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야, 저 사람들 싸운다 [사람]

서울 지하철에 관한 고찰.
글 입력 2023.02.06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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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속 까만 머리들


 

지하철을 탈 때, 정확히 말하면 출근길에 역사 내부를 잠에 덜 깬 얼굴로 발발 돌아다니거나 급하게 마침 오는 열차를 잡아탈 때, 신도림역이나 구로디지털단지, 혹은 합정역에 정차할 때마다 보면 놀라게 되는 광경이 있다. 그건 바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검은 머리통이다.

 

특히 계단 같은 걸 내려갈 때 더욱 그렇다. 어디서 다 나왔는지 모를 사람들의 머리가 바글바글. 너무 새까매서 가끔은 조금 징그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정말 파도와 같이 우르르 움직이는 모습을 보다 보면 가끔 이러다가 사고가 나겠구나, 싶을 때도 있다. 매 순간이 위태위태하다.

 

 

 

러시아워의 지옥. 


 

이렇게 아침 시간에 사람이 많은 건 아침 시간이 출근 시간이기 때문이다.

 

출근 시간은 8시, 9시, 늦어봐야 10시까지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당연히 7시, 8시, 9시마다 작은 열차에 몸을 욱여넣는다. 너무 답답해서 도저히 내 몸을 여기에 밀어 넣을 수 없다면? 지각하는 거다. 그리고 '지하철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따위의 변명은 지각 사유로 통하지 않는다.

 

출근은 내 밥벌이와 연관되는 활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출근 시간에 지하철을 타는 것에 굉장히 예민할 것이다. 매일매일 같은 시간에 오는 같은 열차를 같은 방식으로 같은 타이밍에 타는 행위. 정해진 시간에 반드시 일터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

 

간혹 변화가 일어났을 때, 예를 들어 집중 호우가 계속되어 홍수가 나거나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차가 막히고 경의중앙선이 지연될 때, 지하철에 방해가 되는 승객이 탑승해 열차 운행이 지연되는 경우가 문제다. 매 순간 반복되는 일상에 지겨움을 느끼면서도 조금이라도 예상 밖을 벗어나는 변화가 생기면 신경에 거슬리고 짜증이 나게 되는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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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복수, 째려보기


 

이렇게 변화를 일으키는 요소에 대한 최고의 복수는 바로 '째려보기'이다. 말 그대로 원망이 가득 섞인 표정을 지으며 그런 대상을 흘깃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다. 내 차례에 새치기해서 나보다 먼저 열차에 탑승한 여자, 자리가 되지 않는데 억지로 사람들을 밀치며 탑승하는 남자, 내가 먼저 앞에 서 있었는데 얄밉게 방금 내린 사람 자리를 쏙 차지해버린 할머니를 온 힘을 다해 째려보는 것이다.

 

째려보기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런데 더 큰 일에는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일에 휘말리게 되면 나는 지각을 하게 될 거다. 그러면 더 귀찮아지기만 한다.

 

이런 비겁한 응징은 일대일 관계에서는 상대방이 알아차릴 듯 말 듯 교묘히 일어나지만, 그 상황에 가세하는 사람의 수가 많아질수록, 그리고 '내 편'이 많아질수록, 아니면 상대방이 혼자일 때 더욱 노골적으로 변한다. 나는 이에 대한 예시가 될 만한 상황을 이번 주말(평일은 아니었지만 '토요일 밤의 열기'를 즐기고 집에 돌아가는 사람이 많은 저녁 지하철이었다) 2호선 지하철에서 목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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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저 사람들 싸운다


 

'지하철 이벤트'라는 말이 있다. 서울 지하철에 워낙 사람이 많이 타다 보니 별일이 다 일어난다는 걸 비꼬아 '이벤트'라고 칭하는 것이다. 그런 사건에는 판매원, 전도사, 구걸하는 사람, 취객, 춤추는 사람 등이 있다. 이벤트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사람들은 지루한 일상 속 변화를 일으키는 사건을 은근히 반긴다.

 

지난 주말 2호선에선 이런 일이 있었다. 모두 적당히 취기가 오르고 강남역에서 꾸역꾸역 열차에 탑승한 상태에서 두 장년 남성 간에 싸움이 붙은 거다. 처음엔 가볍게 밀친 것 때문에 붙은 시비가 점점 언성이 높아지더니 곧 온 열차 사람들이 지켜보는 다툼이 되었다.

 

사람들은 말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두 사람이 서로의 부모님의 안부를 묻고 나이를 앞세우며 자극적으로 싸우는 모습을 구경할 뿐이었다. 어떤 할아버지들은 내 바로 뒤에서 마치 싸우는 사람들 들으라는 듯 '저러니까 기성세대가 욕을 먹는 거다'라는 둥, '너(일행)도 내 어깨에 손 올리면 우리도 싸워 볼까?' 라는 둥 조롱하며 이야기하기도 했다.

 

내가 가장 얄밉게 생각했던 건 그 상황을 뒤에서 조용히 찍고 있는 젊은 사람이었다. 말리지 않는 건 이해한다. 되려 싸움에 휘말려 곤란해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잔잔히 기분 좋게 취해 딱 좋은 상황에 피곤하게 일을 키울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렇지만 남이 추잡하게 싸우는 모습을 오락거리로 여기며 촬영하는 행위는 도를 넘어섰다.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싸우는 두 사람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눈빛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싸움이 성가신 남의 일이나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지하철. 너무 화가 났지만, 감정이 격앙된 두 사람에게 말을 걸 용기가 없었던 나는 방배역에 '너 두고 보자' 하며 내린 두 사람을 확인해봐 달라는 민원 문자를 넣고 집으로 갔다.

 

다행히 큰일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답장이 왔다.

 

 

[류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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