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깨지고 금간 정신의 황홀함 - 책 '황야의 이리'

글 입력 2022.12.22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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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막이 오르고, 내가 보인다.


 

융의 분석심리학적 접근은 언제나 애증을 들끓게 한다. 무의식이 올린 무대는 화려하고 인식할 수조차 없는 진리를 향해 유쾌하게 내달리고, 관객은 매번 그들이 보여주는 쇼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하지만 막이 내리고 난 후에, 관객은 손뼉을 치던 손을 꽉 움켜쥐고 얼굴을 감싸 쥔다. 그런 과정에서 단 한 명의 배우이자 관객은 예외 없이 더 괴로워진다.

 

무대 위에는 하나의 인물만 서 있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관객석에 있는 단 하나의 인물과 같은 사람이다. 세계와 인류의 지혜가 무대를 에워싸지만, 한 사람은 본질적으로 무대 위에 오른 그 자신만을 들여다보고 쇼를 이해할 수 있다. 풍요롭고 비참한 세계에서 한 인간이 태어나지만, 인간은 그 자신의 통로 삼아서만 세계를 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은 -아마 수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이 의도한 바와는 정확히 정반대로- 종종 자기과시나 허영심으로 변질되곤 한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언제까지나 만든 사람보다 보는 사람의 문제로 나타난다. 혹은 둘 다 그렇거나. 글쎄, 여기까지 쓰고 보니 어쩌면 이것은 융의 심리학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 세계의 비극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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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늑대와 개의 시간


 

내가 느낀 감상이 진실이든, 과장이든 어떨까.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에서 내가 느낀 것이 이와 같았다. '황야의 이리'에는 이리와 인간이 섞인 하리 할러가 등장한다. 그는 50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 초로한 중년 남자다. 그는 죽기 직전 자신이 세들어 살던 집주인의 조카에게 자신이 쓴 수기를 남긴다. 조카는 하리할러를 고통의 천재이자 우리 세대가 느낄 신경증을 먼저 느낀 선구자로 묘사하면서, 독자들에게 -그가 하리할러라는 사람을 몰랐으면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을- 그의 이야기를 읽어볼 것을 권한다.

 

이러한 소설적 배경으로 책 '황야의 이리'는 아래와 같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조카가 하리할러를 떠올리면서 쓴 편집자 서문, 하리할러가 죽기 전에 쓴 수기, 하리가 방황 중에 찾은 '황야의 이리에 관한 논문'으로 구성되어있다.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리할러라는 인물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하리 할러는 문학과 예술에 깊은 조예가 있는 지식인으로 명망을 쌓았지만, 전쟁에 반대하는 기고문을 발표한 후 모든 것을 잃는다. 그는 아내와 이혼하고, 당대 지식인들로부터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고 공식적으로 자신의 저작물을 출판하지 못하게 된다. 지금까지 쌓아올렸던 것들로부터 쫓겨난 하리 할러는 자신의 삶의 지향점에서 회의를 느끼며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 삶의 의미를 되새기려 하지만, 그가 몸담아왔던 이성과 논리의 세계에 대해 뼈아픈 경멸만을 느낀다.

 

하리 할러는 자기 자신을 이리-인간으로 규정한다. 인간은 하리가 지성인으로 쌓아올렸던 이성적 가치의 세계다. 그 세계는 문명 속에서 길러 낸 사상과 예술은 비폭력적이고 교양있는 것으로 구성되어있다. 이와 반대되는 이리의 세계는 야성적이고 폭력적인, 충동성과 본성의 세계다.이런 이분법적 구분 속에서 인간과 늑대는 불구대천의 원수로 대립하고 서로 괴롭히기 때문에 이리-인간은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소설에서는 특정한 유형이라고 묘사되지만, 사실 현대사회에서는 풍요로운 현대사회에서는 모두 작고 크게 이리-인간인 면을 지니고 있다(이 점에서는 진정 그는 고통의 선구자라 할 수 있겠다). 풍요로운 논리와 사고의 세계는 자기만족과 우월감을 약속하지만, 풍요로운 본능에서 떨어져 나간 삶은 고독과 무망감이 쫓을 수 없는 그림자처럼 달라붙는다. 그래서 이리-인간들은 평온하고 부지런한 세계를 갈망하는 동시에 경멸하고, 어떤 세계에도 속할 수 없다. 어두운 화면에 비치는 화려한 빛에 달라붙은 나방처럼 이리-인간의 이야기는 이상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황야의 이리에 관한 논문'은 여기서 나아가 하나의 인간이 수천 개의 영혼으로 구성되었음을 선언한다. 그리고 서양철학의 기반이 되었던 이분법적 구분에서 벗어나, 지금까지 무시해왔던 세계와의 통합에 대해 이야기 한다. 하리할러는 이에 따라 감각과 혼란, 쾌락의 세계와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는데, 이를 잘 나타내는 것이 괴테의 꿈과 헤르미네의 만남이다.

 

괴테는 그가 알던 지인인 교수와의 만남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교수는 전쟁에는 신경 쓰지 않고 예술과 문화, 자신의 학문에만 열중하는 부지런한 인간이다. 하리 할러는 자신의 그의 삶을 경멸할 것을 알면서도 그와 만난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사랑해 마다치 않는 문학가 괴테의 그림을 본다. 그에게 괴테는 본디 인간 생활의 문제성과 절망을 분명히 느낀 진정한 예술가였지만, 애국자인 교수 집에 걸린 괴테는 그러한 정신과 거리가 먼 모습으로 잘 다듬어진 채로 뻔뻔하게 걸려있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리의 꿈에 괴테가 나타나는데, 괴테는 그에게 죽은 늙은이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권위적인 노인에서 유연하고 장난스러운 어린아이와 같이 변해 춤을 춘다. 괴테는 웃으면서 상자를 꺼내주는데, 하리는 방안의 위협이 되었던 전갈이 육감적인 젊은 여자의 조그만 다리로 변했음을 깨닫는다.

 

꿈은 하리할러에게 진지함의 극복하고 유머와 유연성을 회복할 것을, 그 안에 있는 여성적 자아(아니마)의 회복할 것을 암시한다. 하리의 이러한 꿈의 예고처럼, 젊은 여성이자 감각적 세계를 상징하는 고급창녀 헤르미네는 하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끈다. 헤르미네는 양성적, 정신적 존재로서 하리에게 춤추는 법을 가르친다. 하리는 헤르미네로부터 자연스러운 조화의 움직임과 유흥을 상징하는 춤을 천천히 배워가면서 이리와 인간의 세계를 합일시킨다.

 

헤르미네의 세계를 대변하는 또 다른 인물은 파블로다. 헤르미네가 하리의 아니마라면, 파블로는 웃음과 자유로움의 세계를 대변하는 자다. 그는 순간의 음악과 유흥을 즐기며, 관계와 세계로부터 경계선을 지운 사람이다. 사실 헤르미네 만큼이나 파블로는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짓기 어려운 캐릭터인데, 그는 그 어떤 것도 집착하지 않고 하리에게 자유로운 합일된, 거의 불교적 가르침에 가까운 세계에 대해 설파하기 때문이다. 하리는 파블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하리의 삶과 가치관을 상징적으로 엮어 놓은 마지막 '마술극장'들의 장면 끝에서, 하리는 헤르미네를 살해한다. 마술극장의 사람들은 하리를 재판장에 세워 그를 조롱한다. 하리가 그를 살해한 것은 그가 진지함의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헤르미네와 파블로의 관계를 질투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종합하면, '황야의 이리'는 이리-인간인 하리할러가 자신의 정신적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결국 그의 또 다른 여성적 자아를 살해하고 만다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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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가며


 

소설을 읽는 내내 하리할러의 갈등에 사무치게 공감하면서도, 그의 모든 과정에서는 답답함이 가시지 않았다. 작가가 지속해서 묘사해온 대로 하리할러가 치료과정에서 '진지함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도 있지만, 헤르미네와 파블로로 대표되는 마술극장의 세계가 새로운 가능성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히피들의 성서'였다는 이야기에 미간을 구길 수밖에 없었던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나 역시 춤추는 조르바가 인류가 앓고 있는 '진지함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전쟁의 횡포에 절망하고 감각의 세계에서 춤을 다시 배우는 것만이 그가 진정한 자유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하리와 헤르미네도 대화를 나눈 바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곧 죽어 버릴 것이고, 그러니까 세상만사가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없는 식의 진리라면, 그건 우리 전체의 인생을 천박하고 어리석게 만드는 짓이야. 그래 그렇다면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리고 모든 정신과 모든 노력, 온갖 인간애도 단념해 버리고는 공명심과 황금이 계속 지배하도록 내버려둔 채 맥주잔이나 기울이면서 다음에 있을 동원령이나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당신의 투쟁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리란 점을 안다고 해도, 당신의 인생이 그로 인해 천박하거나 어리석은 것이 되지는 않을 거예요. 만일 당신이 그 어떤 선이나 이상을 위해 싸우면서 그것을 성취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이 훨씬 더 천박할거예요. 대체 이상이란 성취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요? 우리 인간들이란 죽음을 제거해버리기 위해 살아가는 걸까요? 아니예요.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다음에는 다시 사랑하기 위해 살아가는 거예요. 그리고 죽음 때문에 이 짧은 인생은 그렇게 아름답도록 피어나는거예요."

 

 

헤르미네의 이야기는 설득력 있지만, 반대로 그녀의 이야기는 이리와 인간 사이에서 양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건너가는 인간이야말로 아름다운 것임을 암시한다. 고통을 웃는 얼굴로 극복해 나가고 시간과 죽음을 직면하는 동시에, 영원히 불타오르는 열망을 가슴에 품은 초인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연속적인 꿈에서 파블로의 마술극장에서 헤르미네를 살해한 것은 비극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어떤 해방감을 느끼게 했다. 하리는 여전히 진지한 인간이며 이리-인간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의 또다른 자아를 살해하는 비극을 저질렀지만, 최소한 달콤하고 침투적인 헤르미네의 세계에서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리는 다시 고통스러운 현실로 회귀했지만, 그것은 무지함 상태에서 선택한 회귀가 아니다. 여기서 이상한 위안을 느낀다면, 나 역시 진지함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까? 하지만 실시간으로 세상이 망가지고 본질적으로 인간이 고통받는 운명에 처해있다면 그 어떤 세계에 속하지 않고 입꼬리 한쪽만 추하게 미소 짓는 얼굴이야말로 가장 자유로운 게 아닐까? 나는 나라는 통로로만 그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궁금한 마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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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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