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맞이하는 연인의 모습 [영화]

노부부의 죽음과 사랑, 영화 <아무르>
글 입력 2022.12.16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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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졸중으로 한쪽 몸이 마비된 아내와 그런 아내를 부축하는 남편.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 한 발짝 한 발짝 느리게 움직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무도회에서 호흡을 맞춰 춤추는 연인을 떠올렸다면 너무 기괴한 감상일까.


노부부가 주인공인 이 영화의 제목 ‘아무르(Amour)’는 프랑스어로 사랑을 뜻한다. 영화 <아무르>는 죽음,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에 관해 이야기한다.

 

 

 

노부부의 사랑, 영화 <아무르>(2012)



아내 ‘안느’와 그 남편 ‘조르주’의 평온한 일상은 돌연 무너져내린다. 갑작스러운 병으로 반신불수가 되어버린 안느는 일상의 사소한 행동 하나도 제힘으로 할 수 없고, 안느의 생활을 책임지는 것은 조르주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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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안느는 휠체어에서 침대로 짧은 거리를 움직일 때도 타인의 도움이 있어야 하고, 한쪽 손만으로 책장을 넘기기가 어려워 책도 쉽게 읽지 못한다.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조르주의 손길을 받아야 하는 안느는 의존적이기만 한 제 모습에 누구보다도 힘들어한다. 건강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젊게 살아가던 그는 병세의 악화에 따라 급격하게 늙어가는 듯하다.  


그래도 조르주는 최선을 다해 안느를 보살핀다. 병시중은 물론이고, 안느의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애쓴다. 하루는, 팔이 불편한 안느 대신 칼질을 하던 조르주가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민망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 남편의 옛날이야기를 들은 안느는 귀엽다며 미소 짓는다.


 

안느: 이런 얘길 왜 이제야 해?

조르주: 아직 안 한 얘기 아주 많아.

 

 

예전의 안느라면 보여주지 않았을 모습을 안느가 불가피하게 보여주자, 조르주도 질세라 자신의 어린 시절을 스스럼없이 꺼내어놓는다. 안느에 비하면 매우 가볍고 별것도 아닌 이야기지만, 조르주가 이런 과거를 공유하는 것은 안느에게 위안이 된다. 오랜 세월을 함께했음에도 서로에게 모르는 부분이 있음을, 그리고 그게 자연스러움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모르는 부분까지도 알아가겠다는 마음을 드러낸다.


안느는 어린아이처럼 의존적으로 변하고 조르주는 자신이 어린아이였던 기억을 꺼내놓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간은 두 사람이 늙어가는 과정의 일부다. 조르주는 안느가 혼자 늙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는 병을 앓지 않음에도 병을 앓는 안느와 발맞춰 늙는다.

 

 

 

새처럼 날아든 불청객



영화 말미에서 안느가 먼저 숨을 거둔 뒤, 편지를 쓰던 조르주는 열린 창을 통해 들어온 비둘기를 발견한다. 그는 담요로 비둘기를 붙잡고 끌어안는다. 비둘기가 갓난아기라도 되는 듯 소중하게 쓰다듬던 조르주는 편지에 비둘기를 잡는 일이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고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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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비둘기가 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안느의 병세가 악화하고 있을 때도 비둘기 한 마리가 들어와 조르주가 쫓아낸 적이 있다. 그때와 지금, 비둘기를 대하는 조르주의 태도는 달라졌다.


영화 속에서 비둘기는 죽음이다. 초대 없이 날아든 불청객. 비둘기를 몰아내기 급급했던 조르주가 영화 끝 무렵에서야 비둘기를 품에 안는 장면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조르주의 변화를 나타낸다.

 

많은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조르주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지친 안느가 죽음을 원할 때도 그러지 말라며 달랬다. 그러나 죽음과 가까운 시간을 경험한 그는 막연한 공포를 거두어내고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바꾼다. 배우자의 죽음,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죽음이란 것이 상상만큼 어렵지도 두렵지도 않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불청객의 존재에 관한 암시는 영화 초반에도 등장한다. 안느가 아직 건강할 때 함께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부부는 현관문이 망가진 것을 발견한다.


 

조르주: 뭔가 훔쳐 가려고 도둑질을 한 거겠지.

안느: 우리 집에서?

조르주: 그럴 수 있지. 도둑들은 그냥 아무 집이나 터는 거니까...

 

 

죽음은 도둑과 같아 상대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아무 집이나 터는 도둑처럼 무차별하게 안느와 조르주의 집에 숨어들었다. 이것은 영화 속 주인공인 안느와 조르주, 두 사람에게만 있는 기구한 사정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흔한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죽음에 대처할 줄을 모른다.

 

 

 

두 사람만의 이야기



미장센은 아름답지만, 전개로 따지자면 꽤 흔한 스토리라고 생각했다. 단 하나 예상하지 못한 부분은 바로 엔딩 장면이다. 안느와 조르주가 떠나고 비어버린 집을 보여주며 영화가 마무리될 줄 알았으나, 실제로는 부부의 딸이 빈집에 돌아와 홀로 생각에 잠기는 장면으로 끝난다. 


왜 이런 엔딩을 구상한 것인지 직관적으로 느껴지지 않아 한참을 고민했다. 눈에 띄는 특징 하나는, 딸이 혼자 집 안에 앉아 있는 장면을 복도 쪽에서 보여줄 때 집의 방문이 모두 활짝 열려 있다는 점이다. 


망자가 있을 때 그 영혼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창문을 여는 행위는 유럽 배경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한다. 정확히 어느 나라의 문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제사를 지낼 때 대문을 열어놓으니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관습이지 않을까 싶다. 


부부의 집으로 구급대원들이 들이닥치는 영화의 첫 장면을 보면, 모든 창문이 꽉 닫힌 가운데 안느가 깊이 잠들어 있던 침실의 창문만이 열린 채다. 조르주 또한 그의 삶 마지막 순간에 안느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선다. 두 영혼은 편안히 집을 떠났다. 안느와 조르주가 떠난 후 딸이 방문한 집에는 둘의 흔적만 남아있을 뿐, 두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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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병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계속해서 배제되었다. 처음 발병을 알릴 때도 부부는 우리 둘이 알아서 하겠다고 말하고, 병이 악화되어 침대에만 누워 있을 때는 그 모습을 딸에게 숨기려 든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부담을 주기 싫고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지만, 부부가 둘만 있는 세계에 빠져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안느와 조르주는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고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딸: 어릴 때 두 분이 사랑을 나누는 소리를 엿듣던 생각이 났어요. 그 소릴 들으면 괜히 마음이 편해졌어요. 두 분이 여전히 사랑한단 뜻이고 그럼 이혼할 걱정 안 해도 된다는 거니까.

 


이제 그 집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그 사실이 두 사람이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두 사람은 함께 떠났다. 텅 빈 집에 홀로 남은 딸의 모습은, 결국 이 모든 것이 안느와 조르주, 두 사람만의 이야기임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다른 이들은 포함되지 않고 그들의 친딸조차도 끼어들지 못하는, 둘만의 사랑이다. 

 

 

 

영원한 불청객



조르주의 선택이 윤리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안느가 아무리 죽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어도, 당시의 안느는 심신이 망가진 데다가 심리 치료나 상담도 없이 고립된 상태였다. 또한 조르주도 오랜 병간호에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조르주의 선택이 온전히 안느를 위한 결과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조르주를 탓할 마음이 들지 않는 이유는 이 영화가 보편적인 이야기가 아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이다. 내가 알지 못하고 영화에 채 담지 못한 두 사람의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타인이 더는 말을 얹을 수가 없다.


죽음은 인류의, 아니 모든 생명의 곁에 항상 존재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에 대한 대처가 능숙하지 못한데, 그 이유 또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죽음이라는 현상은 보편적이지만 그 체험은 지극히 사적이고 마다 달라서 몇 번을 경험하고 관찰해도 그에 익숙해지질 않는다. 죽음은 인류가 아무리 발전을 거듭해도, 영원한 불청객일 테다. 우리는 각자의 나름대로 불청객을 맞이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개인이 선택한 방법을 외부인이 평가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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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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