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선의를 포기하지 않는 이야기 - 연극 '사월의 사원' 배해률 작가

글 입력 2022.12.16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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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사월의 사원_전화벨이 울린다.jpg

 

<사월의 사원>은 상처받은 이들의 이야기다. 영혜, 지수, 해영, 현주, 기정. 나이도 성별도 다른 이들이 같은 집에 살며 서로 부딪히고 오해를 빚는다. 한쪽에서 외로운 사람들이 자신만의 집을 찾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오래 전 잃어버린 집을 다시 찾아가는 '메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는 10년 전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에게서 아들 '수린'을 잃었다. 집이라고 믿었던 고향 마을에서 메싸는 외면당하고 벼랑 끝으로 몰렸다. 10년 만에 다시 찾은 고향 마을, 거기서 메싸는 뜻밖에 수린의 소식을 듣는다.


"선의에 대한 믿음과 오해로 희곡을 씁니다."

 

<사월의 사원>을 비롯해 <비엔나 소시지 야채볶음>, <7번국도>, <서울 도심의 개천에서도 작은발톱수달이 이따금 목격되곤 합니다> 등의 작품으로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온 배해률 작가는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다. <사월의 사원>을 끝까지 보고 나면 그 한 문장이 마음에 와닿는다. 이 연극에서 선의는 오해받기도 하고 때론 상처를 주는 결과를 낳지만, 결코 냉소적으로 그려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물들은 서로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상처받더라도 상대방에게 다시 다가가고, 지난날의 실수를 만회하려 또 한 번 용기를 낸다.


지난 7일, 배해률 작가를 만나 <사월의 사원> 이야기와 희곡을 쓰는 마음에 대하여 들을 수 있었다.

 

 

 

멀리 퍼져나가야 하는 말을 담다



작가 배해률.jpg

 

 

“되게 작은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멀리멀리 퍼져 나가야 하는 말이 있거든요.”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이번에 무대에 오른 <사월의 사원>은 어떤 작품인지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월의 사원>은 각자의 이유로 상처받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조금씩 다가가고 멀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그럼에도 함께 있으려고 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마침내 누군가가 돌아오는 이야기이기도 해요. 

 

 

<사월의 사원>은 작년 이맘때 제11회 벽산희곡상을 수상하고 이번에 초연을 한 작품인데요, 작가님의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작품을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은 재작년 겨울이에요. 그때 시작한 이야기가 2년 만에 무대에 올랐습니다. 작업을 하며 무엇보다 즐거웠어요. 연습실에 가면 다들 뜨개질하는 분위기도 좋았고, 작업하는 공간이 안전하다는 느낌, 작업 중 서로를 존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이 작업이 분명히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다는 확신 같은 게 있었습니다. 

 

 

텍스트였던 이야기가 무대에 오르면서 바뀌거나 추가된 내용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내용 중에서 크게 바뀐 부분은 없었어요. 바뀐 건 몇몇 대사의 어미 정도예요. 각 인물의 감정선도 조금씩 바뀌었어요. 원래 희곡 지문에서 제안드린 감정선이 있었는데, 실제 연습을 시작하면서는 어떤 감정선이 이번 프로덕션과 더 잘 맞을지 고민하며 새롭게 길을 찾아갔습니다. 

 

 

<사월의 사원>은 어떻게 시작된 작품인지 궁금합니다. 영감을 받은 상황이나 이 작품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3년 전쯤 캄보디아에서 온 이주노동자 한 분이 열악한 환경에서 사망하셨다는 뉴스를 봤어요. 그 뉴스를 보다가 문득 13년 전 제가 캄보디아에 갔던 때가 떠올랐어요. 그때 킬링 필드* 수감시설을 봤던 기억도 나고, 마음이 복잡해지더라고요. 게다가 그 즈음 가까운 지인이 세월호 참사 유가족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걸 듣고 싸우는 일이 있었어요. 그런 순간과 순간이 계속 얽혀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찾다가 쓰게 된 게 <사월의 사원>입니다.


*캄보디아에서 1975년부터 1979년까지 급진 공산주의 정권 크메르루주에 의해 약 200만 명이 학살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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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관객석 구역까지 무대로 활용하며 무대를 넓게 쓰는 게 독특했어요. 처음 희곡을 쓰실 때부터 염두에 두신 부분일까요?


희곡을 쓸 때부터 작지만 넓은 공간에서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많이 했어요. 어떻게 보면 되게 작은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멀리멀리 퍼져나가야 하는 말이 있거든요. ‘작지만 넓은 곳’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연출님과 만나면서 극장에서 실제로 구현될 수 있는 방향을 찾게 된 것 같아요.

 

 

 

<사월의 사원>에서 발견한 ‘우리의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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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극이 안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제목을 ‘사월의 사원’이라고 지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사월의 사원’이라서 ‘메싸(4월)’의 이야기가 중심일 것 같았는데, 공연을 보고 나니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골고루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목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해졌어요.


일단은 극 중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간대가 4월이에요. 그리고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생각하며 다가갔던 이야기이기에, 단순히 극의 시간적 배경인 4월을 넘어서 현실 속 ‘우리의 4월’에 대한 이미지가 제목에 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월의 사원’이라는 제목을 수어로 통역하면 ‘4월에 하는 기도’ 또는 ‘4월에 떠난 이들을 위해 하는 기도’ 정도의 의미가 된다고 하더라고요. 

 

4월이라는 뜻의 ‘메싸’라는 이름은 더 나중에 정해졌어요. 캄보디아 인물의 이름을 짓기 위해 찾아보던 중 캄보디아에서는 태어나는 계절이나 달의 이름을 이름에 붙이기도 한다길래, ‘메싸’가 적절하겠다고 생각했죠.

 

 

이 작품에서 작가님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무엇인가요? 그 이유도 궁금합니다. 


모든 장면을 다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장면인 수린이 돌아오는 순간을 참 좋아해요. 캄보디아의 노인은 지나간 죽음을 붙잡아 두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이 우리에게서 영영 떠나간 존재가 돌아왔을 때 마중을 나가준다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장면을 만들 때, 작품을 쓰기 전 들었던 세월호 유족에 대한 막말도 떠올랐어요. 그런 막말에 대항하고 잊혀져가는 것들을 간직하기 위해서 더 강력한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구상한 장면입니다. 또 최근에 가해자들은 자꾸만 돌아오는데, 정말 돌아와야 할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도 이 장면에 담겨 있습니다. 

 

 

작가님은 <사월의 사원>이 관객에게 어떤 작품으로 다가가기를 바라시나요?


안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극을 쓸 때보다 공연을 함께 준비하며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 작품이 관객을 비롯해 함께 공연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계속 어떤 안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요. 요즘 살기가 너무 팍팍한데, 그럴수록 누군가는 계속해서 안부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극장에 모여서 서로의 안부를 많이 물어봐 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짜 게이'가 아닌 것 같다는 댓글에 “근데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진짠데?”라고 반응하는 해영의 대사가 기억에 남았습니다. 이야기에서 소수자가 그려지는 방식을 생각하게 되기도 했고요. 작가님은 이 작품에서 소수자를 그릴 때 무엇에 가장 중점을 두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소수자가 항상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만 하는 입장에 몰리는 게 너무 싫어서 희곡에서만큼은 그냥 거기 당연하게 있는 존재로 그리려 해요. 어느 시점부터 제 이야기에는 퀴어가 디폴트라는 생각도 하면서 희곡을 쓰고 있어요.

 

 

그럼 전반적으로 인물을 만들 때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게 있나요?


좀 안일한 말일 수도 있는데, 대책 없이 악한 인물은 잘 안 쓰는 편이에요. 그런 사람은 현실에서도 너무 많이 보니까, 희곡에서만큼은 별로 안 보고 싶다는 마음이 커요.

 

 

 

선의에 뿌리를 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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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를 품고 사는 사람들에 대해 더 치열하게 고민해보려 해요.”
 


작가님의 전작인 <비엔나 소시지 야채볶음>은 공연으로 보고, <7번국도>는 희곡으로 읽었습니다. <사월의 사원>을 포함해 작가님의 작품들은 극적인 하나의 사건을 다루기보다 소외된 이들의 일상을 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이유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의도적으로 일상성을 목표로 두고 쓰는 건 아닌데, 종종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이유를 고민해봤어요. 저는 어떤 참사나 폭력의 순간이 아니라 그 이후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극적인 일을 겪은 한 인물이 예전과는 달라졌을지라도 삶을 계속 이어나가는 모습에서 많은 분이 일상성을 읽어내시는 것 같습니다. 


폭력과 참사의 모습, 거기에 내재한 공포와 같은 감각을 우리는 굳이 무대 위에서 보지 않더라도 이미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그 자체를 무대에서 구현하는 것에는 좀 의문이 들어요. 그렇지만 그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말해야 한다고는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무대 위에서는 폭력의 순간보다 그것을 지나온 사람들이 어떻게 나아가는지를 그리게 됩니다. 

 

 

관객 입장에서는 그런 연극을 본 다음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가끔은 그저 내가 이런 작품을 봤다는 것 자체에 만족하고 멈추는 것 같아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고요. 


저도 현실 속 누군가에게 닿아 있는 어떤 죽음이나 폭력을 이야기 속에서만 소모해버린 건 아니었을까 자주 생각해요. 그 이야기가 끝나고 난 다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요. 그 고민은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듯해요. 다음 희곡으로 이어질 때도 있었고, 희곡을 쓰면서 덜 무심해지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하기도 해요. 대단한 건 없고, 그냥 그 정도인 것 같아요. 

 

 

지금 해주신 말씀이 “‘선의’에 대한 믿음과 오해로 희곡을 씁니다”라는 소개와도 왠지 연결될 것 같아요. 이 말에 대해 조금 더 들어보고 싶습니다. 


제 작품으로 합평을 하면 왜 이렇게 인물들이 착하기만 하냐는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그런 말에 반감을 느꼈는데, 이제는 그게 내 이야기의 특성인가보다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그래서 선의를 품고 사는 사람들에 대해 더 치열하게 고민해보려 해요. 요즘 많은 작품이 인간 본성은 원래 추악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렇다면 나는 그것과 정반대의 이야기를 써봐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물론 선의라는 말 자체가 낳을 수 있는 오해도 분명히 있을 수밖에 없어요. 어쨌든 선의를 품고 사는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어딘가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편견과 오해를 기반으로 한 선의는 때로 타인에게 선의로 다가가지 않을 수도 있죠. 저도 그래요. 다른 사람이 되어보지 않는 이상 오해와 편견이라는 것은 제 안에 어느 정도 계속 있을 수밖에 없죠. 그래도 희곡을 쓸 때만큼은 희곡 속 인물들에게 치열하게 다가가려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제 안의 오해들을 발견하고 돌아볼 수 있어요. 그런 맥락에서 “선의에 대한 믿음과 오해로 희곡을 씁니다.”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2023년 작가님의 새해 계획은 무엇인가요? 혹시 예정된 다음 작품이 있다면 그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코끼리들이 웃는다’팀과 음악극 작업을 앞두고 있고, 아직 제 컴퓨터 안에만 있는 새 희곡들이 있습니다. 제목은 정해지지 않았는데 하나는 목련으로 풍선을 부는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염소를 따라 길을 만들어 나가는 길지기의 이야기예요.

 

 

마지막으로, <사월의 사원>의 관객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보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행복하고 건강하세요.”라고 말하고 싶어요.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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