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좋은 감정이 남아있는 장소가 있나요?

글 입력 2023.02.09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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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좋은 곳에 가는 걸 이렇게 말해요. ‘애들은 다 까먹을 텐데 왜 좋은 곳에 데리고 가냐.’ 그런데 거기에 대한 제일 좋은 답은 좋은 감정은 남는다는 거죠. 부모와 함께 바다를 갔고, 바다에 대한 좋은 감정은 남아서 구체적으로 어떤 해수욕장인지, 뭘 먹었는지 잊어버려도 나중에 바다에 가면 굉장히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 듯이 어차피 책이라는 건 읽고 나면 70% 이상은 다 잊어버린대요. 그래도 그 책을 기분 좋게 봤다는 느낌만 남는 거죠.

 

- tvn '알쓸인잡'에서 김영하 작가의 말

 

 

나는 바다를 좋아한다. 바다를 좋아하는 마음은 누구든 마찬가지이겠지만, 난 각별히 좋아한다. 바다 하나 보려고 혼자서 훌쩍 떠난 적도 있다. 바다와 하늘의 풍경, 바닷냄새, 파도 소리를 온몸으로 누릴 때가 가장 좋다. 초록빛의 바다보다는 하늘을 그대로 비춘 푸른빛의 바다를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하늘색이나 파란색을 보면 바다가 떠올라 기분이 좋아진다.


어느 날, tvn의 ‘알쓸인잡’에서 김영하 작가의 말을 들으면서 지난날을 돌이켜봤다. 우리 가족은 소소한 나들이나 여행 추억이 많았다. 그중 바닷가에 간 추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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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좋은 감정이 남은 추억



우리가족이 살던 지역에는 없지만, 차로 50분 정도 거리에 바다가 있는 지역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족은 바닷가에 종종 갔다. 맛조개를 잡기 좋은 서해라서 초등학생 때는 여름 방학마다 맛조개를 잡으러 갔다. 썰물 때에 맞춰 가거나 미리 가서 물놀이하다가 물이 빠지면 맛조개를 잡았다. 


맛조개를 잡는 방법은 간단했다. 동글동글한 구멍이 아닌, 길쭉한 타원형의 구멍에 맛소금을 넣으면 맛조개가 쑤욱- 나온다. 그 순간, 너무 세지 않게 손으로 잡아서 빼면 된다. 맛조개 잡을 때 우리는 역할 분담이 확실했다. 아빠와 엄마가 길쭉한 구멍에 맛소금을 넣으면, 나와 동생은 기다렸다가 맛조개가 나오면 얼른 잡았다. 그때의 나는 겁 없고, 호기심 많은 아이여서 무서워하지 않고, 맨손으로 잘 잡았다. 동생은 처음에 무서워했지만, 내가 재밌어하는 걸 보고 맛조개 잡기에 곧잘 적응했다. 


맛조개 구멍을 잘 알아보는 것이 중요한데, 부모님이 그 구멍을 잘 찾아줘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맛조개를 실컷 잡을 수 있었다. 맛조개를 넣어 끓인 라면도 먹었다. 그때 먹었던 라면은 지금도 기억날 정도로 맛있었다. 꼬들꼬들한 면발에 바다향이 나고 시원했던 국물은 바닷가라는 장소와 궁합이 좋았다. 맛조개의 맛은 일반 조갯살과 비슷했지만, 더욱 쫄깃했다. 


맛조개를 잡을 때마다 신기해하고, 기뻐하는 우리 모습을 보며 부모님도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잔뜩 신이 났었다.


어느 날에는 엄마와 함께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다리에 모래를 뿌리며 놀았다. 그리고 엄마는 내게 노래를 알려줬다. 엄마가 한 소절 부르면, 나도 따라 불렀다. 그때 잘 따라 한다면서 흐뭇해하던 엄마의 모습이 좋았다. 모래 위에 앉아있을 때마다 노래를 조금씩 배웠는데, 언젠가부터 가사와 음을 외워서 엄마의 시범 없이도 혼자 잘 부를 수 있었다. 바닷가에서 엄마에게 배운 노래는 바다와 잘 어울리는 곡 ‘연가’와 동요 ‘얼굴’, ‘과수원길’이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어린 나는 파도 소리를 반주 삼아 엄마에게 노래를 배우던 그 시간이 소중했다.


그 후 나와 동생이 자라면서 전처럼 맛조개를 잡으러 가지 않게 됐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족끼리 바다를 찾았다. 한 번은 새해가 되던 날, 기념으로 겨울 바다를 보러 갔었다. 옷을 많이 껴입었는데도 매우 추웠다. 바람이 얼굴에 닿을 때마다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그래도 겨울 바다를 보던 우리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누군가가 등대 있는 곳에 가보자고 해서 등대까지 걸어갔는데, 바람에 몸이 밀리는 느낌이 들고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힘겨웠다. 그래도 우린 꿋꿋이 등대까지 갔다 왔다. 조금 툴툴대긴 했어도 누구 하나 크게 싫은 내색 없이 한마음 한뜻으로 등대까지 갔다 온 우리들의 모습이 기특하고 예뻤다. 몸은 힘들었지만, 우리 가족의 얼굴은 편안하고 즐거워보였다.


그때 봤던 겨울 바다는 춥고 시렸지만 제일 아름다웠다. 그날을 계기로 겨울 바다만의 매력을 알게 됐다. 그래서 지금도 사계절의 바다 중 어떤 계절의 바다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바로 대답할 수 있다. 겨울의 바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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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지 않지만, 좋은 감정은 남아있는 추억



나의 어릴 적 모습이 담겨 있는 앨범에는 귀여우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사진이 있다. 바위틈에서 큰일을 보고 있는 유아기때의 내 사진이다. 괄약근에 힘을 주기 위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 그 모습은 사진뿐만 아니라 부모님의 기억에도 남아있어서 아직도 이야기하실 때가 있다. 그 사진이 찍힌 날 외에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가족과 함께한 바다의 추억이 많다고 하셨다. 그러고 보면 나는 어느 지역에서 살든 유아기 때부터 바다와 친하게 지냈던 것 같다.

 

이렇게 보면 우리 가족은 매우 화목하고 여유가 넘쳤던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아빠의 귀농·귀촌 후, 우리 집에는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형편은 더 어려워져서 돈과 시간에 쫓겼다. 힘든 현실과 오해와 갈등으로 부모님의 다툼은 잦았다. 부모님의 싸우는 모습과 소리를 보고 들으며 자랐고, 밤마다 들리는 말다툼 소리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다툼 중에 나를 부를 때도 있어서 항상 긴장해야 했다. 울다 지쳐 새벽이 넘어서 겨우 잠들었다. 대학 진학 때문에 집에서 나오기 전까지 그런 생활이 반복됐다.


김영하 작가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나는 보았던 것 같다. 그늘진 부모님의 얼굴과 우리 가족의 삭막한 분위기가 바닷가에 가면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을 말이다. 그래서 바닷가에 가족과 함께 있는 순간이 그렇게도 신이 나고 좋았나 보다.


자세히 기억나지 않아도 좋은 감정은 남는데, 나한테는 구체적인 기억까지 남아 있으니 바다를 그토록 많이 좋아했던 게 아닐까. 더구나 좋아하는 곳인 만큼 혼자서 또는 누군가와 새로운 추억을 만들게 되니 자연스럽게 바다를 향한 애정도 더욱 깊어진 것 같다.


신나게 맛조개를 잡았던 초등학생 시절에도, 푸른 바다를 가만히 보던 사춘기 시절에도, 오랜만에 본 바다가 반갑게 느껴졌던 성인 때도 바닷가에 있으면 늘 편안했다. 따뜻했고, 머릿속이 시원해졌다. 탁한 공기가 나가고 상쾌한 공기가 들어오는 것처럼, 마음이 조금 환기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도 바다를 보면 그런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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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좋은 감정이 남은 장소가 바다 말고 또 있을 것이다. 가족과 함께 나들이나 여행했던 적이 종종 있었으니 찾아보면 그런 장소가 많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나와 함께 찾아보자. 한 곳이든, 여러 곳이든 좋은 감정이 남아있는 장소가 있다는 건 축복이다. 만약 하나도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만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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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득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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