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레이디스

리플리와 캐롤의 원작 작가의 서스펜스 단편집
글 입력 2022.12.14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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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보다 보면 불편한 감정을 심어주는 작품이 있다. 그래서 한 번 경험으로 족하기도 하다. 그러나 왠지 남의 일 같고, 나의 책임은 단 한 개도 느껴지지 않아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희귀한 것도 있다. 내게 <레이디스>는 그런 작품 중 하나로 한 글자씩 읽을 때마다 캐릭터의 심리가 변화하는 과정을 세세히 느낄 수 있었다.

 

그 과정은 이렇다. 인물이 어떻게 이런 결론에 도달해 발언하고 행동했는지, 그리고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캐릭터가 사회적으로 ‘어떤’ 인물로 각인됐는지 등, 얽혀있는 크고 작은 인간사를 건조한 문장으로 서술했다. 그렇게 작가는 서서히 서사를 쌓으며 평범하나 개인 내면적으로 독특한 캐릭터를 창조했다.

 

외로움을 어떻게든 공허한 말로 속여보려는 남자와 새 삶을 위해 도시에서 도망친 가정교사, 외도하는 남녀를 지켜보는 이웃집 여자, 빌라에서 혼자 살아가는 여자, 어린아이를 데리고 드라이브를 떠나려는 남자 등. 인물에게 동조하고 싶지 않은 의지가 반영된 듯 작가는 캐릭터와 철저히 거리를 두고 공평하게 표현한다. 그 효과로 독자에게 전달되는 찜찜한 감정이 배가 된다.

 

작가는 우리가 살면서 굳이 들추고 싶지 않은 면모를 에피소드마다 차곡차곡 쌓는다. 감정적으로 구는 드라마틱한 서술도 아니라 피날레 없이 어느 정도 완만한 선을 그리며 서사를 유지했다. 현황은 적나라하게 말하되 절대 판단하지 않는다. 덕분에 불편한 감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감하며 독서할 수 있었다.

 

작가가 쓴 단편은 매우 흡인력이 있었다. 덤으로 애매모호한 결말이 반복되니 본능적인 싸함을 느꼈다. 그래서 한 챕터를 읽고 나면 책상 위에 눌어붙은 지우개 가루처럼 흔적이 남는다. 그 기분으로 다음 장을 맞이하고 되풀이된다. 그러나 찜찜함의 종류가 조금씩 달라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나니 온갖 인간군상은 다 만나본 기분이며, 도무지 기분을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비유하자면, <레이디스>는 밤 고구마를 좋아하는 사람이 먹을 법한 목메는 카스테라같았다. 그를 축이는 우유 같은 시원함은 없지만, 자꾸 끌려서 욱여넣고 부드러운 빵의 질감을 속속히 느껴본다.

 

각 에피소드는 기억 저편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떤 인물과 조우를 상기시켜 수반한 부정적인 온갖 것들을 끄집어내지만, 현실에서 느꼈던 불편한 이유를 소설 속 인물을 통해 깨달으니 그것이 정답은 아닐지라도 케케묵은 궁금증이 풀리기도 했다. 입안 가득히 차 있던 빵 덩어리가 순식간에 식도를 타고 부드럽게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레이디스 표지-최종4.jpg

 

 

이렇듯 <레이디스>는 인간이 살면서 혼자 삭히고 남에게 쉽게 말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감정을 상상력으로 풀었다. 하나도 중복되는 소재 없이 쩨쩨하거나 수치스럽고, 혹은 의미 없는 감정의 잔여물을 어떻게 이토록 깔끔하게 표현했을까?

 

옳고 그름 없이 오롯이 독자가 캐릭터를 인식하게 한다. 상상력으로 평범한 일상을 독특한 사건으로 재구성하여 인물 행동의 당위값을 부여했고, 각자 모두의 사정과 생각이 있다는 듯이 공평히 서술하니 독자에게 지난날의 성급한 판단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내가 믿었던 감정은 알고 보니 틀렸고 그 속에 진실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예를 들어 상대가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할 때 그 생각이 사람의 머리 위로 둥둥 떠다닌다면 어떨까? 나는 심리 전문가도 아니면서 괜히 인간에 대한 지독한 탐구에 열을 올린다. 역시 <재능 있는 리플리 씨>를 쓴 작가다운 글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간 군상을 설명하는 문장 중에서 내 모습도 여럿 볼 수 있었다. 실로 거울 치료를 하는 기분이라 기억하기 싫은 사람과의 조우를 제외하고도 본인이 싫어하는 모습을 실제로 마주해 정곡을 찔리는 기도 한다. 소설 속 인물이었다면 낯부끄러운 순간도, 아니면 염세적인 모습에 진절머리가 났을지 모른다.

 

다행히 잠들기 직전의 새벽,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홀로 읽는 책이라 부끄러움조차 모른채 페이지를 넘겼다. 영화로 보았다면 인물에게 집중해 회고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을 테다. 집단이 되면 ‘선’을 쫓는 인간 특성을 아는지, 혼자 직접 읽어야 하는 책은 자신에게 솔직할 기회를 준다. 건조한 소설의 문장들은 흥미롭고 어두운 감정을 자아냈다.


더 타임스는 <레이디스>의 카피로 “하이스미스는 최면을 거는 문장으로 서스펜스를 한껏 끌어올리는 최고의 작가다.”라고 표현했다. 이 책을 읽고자 선택한 이유도 앞서 언급한 영화 뿐만 아니라 루니 마라와 케이트 블란쳇의 <캐롤>이 주었던 섹슈얼한 긴장감과 심리의 당위성을 더욱 찬찬히 살피고 싶어서였다.

 

이는 작가의 개성으로 글이 부담스럽다면 영화로 접해도 좋다. <캐롤>보단 세기의 미남인 알랭 들롱의 <태양은 가득히>와 멧 데이먼의 <리플리>를 더 추천하는데, <레이디스>와 어울리는 질감과 흥미로운 찜찜함, 그리고 호기심이 들끓는 잔잔함을 마주할 수 있다.

 

*


그는 열린 문의 손잡이를 잡은 채 어깨 너머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깜박 잊은 게 있는 얼굴, 아니면 그녀가 정말 싫어서 기억해두고 싶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 109쪽, 모빌 항구에 배들이 들어오면

 

눈으로 볼 수 없을 뿐이었다. 그 무언가가 엘스퍼스로 하여금 웅크리고 앉아 숨을 죽이게 하고, 엄마에게 감정을 전달할 정확한 단어를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 엄마가 그 무언가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아마 말해서는 안 되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이 감정이 사라질까? 엘스퍼스는 생각했다. 아니면 뭔가 일이 터지고야 말까? - 127쪽, 공 튕기기 세계 챔피언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그녀는 온 감각으로 깨달았다. 이 날 아침과 이 도시는 그녀에게 너무나 커다란 일부로 자리 잡을 것이고, 그녀가 알고 있던 다른 아침들과 다른 도시는 낯설어지고 역시 두려움의 색체르 띠게 될 거라는 사실을.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덜컥 내려앉은 심장으로 이 방 이 순간의 감각을 정확하게 다시 포착할 것이고, 이 기억은 번번이 떠오를 것이다. - 128쪽, 공 튕기기 세계 챔피언

 

루이자는 멀어져가는 그의 형체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자신의 봉사에 대해 그가 부주의하게 건넨 칭찬이 기분 좋았다. 필요한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사무실에서도 그녀가 필요했지만, 그보다 여기서 더 필요했다. 제니에게는 그녀가 필요했다. 제니를 제대로 돌봐줄 사람이 그녀 말고는 집 안에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엄격한 만족감이 서린 미소를 띠고서, 저 혼자 만들어낸 수줍음으로 그만 구깃구깃 접은 지시 사항을 읽으려고 등불 가까이 허리를 굽혔다. - 205쪽, 루이자를 위한 초인종

 

“안녕하세요, 바우어 박사님.” 어울리지는 않지만 진료실 카펫에 녹아드는 파란색 시폰 스카프를 느슨하게 풀며, 부인은 가죽 팔걸이의자에 편히 앉았다. “여기는 정말이지 천국처럼 시원하네요! 오늘은 떠날 시각이 벌써 두려워지는데요.” / “그래요.” 그는 미소를 지었다. “냉방 때문에 다들 버릇이 나빠져요.” 책상에 허리를 굽히고서 그는 월요일에 미리 적어두었던 노트를 읽었다. - 274쪽, 에프턴 부인, 그대의 푸르른 산비탈에 둘러싸여

 

“다시!” 명령이 떨어졌다.

미스 저스트의 신호를 놓칠까 봐 항상 한 눈으로 어깨 너머를 살피는 미스 펜더개스트가 용기 내어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으며. “처음부터요?”

“아니, 안으로 뛰어들어오는 부분부터 부탁해요!”

미스 팬더개스트는 악보에 ‘안으로 뛰어들어온다’라고 표시된 악절부터 다시 시작했다. - 300쪽, 미스 저스트와 초록색 체육복

 

묘한 건 서둘러 그녀를 쫓아갈 생각이, 어떻게든 그녀를 찾고 싶다는 충동이 전혀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약함, 외로움, 부족함, 실패와 추락말고 그가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그는 그를 둘러싼 외로움의 핵이었고, 그 핵심에는 부적절성이 있었다. 심지;어 그는 사랑에도 부적절했다. 눈꺼풀이 떨렸지만 그는 무심하게 고개를 들어 장갑 낀 손을 코트 주머니에 쑤셔넣고 대로 쪽으로 걸었다. - 359쪽, 마법의 문

 

 

[이서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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