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무가족 상태

나레이션
글 입력 2022.12.27 00:52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무가족 상태: 나레이션>

 

가족_small_5.png

 

우리 가족은 다섯 명이고, 난 셋 중 둘째이다. 끼인 둘째여서 그런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4인이나 외동 가족을 보며 부러움과 소외감을 느꼇고, 우리 가족에서 한 명이 빠져야 한다면 그것은 내가 될거라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 난 아동미술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예전엔 회사에 소속돼 프리랜서로 일했는데, 소위 문제 아이들의 대응 방법으로 <우리 아이가 달라 졌어요>를 교육자료로 활용하기도 했다. 일은 비록 생업으로 시작했지만, 오래 수업하며 아이, 부모들과 친해졌고 그런 관계는 나로 하여금 이전엔 생각지 않았던 '가정'을 갖고 싶게 만들었다.


비스무리한 시기, <금쪽같은 내새끼> 방영도 시작되었다. 코로나19가 가정 문제를 증폭시켰기 때문일까. 


가정을 갖고는 싶었으나 당시 내겐 난 정상 가정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강한 좌절감과 확신이 있었다. 전문가들이 방송에 나와 지적하는 문제행동, 병명은 나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정의했다. 금쪽이가 정의하는 나는 완벽하지 않은 부모의 피해자였고, 희생자이고 동시에 가해자이자 환자였다.


해당 프로그램은 굉장히 큰 성공을 거두었었고, 사람들은 전문가 말에 강하게 동조했다. 나또한 휘둘렸다.


전문가들은 부모 역할을 중요성을 강조했다. 내가 커온 환경이 내 가정을 만드는 데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내 원가족은 완벽하지 않았다. 이런 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하는 것이었다.


물론 방송용 대본, 편집이 있을 것임을 알면서도 방송 속 전문가들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듯 보였다.


또한 그들은 내 약점과 결핍에 대한 변명이자 위로가 되어주어 곧 그들을 맹신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곧 내게 완벽하지 않은 원가족을 준 부모에 대한 원망과 자기 연민으로까지 연결되었다.


우리 가족은 정상일까?

 

모두가 정상이라고 말한다. 내 생각에도 정상이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이 말하는 정상에는 부족했다. 아니, 그들을 말한 정상에 가깝게 사는 사람을 주변에서 본 적이 없는 듯 하다.


사회적으로 평범한 삶에 대한 욕망, 행복하지만 가끔은 방문객으로 느껴졌던 원가족과의 관계, 아동미술에서의 경험, 그리고 내 가정을 가져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역으로 사회적 정상 가정의 틀을 주관적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번 그 문을 열자 가족은 모든것이 될 수 있었다. 그러자 가족은 장소나 감정, 모순되는 느낌이나 색깔, 동물, 식물 사물이 되기도 했다. 너무 사적이라도, 주관성 모순 유동성을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엔 사회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연예인 사유리는 정자은행을 통해 아기를 갖고 출산하기도 했고, 성소수자의 목소리도 커졋으며, 페미니즘 운동 등으로 여성의 권리 또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사회가 급변하자 정책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가족에 대한 법 개혁안이 출범되었다. 그 내용엔 동거, 1인 가구, 비혼주의자등도 정상가정으로 인정한다는 목소리가 함께 있었다.


정책의 변화는 다양한 가족의 개성을 받아들이고, 유동적이며 주관적이고 자유로운 삶의 선택지를 늘리는데 중요한 한 걸음이 되었다.


그간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해 가족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다수에겐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별거 아니어 보여도 평범하고, 합법적이며, 건강하고, 정상적인 삶은 자유만큼이나 삶에 있어 더 큰 자유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는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2022년 10월이 되었다. 정권이 바뀌고, 여성가족부가 폐지되었다. 정권이 바뀌자마자 개혁법은 철회되고, 소모적 논쟁을 하지 안겠다며 현행법을 유지하겠다 밝혔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대중의 가족은 다시 불법, 비정상, 논쟁, 검열 대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난 사람들의 사회적 역할과, 정체성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넘나듬을 목격했다. 이 시기를 시작으로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곧 나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이 무엇인가로 진화했다.


우리 조부모님의 시대에선 이러한 정체성의 변화가 더욱 잘 와닿는다. 그들의 정체는 당신의 의사, 취향, 꿈과 상관이 있기도, 혹은 전혀 상관없이 변하기도 했다. 그들은 어린이였다가 소년병이 되기도 하고, 농부였다가 빨갱이가 되기도 했으며, 북한사람이었다가 남한 사람이 되기도했다.


정체란 시대와 정치 사회, 경제 시스템에 따라 바뀌어 한 사람의 운명을 달리했다. 개인에겐 어떤 변화도 없는데 그 주변의 변화에 따라 정체성은 개인의 문제가 되기도, 사회-경제-정치 시스템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저 사랑일 뿐인 동성애는 질병이 되기도, 기본권인 평등권을 보장해달라는 페미니즘은 지능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질병과 지능이 사회문제를 설명하는 방법이 되자 정치-사회-경제 시스템은 이 안건의 사회적 책임에서 교묘하게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인식은 그들을 갱생, 치료, 교육의 대상으로 만들어 정상사회에서의 완전한 타자, 외부인으로 만든다. 히틀러를 정신병자라고 취급하는 것이 4천만 독일인과 전 세계가  나치를 수수방관한 원인과 배경을 찾는 것 보다 훨씬 더 쉽고 빠른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런 시대 속 사람들은 사랑과 행복한 가정을 포기했고, 고통받았다. 가족복지, 정책의 중심이 되는 국가기관은 논란의 중심에 서 와해되기도 한다. 대체 한 사람의 정체란 무엇이 만들고, 어떤 방법으로 사회에 흡수되는걸까.


내가 보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분명 정상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여서 정상인 것이 내 시대에 들어선 정상이 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그러난 그들의 시대이기 때문에 난 그들을 이해한다.


내가 본 우리 가족은 그냥 평범하다. 그러나 정신과 전문의가 본다면 우린 문제덩어리일수도 있다. 법이 본 우리 가족은 정상이다. 모든 것이 빨리 변하는데, 가족의 정의는 더디다. 가족의 정상은 무엇이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우리 집의 가훈은 <있을 때 먹자>이고, 늘 클래식 음악이 들리며, 매주 일요일 아침은 버터와 토스트 냄새가 집안을 채운다. 그러나 이러한 가풍, 규칙은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어야 한다. 옆에서 줌 수업을 하는데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을 순 없고, 당장 배가 불러서 터질 거 같은데 음식이 남았다고 모든 음식을 헤치울 순 없다.


모든 집은 각자의 식대로 평범하다. 어떤 집은 김치에 해산물을 많이 넣고, 어떤 집은 넣지 않는 것처럼. 어떤 아이들은 부모님께 존댓말을 하지만 어떤 아이 들은 반말을 하기도 한다. 어떤 가족은 3대가 한 아파트에 살지만 어떤 집은 할머니 할아버지는 본 적도 없다. 어떤 집은 학교가 아닌 홈 스쿨링을 하기도 한다. 어떤 집은 아버지만 두 분일 것이고, 어떤 집은 한 부모 혹은 부모님 없이 생계를 이끌어가기도 한다.

 

가족이란 제1차 사회집단으로서 1차적 정상,1차적 규칙의 개념이 처음 생기는 곳이다. 관습적 정상과 더불어 가족에서의 정상은 한 인간 정체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런 가족의 개성은 앞에 말했듯 법으로 비정상으로 규정되기도 했다. 법은 조금 더 공격적인 방식이라면 가족계획 포스터, 공익광고, 교육은 은밀한 방식으로 정상가족신화를 재생산한다.


포스터는 대부분 인구조절의 문제와 관련되있다. 모든 가족이 4인으로 이뤄져 있으면 빈곤 식량 경제 환경 혐오와 같은 문제가 뚝딱 해결될 거 같아 보인다.


가족계획을 홍보하는 이미지 속 인물들의 행복하고 늠름한 표정은 보살핌, 행복, 지원, 울타리, 기쁨이 가족의 전부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가족 신화는 실제 삶에서 경험하고 있는 나와 가족 간의 복잡하고 깊은 감정적 역사와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


대물림. 가족에서 중요한 개념이 아닐까 한다. 사랑뿐이 아니라 성격도 질병도 직업도 대물림되는 가족집단에서 우린 뜻하지 않은 한계와 좌절감을 느끼기도 한다. 흙수저 금수저도 같은 이야기이다. 부모 잘만나야 한다는 것 말처럼, 가족은 나의 정체성이자 신분이 되었다.


종종 대물림은 있는 자들이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한 방식으로 쓰인다. 그것을 알기에 대중들은 부정적 대물림과 싸워왔다. 그러나 대물림은 종종 "원래 그랬으니까. 왜 자꾸 불평해, 다 똑같이들 살아. 이런데에 힘쏟지마, 바뀌지도 않을걸" 과 같은 말들로 방치되기 쉽다.


현대의 가족은 끊임없이 확장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불편한 진실이다. 방치된 대물림은 확장하는 현실과는 동떨어지고 있다. 어쩌면 검열없이 대물림되는 것 자체가 차별과 혐오의 근거가 되고 있지 않을까. 법이 정의하는 "정상" 의학이 진단내리는 "평범"은 어쩌면 이미 빈껍데기가 아닐까.


이론보단 현장에서, 이성보단 감성으로, 명료함보단 복잡함이, 객관성보단 주관성이 '가족'이란 관계엔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정상가족의 대물림, 그리고 방치는 정체성과 더불어 인간의 기본권인 행복권 추구마저도 흐릿하게 만든다.


주관적 가족이라고, 가풍이란 이름으로 모든 것이 용납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의 정상이 남의 정상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갈등은 필요하다. 정상이란 보존이 아닌 충돌을 통해 확장되는 거니까.


가끔은, 이론이 현장보다 더 앞서기도 한다. 가끔은 법보다 주먹이 앞서기도 한다. 가끔은 논리보단 감성이 더 중요하기도 하다. 가끔은 정상보단 비정상이 더 행복하기도 하다.

 

 

[한승민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