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지우려 하지 않는 마음

지워지지 않기 위해 지우지 않는다
글 입력 2023.01.20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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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지나쳐 온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의 길을 기억할 수 있는가. 나는 주로 거주하는 동네의 길이 아니면 매일 달라지는, 지금이 아니면 평생 다시 안 올지도 모르는 길을 무심히 지나치는 편이다. 주로 핸드폰을 보려고, 지나가는 사람 얼굴을 마주하는 게 괜히 불편해서, 마스크를 벗은 내 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머리를 박고 길을 걷는다.


어느 날은 풍경이 보고 싶어 버스 창밖을 내다봤다. 빼곡히 늘어선 상가와 간판들. 건물 하나에 저 많은 가게가 다 들어간다니. 기왕 바라본 거 가게 이름도 살펴본다. xx치킨 옆에 00짬뽕 옆에 ㅁㅁ돼지 옆에 **축산 옆에 ☆☆수산 옆에 ##카페. 어느 동네를 가도 패턴은 아주 유사하다. 닭, 돼지, 소, 양, 해산물 등의 '음식' 전문점은 건너건너 줄줄이 운영하고 있거나 아예 특정 거리를 이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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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겐 행복한 고민을 안겨주는 말들이 사실 나에겐 행복하지도 썩 유쾌하지도 않게 보인다. 채식과 비거니즘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동물 음식점의 행렬이 불편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다만 그 공고한 구조가 빨리 바뀔 수 있도록 개인으로서 노력하고, 관련한 문화적·정치적 움직임을 옹호하고 다양하게 지지할 뿐이다.


하지만 어느 거리를 가든 찝찝함은 그림자처럼 달라붙고, 원하는 것을 먹고 원하지 않는 것을 먹지 않을 당연한 자유마저 조금은 빼앗겼다고 느낀다. 온전히 편안할 수 있는 공간이 몹시 적다고도 생각한다. 분명 누군가 직접적으로 핍박하고 강요한 적은 거의 없다. 

 

다만 주류와 다른 삶의 방식을 표현하고 동물을 이용하지 않는 음식점을 찾고 설득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은 말과는 달리 쉽지 않으며, 결국은 주체 없는 강압이 지속적으로 느껴진다. 나는 이것을 구조의 산물이라고 이해한다. 한 개인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미 몸과 사회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강력한 영향이다. 너무 당연해서 의심하고 벗어날 일이 없으면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은밀한 실체다.


그래서 갈피를 잡기 어렵다. 주체가 드러나지 않는 고통이 내 잘못은 아닌데 과연 누구에게 어떤 불평을 해야 적절한 것일까. 온전히 한 개인의 잘못은 아닌, 그러나 분명한 일말의 책임은 있는 이 복잡한 관계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를 배제하고 지우고 있다는 답답한 사실 속에서. 기필코 개선되어야 하지만 그 시작도, 끝도 가늠하기 어려운 막막함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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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확실한 것은 기존의 구조만을 고집하고 공고히 할수록 배제의 언어가 팽배해져 간다는 사실이다. 그 말은 곧 무언가가 이 세상에서 지워진다는 것이다. 누군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또렷한 실체가 말이다. 


육식의 언어가 지배적인 공간에서 동물을 가능한 한 착취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지워진다. 그런 사람이 지워지자 또 다른 '예민한' 사람도 지워진다. 동물도 지워진다. 동물이 지워지자 그들의 공간도 지워진다. 그들의 공간이 지워지자 여러 종이 지워진다. 결국 사람도 다시 지워진다. 


아이는 장사를 방해하는 민폐 덩어리라고만 생각할 때 '노키즈존'이 생겨나고 아이들은 지워진다. 아이와 동행해야 하는 보호자도 지워진다. 아이들이 배제되자 노인들도 지워진다. 노인들이 지워지자 중장년층도 지워진다. 청년만이 남은 자리엔 학벌, 외모, 재력 등이 다시 촘촘하게 청년들을 지워내기 시작한다.


누군가를, 특히 애인을 이성친구, 여자친구, 남자친구라고만 부를 때 다양한 성적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지워진다. 다채로운 성 스펙트럼이 존중받지 못하고 여와 남이라는 협소한 성별 분류만 남을 때 다양성은 지워진다. 다양성이 지워지자 그 자리를 혐오가 차지한다. 혐오가 자리하자 서로를 받아들이고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은 지워진다.

 

서로가 서로를 돌본다는 기본 사실을 망각한 공간에서는 어떤 것이든 금세 지워질 준비가 되어있다. 지우는 것엔 연속성이 있어서 어느 시점에 끊길 수 없다. 무한히 되풀이될 뿐이다. 이 현상의 원인은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니다. 사소한 대화와 그를 뱉어내는 생각의 과정이다. 나는 그 시작에 거대한 구조의 산물이 자리하고 있음을 믿는다. 때문에 나에게도, 다른 누군가에게도 계속해서 외치고 싶다. 조금은 억울할지라도 그곳에서 살아온 우리는 이러한 모습에 기본적인 책임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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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다 긴장하지 않고 편하게, 지워지지 않고 각자의 삶을 살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자기 말에서 시작해보자. 그리곤 우리 주변을 이루고 있는 지극히 사소하고 평범한 말들로 나아가보자. 종국엔 안녕이라는 말조차 낯설어질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은 다양하고, 그 다양성을 바라본다고 당신의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 더 풍부해질 뿐이다. 

 

이것은 자신의 세상을 끊임없이 부수고 다시 쌓아올리는 귀찮고 어려운 혁명적인 일이지만, 그때 같이 부술 수 있는 것은 지금 당신도 느끼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긴장과 불편함일 것이다. 그렇게 넓어지는 공간은 누군가를 지우지 않더라도 존재할 수 있는 넉넉함을 갖췄을 것이다.

 

나에게 재밌고 행복하고 편안한 말이 누군가를 벼랑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흔한 문구를 처음 들은 듯 낯설게 기억해보자. 만약 그런 말을 목격한다면 단칼에 끊어내지 않고 정확히 자기 생각을 알려주자. 그리고 그 말을 정확히 들어보자. 우리는 서로 다른 다름을 건설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을 테니까. 조금 더 여유롭게, 오래도록 다른 것들을 지켜보자.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이 있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적절히 꺾이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지우려 하지 않는 마음, 그럼으로써 지워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나는 지워지기 싫다. 누군가를 지우기도 싫다. 그래서 쌓아온 내 세상을 오늘도 부수고 다시 쌓아보려 한다. 

 

기꺼이, 힘겹게, 즐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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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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