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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또 하나의 목소리 [영화]

by 황수빈 에디터
2023.02.13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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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소리의 형태 



우리는 목소리를 통해 말을 하고, 소통한다. 생각으로만 그칠 것이라면 굳이 ‘목소리’라는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 목소리는 ‘드러냄’이다. 그것엔 어떤 마음과 함께 표출의 의지가 담겨있다. 표출한다는 것은 곧 그것에 노출될 타인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목소리의 형태는 목소리를 ‘내는’ 이의 마음인 동시에 목소리를 ‘듣는’ 이의 마음이기도 하다. 다만 이 둘이 반드시 일치하지만은 않는다. 우리는 나의 목소리가 상대에게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알지 못한 채 마구 칼날을 내뱉기도 하고, 종종 잡음이 껴서 목소리는 그저 허공에 내뱉는 독백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목소리는 어떤 형태를 하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정말 그 목소리들을 온전히 전달하고, 전달받고 있을까. 영화 〈목소리의 형태〉는 그런 마음과 마음, 어긋남과 맞닿음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사실 이 영화를 두고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니시미야에 대한 이시다(와 주변 인물들)의 따돌림이 중심이 된 과거, 이시다와 니시미야의 재회 및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 확장, 과거 폭로와 니시미야의 자살 미수, 그리고 인물들의 관계 회복. 이 과정에는 가해와 피해의 구도, 그로 인한 자기혐오와 죽음의 이미지가 곳곳에 담겨 있다. 충분히 민감한 사안이라고 칭할 법한 요소들이다. 이를 보고 학교 폭력 문제를 지적하며 어떤 이유든 사람을 따돌려선 안 된다는 교훈적인 감상을 논해볼 수도 있고, 특히 니시미야의 청각 장애라는 요소를 두고 피해자를 만들어낸 사회적 배경 및 시스템 미비에 대해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는 구분하기 어렵게 뒤섞이고 전도되고 있다. 필자는 생각했다. 구태여 '이런' 설정과 소재로, 복잡하게 엉킨 인물들로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바로 무엇이엇을까? 단순한 대립 구도를 통해 도출해낼 수 있는 메세지 그 이상을 전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의문과 함께 영화를 재차 톺아보자, 이 이야기가 견지하고 있는 어떤 일관적인 태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그것을 설명하는 키워드로서 '소통', 곧 '목소리'를 제시하고자 한다. 영화에서 각자의 ‘목소리’가 어떻게 좌절되고, 왜곡되었는지, 그리고 인물들이 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끝내 서로 맞닿을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고 그 의미를 찾아가보도록 하자. 

 

 

 

2. 닿지 않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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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을 하나 꼽자면 이시다의 시점에서 붙여진 ‘X표시’를 말할 수 있다. X표시가 붙으면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고, 얼굴을 보지 않으면 상대가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서두에서 ‘목소리’가 곧 서로의 마음과 그에 대한 표출의지라고 했던 것처럼, 이런 반쪽짜리 ‘목소리’를 통해서는 제대로 소통할 수 없다. 실제로 작중에서 X표시가 붙은 인물들의 얘기는 웅얼거리는 노이즈처럼 처리되고, 거기에는 간간이 “이시다는 늘 저렇게 혼자 있어.”, “저 녀석은 왜 살까?”와 같이 이시다의 자의적인 해석이 독백처럼 뒤따른다. 그러나 이시다는 친구들과의 갈등을 극복한 뒤 세상엔 자신을 향한 적의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인물들의 X표지가 일제히 사라지는 장면이다. 결말부에서 X표시가 사라진 인물들의 대화는 이시다의 부정적인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저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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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표시 외에도 얼굴을 가리거나 비추는 구도를 이용한 장면은 자주 등장한다. 비 오는 날 유즈루와의 대화 장면도 그렇다. 유즈루에겐 X표시가 붙어있지 않지만, 이날 유즈루가 이시다의 진심을 의심하는 발언을 하자 이시다는 우산을 내려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한 뒤 유즈루의 발을 쳐다본다. X표시가 붙은 인물들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상대의 반응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것이다. 이시다가 자신은 살아선 안될 사람이며 니시미야를 울리고 싶지 않을 뿐이라는 속내를 얘기하자, 유즈루는 우산을 올리고 눈을 맞춰온다. 이는 그의 진심을 이해했으니 기꺼이 자신도 마음을 열겠다는 것이었고, 이후 그들은 친밀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다리 위에서 친구들과 다툰 뒤 이시다가 눈을 떨구는 것처럼 앵글이 내려가 인물들의 얼굴이 잘리는 구도, 학교 축제에서 나가츠카의 걱정 어린 말을 듣기 전 발만을 비추는 구도 등이 종종 연출되었고 이 장면들은 모두 이시다가 상대를 마주할 의지와 용기가 없는 순간을 나타낸다.  


이렇게 영화에서는 이시다가 겪는 목소리의 좌절과 왜곡을 꾸준히 그려낸다. 그런데 이는 이시다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일단 이시다가 가진 ‘소통의 어려움’이라는 요소를 인식하고 나면, 다른 인물들 역시 비슷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회 이후에도 한동안 니시미야의 목소리를 외면하려던 우에노, 정점에 오르는 롤러코스터에 탄 것처럼 겁이 나서 우에노를 그저 피했던 사하라,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니시미야는 큰 소리로 말하면 알아들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카와이, 그리고 말 그대로 ‘들을 수 없는’ 니시미야(절대 그의 장애 자체가 문제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에 대해선 곧 후술하겠다). 모두 온전히 목소리를 주고받을 수 없었다. 

 

니시미야의 장애는 사실 작품에서 강조하는 소통의 어려움을 극대화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목소리는 각자의 ‘마음’인 동시에 또 그것을 전달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에노가 수화를 배우는 것을 거부했듯, 보통 사람들은 자신에게 편한 수단 이외의 것을 좀처럼 시도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말하고 듣지 못한다는 것은 남들과 소통하는 데에 있어서 큰 패널티이다. 니시미야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이시다와 몸싸움을 하는 장면에서 자신은 최선의 노력을 했다고 말한다. 과거의 필담 노트 역시 소통을 위한 니시미야의 노력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니시미야에게는 수화가 편한 ‘목소리’지만, 다른 아이들에게 편한 쪽은 필담이기 때문이다. 니시미야가 머리를 묶어 귀를 드러내고, 수화나 필담이 아닌 진짜 자신의 목소리로 이시다에게 고백하는 장면도 이시다와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러나 관람차 속 대화에서 니시미야는 우에노에게 “결국 넌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와 얘기할 마음이 없는거야.”라는 말을 들었다. 왜였을까? 니시미야 역시 결과적으로는 온전한 소통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에노의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니시미야의 고통은 그가 자초한 것이라는 류의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목소리를 주고받지 못했던 인물들에 니시미야 역시 포함된다는 것이다. 분명 니시미야는 노력했다. 하지만 니시미야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자신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아이들에게 그저 웃음으로 대응했다. 응당 화를 내야할 상황에서도 억지로 웃었고,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니시미야가 정말 아무런 분노도 느끼지 못해서 그런 태도를 취한 것은 아닐 터이다. 니시미야는 자신이 가진 패널티를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은 후의 상대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니시미야의 웃음은 자신을 방어하는 유일한 수단이었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진심을 가리는 연막이 되었다. 우에노에게는 그것이 일종의 회피로 느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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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다와 니시미야, 이 둘의 문제점이 함께 작용하는 순간이 바로 친구들과 다리 위에서 다툰 후 둘이 떠난 여행 장면이다. 여기서 햇빛을 등지고 선 니시미야와 그를 마주본 이시다의 구도가 나타나는데, 이시다는 햇빛 때문에 니시미야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리고 그 위에 어릴 적 니시미야의 모습이 빠르게 겹쳐진다. 그 모습은 니시미야가 처음 친구가 되자고 했을 때, 괴롭힘 당했을 때, 둘이서 몸싸움을 했을 때의 모습이었다.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이시다가 니시미야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던 순간이다. 

 

여행을 떠난 니시미야는 관람차에서의 대화, 다리 위에서의 싸움 이후 자신 때문에 주변인이 불행해졌다는 자기혐오가 극에 달해 있는 상태였다. 그로 인한 니시미야의 사과에 “내일도 놀자. 니시미야. 알았지?”라고 대답하는 이시다의 모습은 니시미야의 죄책감을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시다 역시 자신만의 자기혐오에 빠져 있었다. 즉 이시다가 니시미야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는 건, 겹쳐진 과거의 장면들처럼 이시다가 니시미야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음이다. 니시미야의 자살 결심을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던 것이다. 그러나 이시다가 니시미야의 표정을 보았다고 해서, 그 이후가 달라졌을 것이란 보장도 없다. 니시미야의 태도에서도 소통의 문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니시미야는 곪아가고 있는 속을 감추고 여전히 웃으며 사과를 건네고 있었다. 계속 쌓여온 불통(不通)은 이시다를 다리 앞까지 몰고 갔듯 니시미야를 난간 끝까지 밀고 갔다. 

 

 

 

3. 그리고, 소통


 

소통의 문제가 생길 때마다 아이들의 관계는 꼬여갔다. 그러나 이것이 해결될 때마다 아이들의 관계는 발전한다. 영화의 긍정적인 시사점은 바로 여기 있다. 불통에서 비롯한 문제는 다시 소통으로 풀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친구가 되자는 니시미야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던 이시다는 수화를 배웠다. 추락하는 니시미야의 손목을 붙잡고 내일부터 애들의 얼굴을 제대로 보겠다며 애원했다. 사고 후 처음 니시미야를 만난 다리 위에서 정식으로 과거의 행동에 대한 용서를 구했다. 모두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있게 되었다. 웃음밖에 짓지 못하던 니시미야는 펑펑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사라지면 해결될 것 같았다는 마음을 토로했다. 아이들은 이시다의 소식을 전하는 니시미야에게 다행이라는 대답을 들려줬다. 그렇게 모두들, 서툴지만 하나씩 매듭을 풀어갔다. 

 

우리네 얘기를 조금 덧붙여보자면, 현대인의 소통 부재는 이미 고질적인 문제로 거론되어왔다. 소통의 부재를 해결해야한다는 주제를 다룬 작품도 사실 너무 많이 봐왔다. 과거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친구가 된다는 설정에 비판적인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도 물론 존재한다. 그런데도 이 작품이 이토록 마음에 와닿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영화에서 앞서 지적된 요소들이 ‘제대로’ 소통하는 것의 어려움, 그 과정에서 받을 수 있는 상처를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는 이시다의 과거를 미화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시다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이시다 본인이 계속해서 곱씹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관객들이 가해자 혹은 방관자의 입장에 있던 우에노, 카와이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도 그들의 행보를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전달했기 때문이 아닌가. 사실 니시미야와 같은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라도, 인간과 갈등은 불가분한 관계다. 그 속에서 자신이 절대적인 가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럴 만해서 그랬다, 나는 직접 가해를 하지 않았으니 나쁘지 않았다’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초래한 불통의 순간을 자각할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에서 영화는 유의미한 가치를 전달한 것 아닐까. 

 

또한 영화는 가볍고 얕은 속죄와 용서를 가장한 무뎌짐을 얘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아프고 힘들 수 있다는 것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이시다와 니시미야가 닿지 못했던 최초의 순간을 기억한다. 그때의 목소리는 긴 시간 동안 어긋나고 돌아 겨우 전달되었다. 오랜 시간 소외되는 경험을 통해서야 자신의 목소리가 니시미야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상처였다는 것을 깨달은 이시다, 켜켜이 자기혐오를 쌓아온 니시미야, 과거의 일을 두고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아이들. 어둡고 깊은 감정의 골이, 죽음 같은 침묵이 여기저기 도사리며 인물들을 위태롭게 흔들었다. 이후에도 풀어나가야 할 일들이 많다는 것을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은연중에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단면적인 해피엔딩이 아니라, 영화가 끈질기게 보여주었던, 여전히 서투르고 상처를 품은 인물들이 단단해지는 ‘과정’으로서의 소통과 그 이후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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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모두가 이상적인 결말을 맞을 수는 없다. 끝끝내 서로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어긋난 채로 마지막을 맞게 될 갈등들도 있다. 현실의 우리는 너무 자주 ‘다른’ 것에 관대하지 못하고, 서로를 궁금해 하지 않으며, 결국 독백으로 끝날 목소리를 발신하다 지쳐 외로워한다. 하지만 허구는 그것이 현실과 같을 수 없다는 한계가 작용하는 동시에, 허구이기 때문에 순도 높은 희망을 깨끗이 전달할 수 있다. 그 희망의 원형은 사실 현실의 우리가 기적처럼 소통한 순간의 환희에서 출발했던 것은 아닐까? 결말의 이시다가 터널 끝의 빛 속에서 주변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렸던 것처럼. 쉽사리 전달되지 않는 목소리지만, 계속해서 내 것의 형태를 돌아보고 다른 이들의 형태를 찾아가는 일의 중요성을 말하는 〈목소리의 형태〉. 결국 이 이야기는 들어줄 이를 기다리는 또 하나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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