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력서를 쓰다가 [사람]

글 입력 2023.01.15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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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서를 쓰다가 문득 생각했다.

 

동물은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 한다. 내가 한 기업에 내 최고의 문장과 최고의 업적들을 꾹꾹 눌러 쓴 이력서를 가지고 가서 죽음을 맞이하며 탈락할 때, 그때 내 이름에 남을 그 ‘이력서’는 내 죽음을 명예롭게 대변해 줄까? 그들의 질서와 금기에 맞추어, 최고의 것들만 최대한 간결하게 쓴 내 이력서는 후에 나를 나로 기억할 수 있는 장치가 되어줄까? 이러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업에 맞설 때 내가 가장 믿을 구석은 이력서 한 장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이력서 쓰기>라는 시에도 이런 의문이 투영되어 있다.


 

간결함과 적절한 경력 발췌는 이력서의 의무조항.

풍경은 주소로 대체하고,

불완전한 기억은 확고한 날짜로 탈바꿈시킬 것.


결혼으로 맺어진 경우만 사랑으로 취급하고

그 안에서 태어난 아이만 자식으로 인정할 것.


네가 누구를 아느냐보다, 누가 널 아느냐가 더 중요한 법.

여행은 오직 해외여행만 기재할 것.

가입 동기는 생략하고, 무슨 협회 소속인지만 적을 것.

업적은 제외하고, 표창 받은 사실만 기록할 것.


 

나의 경험과 풍경은 주소로 대체하고, 불완전한 기억은 의미 없는 정확한 날짜로 지정할 것. 제도적으로 성립된 경우만 사랑을 증명해줄 수 있고 내가 바라보는 시선보다 남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 중요한 것. 내 삶의 방향보다는 서 있는 길의 주소가 더 중요한 것.

 

 

가치보다는 가격이,

내용보다는 제목이 더 중요하고,

네가 행세하는 '너'라는 사람이

어디로 가느냐보다는

네 신발의 치수가 더 중요한 법이야.

게다가 한쪽 귀가 잘 보이도록 찍은 선명한 증명사진은 필수.

그 귀에 무슨 소리가 들리느냐보다는

귀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가 더 중요하지.

 

 

증명사진을 찍을 때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보다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 이력서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력서가 어떻게 나를 대표하나 생각이 들고, 나아가면 이력서가 뭐가 중요할까 싶다.

 

그 이력서는 결국 그 기업이 원하는 조건에 내가 맞춘 것들만 기입할 수 있는 종이일 뿐,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내가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이 내 실재 자체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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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의 L 도식에 따르면 우리의 관계 속에는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가 있다. 상상계는 거울 단계로, 통합과 안정을 추구하고 ‘나’와 ‘나’만 존재한다. 보통 0세에서 2세 사이에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거울 단계’를 의미한다. 시간이 들고 나이가 들면 ‘나’에게도 ‘타자’가 생긴다. 상징계에서 나는 상상을 통해 타자의 이미지를 상징화하고 그에 따라 타자를 이해한다. 그러나 이는 사회의 금기, 교육, 종교, 상식과 같은 질서 아래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사실 내가 믿는 타자는 내 상상 속 허구의 타자이다.

 

이는 불일치로 귀결되며 그 불일치를 경험하게 되는 것, 즉 상징계에 뚫린 구멍이 실재계이다. 내가 상징화하여 이해하는 세계는 본질이 흐려진 채로 점선으로 진정한 ‘나’인 주체를 향해 가는데, 모든 ‘나’와 ‘타자’간의 관계에는 불일치가 존재하므로 이는 환상으로만 존재한다. 결국, 모든 ‘나’와의 모든 관계에서 불일치가 생길 수밖에 없고, 이는 타인과의 접촉을 피할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인 ‘나’의 주체를 의미하는 것과도 같아서 어떤 경우든 불일치의 대상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기업이 원하는 것을 더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빼서 불일치가 생긴 이력서가 결국에는 가장 나를 잘 알릴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내 이야기를 해도 내가 내 삶을 살지 않은 이상 나를 다 전달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너와 나의 공통된 필요, 기업과 나의 공통된 목표를 실현할 방법으로 ‘이력서’가 필요하다.

 

어쩌면 나도 그 이력서를 들고 가면서 상상한다. 이 이면의 행간에 있는 따뜻한 나를 읽어주길. 다른 사람들이 여러 개의 대외활동을 할 때 동아리 활동만 한 나를 친구들과 깊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쾌한 사람으로 봐주길, 1학년 때 한 봉사활동이 전부인 나를 이력서에 쓰기 위한 봉사가 아닌 진짜 봉사심으로 자율 봉사 활동을 한 따뜻한 사람으로 봐주길.

 

그러나 그것도 기업에 대한 나의 상상일 뿐이다. 서로의 상상계는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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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에서 맥베스는 야망을 좇다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맥베스는 허상의 예언을 믿고 심지어는 혼령의 허상까지 보지만, 읽고 나면 그것이 과연 진정 허상이었을까 라는 의문도 생긴다.

 

자기 삶에서 허상을 믿고, 그 허상이 자신의 삶에 투영되어 죽을 때까지 그것에 신념을 지켰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인생에서 진정한 허상이었다고만은 볼 수 없다. 그 믿음이 그를 살게 할 수도 있으니까. 실제로 맥베스는 그 예언 이후 부인과 함께 자신의 야망을 실현한다. 절대 이런 짓을 할 수 없을 것 같던 천성이 착한 사람이 자신의 왕좌를 위해서는 악행을 서슴지 않는 인간으로 바뀐다.

 

현대 사회, 내 이력서에서는 어떨까? 기업에서 원하는 ‘나’에 맞추어 나를 믿게끔 이력서를 쓴다. 그렇게 운 좋게 회사에 입사하면 그 회사 안에서는 그 ‘나’가 내가 된다. 입사하고 싶었던 나는 그 모습이 내가 원했던 상상이고, 곧 그것이 나의 실재가 된다.

 

그런데 또 한 번 더 생각하면, 그게 진짜 나의 실재가 맞을까. 기업과 나 사이에 존재했던 불일치들을 제거한 나도 실재라고 할 수 있을까. 이력서를 쓰고, 기업에 들어가서 취직을 하고, 내 생계의 수단이 되면 그게 내 인생의 반절은 넘을 텐데.

 

내 인생의 반절이 내가 진짜 원하는 모습이 맞는지 또 고민할 생각을 하니, 어차피 탈락하면 가차 없이 부검 될 이력서 앞에서 나는 한층 더 멍청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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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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