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길이 열리는 대로 가라

인생은 자두처럼!
글 입력 2023.02.18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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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계획을 하나도 세우지 않는 사람 D를 만났다. 정확히 말하면 장기적인 계획이다. 자신이 세우는 계획은 최대가 하루치 계획이란다. 그런데 그는 뭐든 척척 해내는, 멋지고 열심히 사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지금까지는 열심히 사는 사람은 곧 계획을 잘 세우고 잘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을 깨게 해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물어봤다.

 

"계획을 하나도 안 세우는데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살아?"

 

그러자 D는 자기는 계획을 세우지 않는 대신 매사에 충실한다고 답했다. 장기적인 계획이 없더라도 매 순간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에 집중하다 보면 어디로든 가게 되어 있다고. 자기는 미래가 어떻게 될지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크기변환][포맷변환]여행자의 마음으로 1.jpg

   

 

D와 달리 나는 엄청나게 계획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그 계획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 많은 불안과 강박을 느낀다. 어디서 본 적이 있다. mbti J와 P는 계획을 세우고 안 세우고의 차이가 아니라, 예상치 못한 것들을 얼마나 유연하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른 거라고. J형은 돌발 상황이나 변수를 싫어하기 때문에 계획하고 상황을 통제하려 하는 유형이며, P형은 상황에 적응하고 융통성 있게 대응하는 유형이라고 한다.

 

나는 예기치 못한 변화들이 두렵다. 융통성이 없다고도 할 수 있겠다. 내 힘으로 통제 불가능한 일들에 많은 화가 난다. 강박증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차근차근 계획해왔던 일이 무너지면 그 후의 계획들도 와르르 무너져서 완전히 새로운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 두렵다.

   

내가 대담하지 못한 성격이어서 그런 건지 걱정이 많아 항상 대비책을 세워둬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인생 전체가 흔들릴 만한 실패는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만큼 큰 성공도 이뤄보지 못했다. 사실 성공과 실패를 크기로 재단할 수 있겠냐마는.

 

나는 항상 ‘안전함’을 추구해왔다. 몇 주 전 합격한 대외활동 자소서를 첨삭받을 기회가 있었다. 담당자분이 내 자소서는 거슬리는 부분 없이 딱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이 잘 썼다고, ‘안전하게’ 합격할 만 했다고 해주셨다. 하지만 그 말은 곧 딱히 눈에 띄거나 월등히 뛰어난 부분도 없었다는 것.

 

보통 ‘안전지대’라고 하는, 그 경계를 뛰어넘는 것이 두려웠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어서였을까, 내가 상식을 뛰어넘는 창의적인 생각을 던졌을 때 사람들이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그냥 대담함이 부족한 내 기질 때문이었던 걸까.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야 하는 성격과 안전지대를 뛰어넘는 것을 두려워하는 성격이 만나, 나는 어느새 매우 경직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매년 초에 만다라트 계획표를 쓰면서 그 해 이루고 싶은 목표들을 적었고, 방학이 되면 방학 동안 해야 할 것들을 쭉 나열했고, 시험기간 한 달 전부터 달력을 그려서 매주의 계획과 매일의 계획을 세웠다. 계획을 이루면 기뻤지만 이루지 못했을 때는 나를 탓하기 바빴고, 눈으로 보이는 성과가 없는 날이면 그 모든 시간들이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세워놓은 계획들을 미래의 내가 지키지 못할까봐 항상 불안감을 가지고 지냈다.


 

[크기변환][포맷변환]인생의 갈림길.jpg

 

 

물론 지금도 약간의 불안은 있지만 예전보다는 덜하다. 올해는 만다라트 계획표도 쓰지 않고 한 해를 살아보기로 했다. 현재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어떻게든 내 목적지에 도달하겠지라는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내가 이렇게 마음가짐을 바꿀 수 있던 데에는 위에서 언급한 D의 말과 유현준 교수님이 해주셨던 말씀의 영향이 컸다.

   

 
길이 열리는 대로 가라. 계획대로 되는 길은 없다. 맡은 자리에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되면 좋은 거고 안되면 다른 길이 있는 거에요.
 

 

처음에는 이 말의 의미를 잘 몰랐었는데, 생각해보니 대학에 와서 이런 경험들을 정말 많이 했다는 것을 얼마 전에야 깨달았다. 내가 처음에 계획했던, 원했던 길이 아닌데도 그 길을 갔더니 결국에는 내가 기대하지도 못했던 더 좋은 결과가 나왔던 경험. 사실 이 깨달음은 시간이 지나서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그 경험을 하고 있는 순간은 내가 이루지 못한 그 꿈을 그리워하기에 바쁘니까.

 

내가 계획하지 않았던 일들도 최선을 다해 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그 의미가 내게 돌아온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의미가 즉각적으로 보이지 않기에 힘들 수 있지만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경험은 없다는 것. 내가 굳게 믿고 있는 것 중 하나다. 계획하지 않았던 길을 간다 해도 계획할 당시의 나는 상상도 못했던 좋은 경험들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것. 오히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나를 안전지대에서 한 발짝 나올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 예상치 못하게.

 

생각해보면 계획했던 대로만 흘러가는 인생은 재미없을 것 같다. 미래와 계획에 너무 집착하지 않으면서, 대신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면서. 그러면 언젠가 분명 꿈꿔왔던 목적지에 도착해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계획했던 목적지보다 더 멋진 곳에 도착해있지 않을까. 과거의 나라면 상상도 못했을 멋진 곳.

 

 

[최지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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