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기억해볼만한 장면

글 입력 2023.01.04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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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내가 쓴 글들을 몇 편 읽어보다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우울한 글밖에 못 쓸까하고. 내 글은 은근 색채가 짙은 편인 것 같다. 대학시절 수업에서 익명으로 글을 바꿔 읽고 피드백을 할 때도 내 글은 사람들이 유독 쉽게 알아차렸다. 몇 문장 읽지 않아도 이건 김인규가 쓴 글이라고, 글의 종류를 불문하고 그랬다. 물론 내 글에 묻어나오는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해주는 사람도 있고 나 역시 싫어하지 않지만, 가끔은 나도 산뜻한 글을 쓰고 싶다.


글은 분명 나의 사고와 삶을 반영할 텐데 밝은 쪽보다는 그늘진 쪽을 자꾸만 바라보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되고 싶은 모습이 있는데 잘 안될 때는 ‘척’ 하다보면 그렇게 살게 된다는데 그런 척을 한 번 해볼까. 밝고 산뜻한 그런 척. 그런데 정말 근거없이 마냥 척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내 삶에서 좋았던 장면을 찾아보자. 신나고 행복했던 장면, 혹은 내가 좋아하는 장면, 나를 안심시켜줬던 장면들을 찾아보자. 왠지 내가 가고싶었던 곳에 도착할 것 같지는 않지만, 가고싶었는지도 몰랐던 어딘가에 도착할 것만 같다.


아래의 글들은 전부 내 메모장 한구석에서 찾았다.


 

 

[장면 1] 




아직은 햇볕이 어슴푸레 들이치는 어느 저녁이었다. 

산책을 나갔다가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났다. 


놀란 기색이었지만 그렇게 멀리 도망가지는 않았다. 

작은 풀밭에서 우리는 오래 눈을 맞췄다. 

졸린 듯 서로를 향해 때로는 깜빡였다. 


그때는 서로의 눈을 하염없이 바라는 것만으로 충분했지만

곧 그렇지 않을걸 알고 있었다. 


머지않아 우리는 배가 고파질수도 있고, 

그 자세가 불편해질 수도 있고, 

해야 할 일이나 다른 사람이 떠오를 수도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분명 그럴 터였다. 

그러니까 그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래도, 순간이었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이 글을 쓴 날이 그런 날이었다. 몇년 전인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잊을 수 없는 날 중 하나이다. 화단에서 마주친 것은 하얀색과 노란줄무늬가 뒤섞인 작은 고양이였는데 처음 보는 녀석이었다. 우리 아파트의 고양이들은 손을 잘 타지 않는 편이라 구석에 숨어 살거나 사람을 만나도 경계하고 도망가기 일수였는데, 이상하게 그 날 그 녀석은 그러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우리는 멈춰섰고, 서로에게 안전할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이 충분하게 느껴졌다.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슬퍼졌다. 당연하게도 이 순간은 영원하지 않을테니까. 요즘 나도 그런 생각을 한다. 순간순간들은 생각보다 쉽게 나를 지나쳐가고 그러니 할 수 있을 때 더 많이 사랑하자고, 그 순간을 누리자고.

 

아니나 다를까, 잠시 눈을 돌린 사이에 고양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장면 2] 


 

 

오늘 아침 버스를 타면서 내가 그동안 굉장히 보고 싶었던, 

그러나 찾아보기 어렵던 광경을 봤다. 


정류장에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분이 버스를 이용하고자 기다리고 있었고, 

마침 우리가 탈 버스는 저상버스였다.


기사님이 휠체어가 지나갈 수 없는 가드레일 쪽에 정차하자 우리는 당황했지만 

곧이어 놀라운 주차솜씨로 버스를 보도블럭 가까이 붙여 

휠체어가 문제없이 오를 수 있게 해주셨다


'기사님 저 좀 태워주세요' 라며 같이 당황하시던 그 분은 곧이어 

'이제 한국 문화가 많이 바뀌었어요'라고 말하며 씩 웃어주셨다 


이 두 문장과의 간격이 우리가 걸어온 길이고 그토록 뛰어넘고 싶었던 간극이다. 

아직 우리는 첫 번째 문장에서 두 번째 문장까지 완전히 건너오지는 못했다.

이 당연한 풍경이 거창한 기쁨으로 느껴지는걸 보면 아직도 가야할 길이 남았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오늘은 좀 행복하다.

그리고 또 다른 문장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장애에 대한 나의 관심은 꽤 각별한 편이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남 일 같지가 않아서다. 어릴때부터 꽤 험한 운동을 좋아했고 최근에도 서너달은 제대로 못걸을 정도로 다리를 크게 다치기도 했는데 그럴때마다 장애가 나와 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러다 어느 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그런데 장애인들을 내가 최근에 본 적이 있었나? 하고. 정부에서 발표하는 통계를 찾아보면 장애인의 수는 생각보다 적지 않은데 왜 우리는 장애인을 보기가 어려웠을까. 지금 우리 사회는 장애인들이 살아가기에 어떤 환경인가. 장애인들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있는가.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은 무엇이고 나는 어떤 일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여전히 고민중이다.

 

최근에는 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와 관련해서 뉴스에서도 보고 근처를 지날 일이 생기면 불편을 겪기도 하는데 좀 더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장애인들과 마주할 기회가 많아지면 좋겠다. 그런 식으로라도 장애인들이 목소리를 내고 우리가 함께 고민해나가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갈등의 형태가 아니라 긍정적이고 친숙한 모습으로 더 자주 만났으면 좋겠다. 장애인들을 더 많이 알고, 친분도 쌓고, 장애인들이 겪는 불편과 아픔을 근거리에서 보면서 나의 것으로 느끼고 우리 사회의 몫으로 느끼면 분명 더 좋은 사회가 되어갈 것이다.

 

가장 약자들을 위한 사회는 곧 모두를 위한 사회라는 말과 같은 것이 될 수 있다.

 

 

 

[장면 3] 




오래오래 그리던 얼굴 


짧은 시간의 눈맞춤 


그제야 날 알아봤을까


“안녕” 


짧은 순간의 손인사만으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보고싶은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은 부러운 일이다. 보고싶지만 이제는 볼 수 없는 얼굴도 여럿 있다.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멀어진 누군가를 우연히 보게 됐던 날 이 글을 썼다. 아주 짧은 인사였고 그 후로는 아직도 그 사람을 보지 못했지만 그리워하고 앓던 마음이 조금은 달래진 기분이 들었다.  이해하지 못했던, 그래서 억울하기까지 했던 못다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은 기분도 들었다.

 

언제가 마지막일지 모르니 할 수 있을때 더 많이 사랑하자는 다짐을 하며 짧은 인사를 지나쳐왔다.

 

 

 

[장면 4] 


 

 

아무 말이나 아무렇게나 말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건 반가운 일이었다. 

어떤 말이든 그들에게는 알 수 없는 말일 테니까. 그게 좋았다. 

외국에서 한글을 끄적거리는 일은 안심되는 일이다. 


 

외국에 나가있을 때 이 문장을 썼다. 나는 종종 스타벅스에 앉아 인종도 언어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모국어를 가지고 글을 썼다. 내가 갔었던 뉴욕은 정말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사람들이 섞여 살아가는 도시였다. 그래서 그 사이에서는 나의 다름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한국에서는 모난 부분처럼 느껴졌던 어떤 것들이 그곳에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나의 모국어를 가지고 놀면서 나는 안정감을 느꼈다. 거기서는 내가 어떤 내용을 써도, 설사 그 내용을 지나가던 누군가 지켜본다해도 알아들을 턱이 없었다. 그래서 거기서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한국에서의 나는 그대로 두고 새로운 내가 될 수도 있었고, 원하면 그곳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한국에서의 나를 마음대로 꺼내올 수도 있었다. 그게 좋았다.

 

 

 

[장면 5] 




어릴 때 엄마는 수박씨를 삼키면 뱃속에서 수박이 자라난다고 했다. 

수박씨는 내 위장에 자리를 잡고 내 영양분을 흡수하며 다시 수박으로 자라나고, 

어느 날 내 배는 뻥하고 터져버려, 수박만 남을 거라고.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은 뒤에도 수박씨 먹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그리운 어린 날의 추억이다. 지금은 믿지 않을 시시하고 허무맹랑한 소리를 쉽게 믿고 속아버리던 시절이었다. 나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여전히 산타가 그립다. 하지만 이제는 산타를 기다리기보다는 누군가의 산타가 되어주는 일이 더 자연스러워졌다. 내 양말에 선물을 넣어주는 사람은 이제 없겠지만 이런 이야기를 기억해내면 마음속의 양말이 채워지는 기분이다.

 

이야기를 듣고도 수박씨를 계속 삼켰던걸 보면 나는 제법 말을 안 듣는 아들이었던 것 같다. 배에서 수박씨가 자란다는게 무서우면서도 뭔가 신기하게 느껴져 은근한 기대를 하기도 했었다. 물론 배에서 수박이 자라나는 일은 없었지만 가족들이 심어준 추억의 씨앗은 차근히 자라 오늘의 나에게 좋은 선물로 되돌아왔다.


 


[장면 6] 




좋은 영화를 보면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의 방 안 책상 위에 놓여진 노트북. 

그리고 노트북을 열면 바탕화면 구석에 자리한 한글 문서. 

더블클릭하면 열리는 새하얀 화면 위 검은 활자.

그 글자가 뛰어 노는 장면을 바라보는 기분은 어떤 걸까. 


 

어떤 영화를 보고 쓴 글이었더라.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방안에서의 누군가의 시간이 결과물로 피어 사람들 앞에 박수를 받는 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질투와 희망섞인 밤에 무대 뒷편을, 누군가의 고독한 방안을 떠올렸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도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는 더 좋은 날이 있을거다. 지금 우리가 보고 감탄했던 누군가의 결과도 결국은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작고 초라한 그 자리에서부터 시작했을 테니까.

 

나 역시 감회가 새롭다. 메모장에나 남아있을 생각과 글들이 화면 너머의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어서,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한 마음뿐이다. 각자의 좋았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앞으로도 좋은 일만 더 많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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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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