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 행복의 진실 [도서]

도서 <봄에 나는 없었다>
글 입력 2023.01.20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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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 읽으면 그때마다 새로운 감상을 안겨주는 책이 있다고들 한다. <어린 왕자>가 대표적으로 그렇고, 개개인에 따라 그런 책들이 몇 있을 것이다. 내게는 소설 <봄에 나는 없었다>가 그런 책이다.


 

"몇 날 며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자신에 대해서 뭘 알게 될까?"

 

p.25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 <봄에 나는 없었다>는 그가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출간한 심리 서스펜스 소설이다. 추리소설의 왕이라 불릴 만큼 추리 소설이 주력 장르였기에, 독자들의 혼란을 피하고자 부러 다른 필명을 썼다.


<봄에 나는 없었다>의 주인공 ‘조앤’은 그린 듯이 완벽한 가정을 꾸리며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여성이다. 직업은 변호사인 데다가 가정적인 남편, 그리고 바르게 장성한 세 자녀가 있으니 그는 남부러울  것이 없다. 어느 날, 조앤은 출가한 딸의 집에 다녀오던 길에 기차의 연착으로 사막에서 고립된다. 몇 날 며칠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조앤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기회를 가지고, 자신이 자기만의 착각과 만족에 빠져 가족의 불행은 외면해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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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나도 환상 속에 사는 건 아닐까?



이 책은 고등학교 도서관에서 처음 만났다. 벌써 몇 년 전의 일인데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이 그대로 떠오른다. 자신이 현명한 선택을 하고 있다 굳게 믿는 조앤은 남편과 자식들을 온전히 존중하지 않는다. 남편은 농부가 되고 싶었음에도 변호사가 되어 사무실에 갇혀 살고, 딸은 숨 막히는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한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위해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는 것은 현실에서도 흔한 일이다. 조앤만큼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지만 상대방의 의사 표현을 마음대로 재단하고 자신이 그들을 대신해서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고 믿는 사람도 꽤 많다. 사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통해 조앤을 만나고 나면 혹시 나도 또 다른 조앤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나도 주변인을 이용해서 나의 행복을 쌓아나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혐오에 가까울 정도로 강렬한 공포감이 든다.


하지만 그 공포와 함께 느껴지는 더 기이한 감정은, 조앤을 향한 부러움이다. 자신의 환상을 견고히 쌓기 위해 가족을 희생시키는 조앤이 끔찍하지만, 동시에 그의 철통같은 환상이 부럽기도 하다. 조앤은 자신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절대 알 수 없기 때문에 영원히 불행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영원히 행복할 것이다. 그의 가족들은 불행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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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2. 남편은 왜 조앤을 선택했을까?



두 번째로 읽은 것은 대학교 2학년 때다. 어느 날 갑자기 벼락 맞듯이 그 책이 떠올라 다시 읽고 싶었고, 찾아보니 근처 교보문고에 딱 한 권이 남아있었다. 띠지가 찌그러져 있어서 아쉬웠지만 당장 읽고 싶어 곧장 사 왔다. 예전에 즐겁게 읽은 책을 다시 보니 실망스러웠던 경험이 몇 번 있어 조금 걱정했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이 책은 다시 읽어도 재밌었다. 아니, 더 좋았다. 


이번에는 조앤보다도 그 주변인에 초점을 맞춰 읽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조앤의 주위에는 여러 사람이 있지만, 가장 가까운 것은 아무래도 가족이다. 자연스레 조앤의 가장 큰 희생양도 그 가족이다. 


다른 가족 구성원의 경우, 그러니까 조앤의 부모와 자녀는 조앤의 가족이 되길 선택한 것이 아니다. 불가피하게 조앤과 피를 나눈 가족이 되었기에 조앤의 이기적인 환상에 괴로워하면서도 그에 맞춰주기로 했을 그들의 모습이 얼핏 그려진다. 


그러나 남편 ‘로드니’는 그렇지 않다. 로드니는 유일하게 조앤의 가족이 되길 스스로 선택한 사람이다. 조앤과 어울리는 남편이라면 야망 넘치는 남자여야 할 것 같은데, 로드니는 워낙 유순한 성정인지라 조앤이 막무가내로 결혼을 밀어붙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면 꼭 그런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로드니는 조앤의 성정을 혐오함과 동시에 조앤을 불쌍히 여긴다. 그 동정이 조앤을 향한 로드니의 ‘어떠한’ 애정은 증명한다. 그게 평범한 부부간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조앤의 환상이 깨지지 않도록 노력한다. 그 환상이 없다면 조앤이 무너지리라는 걸 알기 때문일 테다. 

 

 

 

Q3. 의심의 문을 여는 열쇠를 나는 환영할 수 있을까?



작년에는 <봄에 나는 없었다>가 리커버되어 다시 출간되었다. 집에 똑같은 책이 있음에도 그저 새 단장을 한 책이 탐난다는 이유로 또 구매했다. 구매 직후 세 번째로 읽을 때는 딱히 새로운 감상이 생기지 않았다. 그저 처음 읽었을 때처럼 내가 품었을지 모르는 환상을 향한 경계심이 다시금 커졌을 뿐이다.


그리고 얼마 전, 네 번째로 읽어보니 아예 새로운 인물에게 시선이 갔다. 바로 조앤의 고등학교 동창 ‘블란치’. 예쁘고 당찬 친구였던 블란치는 지금 보니 그저 천박하고 어리석은 여자일 뿐이다. 조앤은 블란치를 동정하면서도 불쾌해한다. 


하지만 블란치는 조앤의 동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넌 친절한 사람이야. 하지만 함부로 동정하진 마. 난 지금까지 꽤 재미있게 살아왔으니까.”

 

p.21

 

 

그는 현명한 선택을 위해 남편의 꿈을 반대해야 한다는 조앤의 충고도 거부한다. 남편이 변호사가 되도록 이끌며 자신이 현명했다 자화자찬하는 조앤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보인다.


 

조앤은 둘을 위해 한 사람이라도 현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블란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자신은 한 사람을 위해서도 현명했던 적이 없다고!

 

p.15

 


블란치는 소설의 초반에 아주 잠깐 등장할 뿐이지만, 조앤이 의심의 문을 열 수 있게 열쇠를 제공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조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과는 정반대로 살아온, 일종의 ‘루저’인 블란치가 그의 행복을 깨부수는 시발점이란 점이 아이러니하다. 


블란치는 조앤보다 훨씬 늙어 보이고, 실패로 끝나는 결혼 생활을 반복한 멍청한 여자지만, 최소한 그는 진실한 삶을 살았다. 그 진실함이 조앤에게 환상에 균열을 만든다. 쾌활하고 그만큼 신랄한 블란치 덕분에 조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볼 기회를 얻는다. 


기차의 연착 탓에 불가피한 사색의 시간을 맞이하기 직전에 우연히 맞닥뜨린 사람이 블란치라는 사실이 조앤에게는 행운일까, 불행일까? 나는 나의 환상을 깨뜨릴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걸 기꺼워할까, 아니면 두려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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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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