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안녕, 우리 할머니

글 입력 2023.02.03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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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땜

 

슬픈 일이 일어나면,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이건 다 내가 잘되려고 일어나는 일이야. 
다음 달에 더 좋은 일이 생길 건가 봐. 
내년에 얼마나 행복하려고 지금 이럴까. 
괜찮아!
 
 
연말엔 코로나에 걸려 오랜만에 예매한 공연과 휴가도 못 즐기고 집에서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맞이했다. 그럴수록 2023년은 더욱 화사할 거라며 기대감을 일부러 더 높였다. 연말에 골치 아픈, 기분이 좋지 않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 크게 액땜했다고 생각했기에 잘 지내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새해는 진심으로 행복하게 시작했다. 1월부터 새로운 운동으로 수영을 시작했고 취미로 가죽공예학원을 다니면서 글자 그대로 '행복'을 느꼈다. 에너지가 뿜뿜, 좋은 기운이 넘쳐흘렀다. 다이어리에도 이렇게 행복한 건 몇 년 만에 처음이라고 적을 정도로, 산뜻한 기분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올해는 눈물이 나지 않을 줄 알았다.

1월의 어느 금요일, 비가 내렸다. 회사의 어느 분께서 무슨 안 좋은 일이 일어나길래 겨울에 웬 비가 내리냐고 투덜거리셨다. 나는 오히려 좋은 징조일 거라고 대답했다. 근 몇 년 중 손에 꼽는 기분 좋은 날들의 연속이었으니까 말이다.
 
 
 
인사


그 주의 일요일, 외할머니가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이전까지 흘리지 않은 눈물은 쓸 데가 따로 있었나 보다. 올해는 승승장구할 거라 믿었는데 난 항상 중요한 시기를 앞두고 이별을 맞는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큰아버지, 친할머니, 그리고 외할머니까지 내가 겪은 가까운 사람과의 이별은 모두 내 인생에서 중요한 관문과 결정이 내려지기 직전에 일어났다. 다 나에게 잘되라고 운을 넘기고 가신 걸까? 그러기엔 가치를 제대로 느끼지 않았고 감사함을 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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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고 처음 지낸 장례였다. 그래도 그 공간에서 많은 가족과 함께 일부러 하찮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더 웃기도 했고, 떠나가는 과정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런 따듯함으로 할머니를 보내줄 수 있어 잘 가셨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너무 많이 아프지 않게, 오래도록 아픔 속에 있지 않고 가셔서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곳에선 더욱 편하게, 건강하게, 마음껏 뛰어다니실 거다.
 
작별 인사를 제대로 못 했어. 할머니, 그래도 마지막 만남이 취업해서 자랑스러운 손녀딸이 사준 아귀찜 맛있게 드신 날이라 다행이야.
 
 
 
우연

 

야간 수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자 오피스텔 1층에 있는 빵 가게에서 빵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무심코 지나친 오피스텔 후문에서 서성거리고 계셨던 할머니가 빵 가게 문을 열어달라며 나에게 다가오셨다. 이곳은 야간 무인 판매점으로 입장과 구매를 위해선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약간의 인증 절차가 필요했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머리와 약 한 보따리를 들고 계신 할머니셨다.

방법을 알려드리고 챙겨드리다 보니 할머니의 이야기도 자연스레 듣게 되었다.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다가 들어오셔서 혼자 살고 계신, 같은 오피스텔 주민이셨다. 병원에 가는 길에 몇 번을 넘어져 피멍이 드신 턱과 얼굴을 바라보니 나도 마음이 절로 아팠다. 자신과 대화를 나눌 사람이 필요하셨다는 듯,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하시는 할머니를 두고 먼저 떠날 수는 없었기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엘리베이터에서 헤어졌다.

그리고 며칠 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우연히 마주친 오피스텔 할머니가 당연히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 할머니에게 도움 필요하시면 전화 달라고 연락처 하나 드릴 걸 후회스러웠다. 세탁기가 고장 나 세탁 서비스를 찾으셨지만 나도 잘 모르기도 했고, 피곤한 11시였기에 별 찾아드릴 노력도 하지 않은 나의 행동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아 오피스텔 1층에 있을 때면 유심히 비슷한 할머니가 있으신지 둘러보지만, 그 이후로 만나지 못했다.
 
우연히 또 만나게 된다면, 내가 먼저 인사하고 세탁기는 고치셨는지 물어볼 것이다.
 
 
 
해결


너무나 많은 일들이 짧은 시간 사이 벌어져 어른으로서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 감을 못 잡고 있다. 버겁기도 하다. 할머니는 어떻게 이런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하는지 알고 계시겠지?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요즘엔 더욱더 내가 어른으로서 해야 할 일과 태도에 어려워하고 있다. 혼자 무언가 하는 걸 좋아하고, 대학생 때도 '다 같이'보다 '조용히 혼자'가 익숙했기에 회사의 방식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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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 어려움과 불안한 혼란스러움을 나의 방식대로 슬기롭게 해결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억척스럽게 자식들 키우고 태어나는 손주들 모두 받아주신 우리 외할머니를 떠올리면서 나도 따라 잘 살 것이다. 좋은 사람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으면서 보기 좋게 살고 있는 나의 모습을 할머니가 저 위에서 흐뭇하게 보실 수 있도록 열심히 살 것이다.

우리 외할머니, 내가 외할아버지 잘 챙기고 있어.
화사하고 예쁜 것들을 사랑하신 할머니를 기억하며 나도 아름답게 살아갈게.
근심 없이 잘 지내고 계셔요.
 
 
[이수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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