수 있어도, 작품에서 그려내는 이야기 자체는 정말이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한번, 그 문턱만 넘으면 누구나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이고 주제이다.


그러나 쉽게 생각할 수 있어서 가볍게 여겨지는 주제는 절대 아니었다. 여기서 '연극'만의 매력이 드러난다. 앞서 말한 ‘딱딱한 형식’이라고 하는 장치 때문에, 관객은 쉽게 몰입을 할 수 없으면서도 계속 생각을 해야 한다. 즉, 관객의 능동적 참여가 매우 중요한 매체인 것이다.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카메라의 프레임을 통해 집약해서 표현하는 영화와 달리, 연극에서는 관객이 자발적으로 장면을 편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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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하고 있는 인물 외에도, 주변의 많은 것들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스포트라이트 받는 주인공은 따로 있지만, (마치 삶처럼) 다른 것들 또한 동시간대에 움직인다. <이백십일>의 주인공 게이와 로쿠가 묵는 료칸(숙소)의 방 건너편에는 다른 손님이 묵는다. 옆방 손님인 도련님은 게이와 로쿠가 말하고 있는 도중에 이불을 덮고 자고 있고, 방 밖에서는 여관을 관리하는 노인이 가지치기를 하며 손님의 시중을 드는 종업원이 연신 왔다 갔다 한다.


관객은 무대 위의 모든 일을 관망한다. 그리고 그중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보게 되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그 사이에 집어넣고 주제를 도출한다. 가끔은 머릿속에 딴생각이 들어찰 수도 있다. 하지만 잘못된 건 아니다. 시선이 분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점이, 연극이 지금 이 시대에도 필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현시대는 편집점 없이 너무나 매끄럽다. 한 마디로 요약된, 앞뒤 맥락 다 잘린 1-2분 남짓 편집된 영상을 보고도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인식한 순간 정의하고, 단번에 호불호를 매긴다.


인식에서부터 가치판단까지 너무나도 순식간인 세상에, 연극의 정통성 존중을 외치는 ‘이백십일’은 현대인들에게 불편하지만, 자신만의 결론을 도출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분명 머리를 쓰는 어려운 문제를 푸는 일이다. 많은 사람이 제목은 알아도 읽어보지는 않은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도 실제로 어렵다. 나 또한 그랬다. 비유와 형식이 가득한 문자를 해독하는 것 마냥, 몇 번을 다시 읽고 다시 읽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섬광이 번찟하는 것처럼! 이해가 되는 순간이 온다. 그러면 그때서부터는 '나만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완성이 되는 것이다.

 

 

 

'극인단 이치'가 <이백십일>에서 인간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방식


  

연극 <이백십일>의 여러 흥미로운 부분 중 무엇보다 각색이 탁월했다고 느껴졌다. 먼저 원작에서는 옆방에 묵는 도련님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다. 엘리트 출신의 도련님은 언뜻, 나쓰메 소세키 자신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다. 실제로 다른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에고이즘과 고독이 가득한 인물을 차용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백십일> 원작에서는 흔히 접하는 기승전결의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지 않다. 되려 산문이나 일기에 가깝다. 그러나 탁월한 각색으로 게이와 로쿠의 여행기에 생동감을 불어넣었고, 게이와 로쿠와 대비되는 도련님 캐릭터를 배치해 주제를 이끌어냈다. 또한 이들 사이를 종업원이 끊임없이 들어갔다 나가며 장면 전환을 시키며, 또다시 그 빈틈은 여관을 관리하는 노인의 분위기로 은은하게 채워진다.


도식적으로 보이는 인물 간의 대화에도 감정적 교류가 존재한다. 고집도 세고 목표지향적인 게이, 우유부단하지만 유쾌한 로쿠, 정반대 성향의 두 사람 간의 말다툼은 잦다. 둘의 티키타카를 보고 있으면 일본의 인기 많은 개그 중 하나인 ‘만자이’가 떠오르기도 한다. (*만자이 : 콤비를 이룬 2인에 의해 익살스러운 주고받기, 대화로 관객을 웃기는 전통 예능)


그러나 게이와 로쿠는 각자의 의견을 맞추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각자의 장점으로 서로를 이끌어주면 험난한 산을 오른다. 고마워하고 미안해하는 포인트가 달라 자주 서운해하지만, 결국은 함께한다. 별 것 아니지만 여기서 둘은 앞으로 나아갈 계기를 얻는다.

 

반면, 옆방 도련님은 그 어느 것에도 구애받기 싫어하는 지식인인이지만 타인을 향한 ‘불쾌의 안경’을 쓴다. 처음에는 아무 말 않다가 밀린 방값을 내기 위해 찾아온 종업원에게 불쾌함을 내비치기 때문이다. 이에 종업원은 응수한다.


“스스로 불쾌의 안경을 쓴 채 세상을 보고, 보여지는 우리들까지 불쾌하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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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십일>이라는 작품은 이처럼 여러 인간상을 보여주지만 연출자는 불쾌의 안경을 쓴 도련님이 아니라, 함께 나아가는 게이와 로쿠 즉 인간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편의 손을 들어준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이백십일>이 왜 그들의 창단 공연작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창작자들이 '불쾌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본다 해서, 보여지는 보통의 사람들까지 불쾌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이들은 인지하고 있다.

 

가끔씩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에만 방점을 두어, '인간'이라는 여지와 틈 그리고 희망을 묵살하는 경우를 더러 목격했다. 특히 '예술'이라는 그럴듯한 방패에 가려서 말이다.

 

그러나 '극인단 이치'는 연극 <이백십일>을 통해서도 그렇고, "관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자극적이지 않고 은은한 유머를 전달하겠다"는 설명을 통해서도 그렇고,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을 넘어서서 본래 이야기하고자 했던 인간을 놓치지 말자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그들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그들의 두 번째 공연도 기쁜 마음으로 관람할 수 있는 날을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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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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