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각자의 ‘원청’을 찾아 떠난 사람들 - 원청

글 입력 2023.01.17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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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쪽이 넘어가는 책을 읽고 나서는 어떻게 감상을 쓰면 좋을지 늘 어려워진다. 특히 소설이 한 사람의 일생을 다루고 있을 경우 그 사람이 실제로 언젠가 세상 어딘가에서 살았을 것만 같아서, 그 삶을 두고 제3자인 내가 왈가왈부해도 되는지 고민에 빠진다.

 

 

원청_띠지 표1.jpg

 

 

‘위화의 8년 만의 신작’이라는 큼직한 타이틀을 달고 도착한 『원청』도 내게는 그런 책이었다. 한 손으로 들기 불편할 정도의 두께와 ‘원청’이라는 두 글자가 주는 압박감이 커서 책을 펼치기까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한 사람의 삶의 무게가 버겁게 다가왔다. 다행히 막상 책을 읽기 시작하니 매끄러운 번역과 빠른 내용 전개 덕에 금세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렇게 약 1주일 동안 19세기 중후반 중국에 살았던 린샹푸와 샤오메이의 일생을 만났다.

 

 

“여기가 원청입니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지명이라 천융량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는 시진입니다.” 

 

- 14쪽

 


*

『원청』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청』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번째 이야기에 해당하는 ‘원청’에서는 린샹푸의 삶을 다룬다. 북쪽 지방에서 내려온 그는 갓난아기를 안고 ‘원청’이라는 도시를 찾는 중이다. 딸아이를 두고 집을 떠난 아내 샤오메이의 고향이 그곳이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를 가도 원청을 아는 사람은 없다. 대신 린샹푸는 아내의 말투를 쓰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풍경도 아내가 알려준 것과 비슷한 남쪽 도시 ‘시진’에 정착한다. 샤오메이는 그를 두 번이나 버리고 도망간 여자이지만 린샹푸는 원망보다 딸의 엄마를 찾아줘야 한다는 마음이 더 클 정도로 성품이 온화하고 결단력도 있는 인물이다. 


커다란 보따리를 매고 젖동냥을 다니던 이방인 린샹푸는 시진에서 새롭게 뿌리를 내리며 이 도시의 부호이자 핵심 인물로 자리 잡는다. 자신처럼 북쪽에서 내려온 천융량 가족과 의형제처럼 지내며 함께 아이들을 키우고 목공소로도 유명해진다. 시간이 흘러 딸 린바이자를 시진 상인회 회장이자 실질적인 마을 지도자인 구이민의 첫째 아들과 약혼시키기까지 한다. 


그러나 시진에서 큰 탈 없이 흘러가던 린샹푸의 삶도 세상에 불어닥치는 변화와 혼란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청나라가 무너져내리고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던 19세기 중후반. 곳곳에서 토비들이 내려와 마을 사람들을 인질로 잡아가고, 북양군과 국민혁명군의 교전으로 시국이 혼란해진다. 


10년을 넘게 함께 해온 린샹푸와 그의 딸 린바이자, 천융량과 그의 가족은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뿔뿔이 흩어진다. 어려운 시절을 같이 헤쳐온 가족은 이제 헤어지고, 언제까지나 지혜롭고 결단력 있는 모습으로 자리를 지킬 것만 같던 구이민도 나이가 들고 정세가 불안해지자 예전의 패기 넘치던 모습을 잃어버린다. 풍요롭고 평화롭던 시진의 모습도 점차 황폐해진다. 


인질로 잡혀간 구이민을 구하러 갔다가 린샹푸는 허무한 죽음을 맞고, 고인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간다. 아내를 찾아 나서며 시작된 여정과 그 여정이 불러온 새로운 인연은 그렇게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매듭지어진다.

 

 

속옷에 주머니를 만들어 딸의 배냇머리와 눈썹을 넣고 가슴에 밀착시키자 샤오메이는 이제 딸이 언제나 함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느낌과 함께 린샹푸도 바로 옆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속으로 딸을 부를 때 자기도 모르게 린샹푸도 함께 불렀다. 그녀에게 딸과 린샹푸는 바람과 바람 소리처럼 분리할 수 없는 하나였다. 

 

- 567쪽

 

 

린샹푸의 이야기가 끝나면 나오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린샹푸를 떠났던 샤오메이의 이야기다. 린샹푸의 직감대로 처음에 샤오메이가 오빠라고 밝힌 남자 아창은 사실 본 남편이었다. 이들 부부는 우여곡절 끝에 린샹푸의 집까지 오게 되고, 그 과정에서 샤오메이는 린샹푸와 연을 맺게 된 것이다. 샤오메이는 다시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지만, 두고 온 딸아이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은 막을 수가 없었기에 괴로워한다. 


린샹푸의 이야기를 읽으며 샤오메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이 둘은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궁금했는데 샤오메이의 이야기는 린샹푸의 이야기보다 훨씬 더 일찍 끝난다. 린샹푸가 다시 시진에 돌아오고 유례없는 폭설이 내리던 겨울, 샤오메이는 성황각에서 기도를 올리다가 동사했기 때문이다. 한때 우연히 짧은 시간을 공유했던 두 사람은 서로 지척에 있었으나 연이 다한 탓에 살아서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재회는 20여 년 만에 이루어졌다. 두 사람 다 죽은 상태로. 

  

 

그 뜬구름 같은 원청은 샤오메이에게 이미 아픔이 되었다. 원청은 린샹푸와 딸의 끝없는 유랑과 방황을 의미했다. 

 

- 559쪽

 

 

『원청』을 아우르는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운명’일 것이다. 예상 가능한 범위 안에서 흘러갈 것 같던 사람들의 인생은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다양한 사건과 변화 앞에서 여러 갈래의 길로 흩어진다. 아무리 간절하게 바라도 운명이 허락하지 않은 것들은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위화는 이들을 운명 앞에서 마냥 무력한 존재로 그리지는 않는다. 소설 속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가지만 그것에 끌려다니지는 않는다. 시대 배경을 보고 이 소설의 끝이 좋지 않을 것만 같아 마음을 졸였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원청』에는 운명에 따라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삶을 거기에 그저 내맡기지만은 않았던 용감한 이들이 등장한다. 사랑을 좇아, 욕망을 좇아. 이들은 자신의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해도 주어진 삶을 헤쳐 나가고자 했다. 


린샹푸와 샤오메이도 마찬가지였다. 그 과정에서 원청이라는 도시는 두 사람을 움직이는 동력이었을 것이다. 린샹푸에게 원청은 아내가 있을 거라고 믿은 도시였고, 샤오메이에게 원청은 자신이 편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풍요로운 도시였다. 원청은 사실 시진이었지만 이들 두 사람에게 원청은 시진과 같은 의미가 아니었다. 꿈이었고, 목표였고 막연한 이상향이었다. 


운명과 운명이 교차하는 지점에는 늘 만남과 인연이 존재한다. 소설의 중심에 있는 것은 린샹푸와 샤오메이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짧은 만남으로 딸 린바이자가 탄생하고, 린샹푸가 샤오메이를 찾아 나서며 이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때로는 스쳐 지나는 사람인 줄 알았던 이가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 린샹푸를 시진에 처음 데려다준 뱃사공은 토비에게 살해당한 그를 다시 시진으로 데려온 사람이고, 시진에 온 지 얼마 안 된 린샹푸가 길을 잘못 들어 가게 된 사창가의 추이핑은 그의 유언 전달자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책을 다 읽었을 때 엄마가 소설이 해피엔딩이냐고 물어봤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린샹푸는 우연히 흘러들어온 낯선 도시 시진에서 20년 가까이 자리 잡고 살았지만 샤오메이는 기껏 돌아온 고향에서 폭설 속 기도를 하다가 동사한다. 린샹푸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이고 샤오메이는 그렇지 않은 걸까. 다시 생각해보면 시진에서 부유하고 명망 있는 사람이 된 린샹푸도 토비에게 허무하고 잔혹한 끝을 맞았으니 오히려 더러운 꼴을 보지 않고 죽은 샤오메이 쪽이 해피엔딩인 걸까. 


해피엔딩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애매해진다. 실제 우리 삶도 비슷하다.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없고 그저 엔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우연과 운명, 인연이 있을 뿐이다. 린샹푸와 샤오메이는 그들이 꿈꾸고 원하던 '원청'에는 끝내 도착하지 못했지만 그걸 찾는 과정에서 자기 몫의 행복을 만났다. 그걸로도 괜찮지 않았을까. 누군가의 평생을 1주일 만에 다 알아버린 묘한 기분을 느끼며, 현실 속 아직 결말을 알 수 없는 내 삶도 생각해본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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