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꺾이지 않는 마음

글 입력 2022.12.03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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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12년 만에 월드컵 16강에 진출했다. 16강행 티켓을 얻을 수 있는 마지막 승부에서 한국이 포르투갈을 이기고, 우루과이가 가나를 꺾어 결과적으로 한국과 우루과이의 승점이 1승 1무 1패로 같아진 가운데 한국이 그간의 경기에서 더 많은 골을 넣어 16강에 진출할 수 있게 됐다. 9%의 확률을 뚫고 소위 ‘기적’이란 것이 이루어진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물론 단순히 운이 좋았다기보다는 그만큼 매 경기 최선을 다해 뛰었던 선수들의 땀과 노력과 결실이 깃든 결과라서 더욱 값졌다.

 

경기가 끝나고 올라온 공식 사진에서 권경원 선수와 조규성 선수가 함께 태극기를 들고 있는 모습이 마음 한구석을 울렸다. 태극기에 적혀 있는 문구 때문이었다. 국기의 위아래로는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을 들여 쓴 것 같은 손글씨로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Impossible Is Nothing’ 그리고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퍽 영화 같은 문구에 영화 같은 장면이었다. 불가능해 보였던 기적 신화를 마치 아무렇지 않게(그러나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이루어낸 그들의 모습을 보며 전율했다. 아마 경기를 본 모두가 전율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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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국의 16강 진출이 확정되자 트위터에서는 ‘알빠임?’ 붐이 일었다. 포르투갈과의 경기에 앞서 한 트위터 유저가 포르투갈이 유력 우승후보로 거론되고 있다는 다른 트위터 유저의 말에 ‘알빠임?’이라고 답한 것이다. 성지순례* 한다는 마음으로 부랴부랴 다른 사람들을 따라 화제가 된 그 게시물을 찾아갔다. 해당 트윗은 이미 8만 개의 리트윗(공유)을 넘어서고 있었다. 멘션(댓글)에는 원하는 학교에 붙게 해주세요, 로또 1등 당첨되게 해주세요, 하는 일 모두 잘 풀리게 해주세요 등 수백 개의 성지순례 흔적으로 가득했다.

 

해당 게시물에서 뒤늦게 눈에 들어온 멘션이 있다면 포르투갈이 우승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고 처음 언급한 타 유저의 답장이었다. 그는 알빠임? 이라는 말에 ‘우리나라 선수들이 이렇게 생각해야 되는데’라고 답했다. 적당한 쿨내와 온기와 응원의 마음이 한데 공존하는 아름다운 현장이었다. ‘알빠임?’ 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의 단단한 믿음이 부러웠다.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희망을 잃지 않는 이들의 자세를 본받고 싶었다.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나는 알빠임 정신은커녕 한국이 질 것이라고 예상한 쪽이었다. 시류에 쉽게 편승하는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경기 전 온갖 베팅 업체가 내놓은 예측에 따르면 우루과이가 16강에 올라갈 확률이 제일 크다고 했다. 우루과이 다음으로는 가나가 16강에 진출할 확률이 높다고 했고 그건 한국의 16강 진출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언론에서는 16강에 진출하려면 ‘무조건 포르투갈을 이기고’ 그와 동시에 ‘우루과이가 가나를 꺾어야 한다’고 말했다.

 

강호인 포르투갈을 무찌르는 것도 모자라 우루과이가 가나를 이기는 천운까지 따라줘야 한다고? 말 그대로 산 넘어 산이었다. 또 한국이 포르투갈을 이긴다고 해도 우루과이가 너무 많은 득점으로 가나를 꺾으면 한국의 16강 진출은 좌절된다. 너무나 많은 운과 우연이 요구됐다. 예나 지금이나 헛된 희망을 품을 바에야 차라리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는 편을 택하는 나라는 인간은 월드컵이라고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거대한 실패 뒤에 따라오는(따라올 것이라 믿는) 절망과 좌절이 두려워 늘 도망치는 비겁한 사람이 나였으므로.

 

* 인터넷상에서 정확한 예측을 한 글을 다시 보러 가거나 그 글에 댓글을 다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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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겁쟁이 기질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한국의 16강 진출이 확정되고 나서다. 한국이 포르투갈에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보니 같은 시간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은 다른 곳에서 우루과이가 가나를 2-0으로 이기고 있었다. 우루과이가, 가나를, 이기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수도 없이 마주했던(그리고 상상했던) 16강 진출의 그 ‘극적인 경우의 수’가 눈앞에서 보란 듯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남은 추가 시간에 우루과이가 한 골이라도 더 넣으면 한국의 16강 진출은 곧바로 좌절되고 우루과이가 16강에 올라간다고 했다.


추가 시간은 4분 정도 남아 있었다. 손발이 덜덜 떨렸다(그간의 월드컵을 지켜봐 온 바 4분 동안에는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일어날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었으므로). 공이 가나 쪽 골대 주위를 맴돌 때마다 저도 모르게 어어어- 소리를 질렀다. 한국과 우루과이의 16강행 티켓이 가나 골키퍼 손에 달린 꼴이었다. 추가 시간이 3분 2분 1분으로 줄어드는 동안 몇 번의 아찔한 순간이 오갔고 마침내 경기가 종료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대한민국 16강 진출’이라는 문구가 화면에 떠올랐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오아아 함성(이라기보다는 괴성)이 터져 나왔고 우리는 얼싸안으며 이건 기적이라고 연신 외쳐댔다.


TV 화면 너머로는 손흥민 선수가 울고 있었다. 월드컵 직전 안면 부상을 입어 수술을 하고도 팀의 주장으로 꿋꿋이 활약한 우리의 캡틴. 인터뷰에서 선수들이 정말, 정말 자랑스럽다고 연신 말하는 그에게 우리는 당신 역시 너무나, 너무나 자랑스럽다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마스크 투혼을 불사한 그와 함께 누구보다 고생했을(그리고 기뻐하고 있을) 선수들을 떠올렸다. 그 ‘극적인 경우의 수’를 뚫고 전 국민을 환호하게 한 장본인들이었다. 이게 정말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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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강 진출이 확정되고 감동의 쓰나미가 한 차례 지나간 뒤 한동안 정신이 멍했다. 아마 그때 내 표정은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호날두의 표정과 비슷했을 것이다. 한국의 16강 진출을 간절히 원한 만큼이나 경기에 질 것이라는 회의적인 마음도 컸기 때문에 그 기적의 순간을 맞닥뜨릴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무언의 당혹스러움과 환희와 충격과 짜릿함 같은 온갖 감정들이 마구 뒤섞인 채 나를 해일처럼 휩쓸었다. 그리고 이내 후회의 감정이 썰물처럼 밀려왔다.

 

왜 당연히 실패할 것으로 생각했는가. 왜 우리 선수들을 믿지 못했는가. 주변에서 아무리 실낱같은 희망이라느니 몇 대 몇으로 질 것 같다느니 떠들었다 해도 그런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묵묵히 한국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분명 곁에 있었다.

 

그러나 물론 한국의 16강 진출을 예상하지 않은 (나 같은) 사람들도 누구보다 한국의 16강 진출을 바랐을 것이라 믿는다. 네이버 등 유명 포털 사이트에 ‘16강 진출 조건’ ‘16강 진출 가능성’ ‘16강 진출 경우의 수’ 같은 것들이 주요 검색어로 떠오른 걸 보면 말이다. 그런 간절한 마음들과 우주의 기운이 모여 선수들의 빛나는 투혼으로 기적을 이뤄낸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 중심에서 활약한 사람들로부터 스스로가 큰 용기와 감명을 얻었다는 점을 거듭 밝히고 싶다. 10%도 안 되는 확률에 베팅을 건 사람들이나 ‘알빠임?’ 정신으로 온 마음을 무장한 사람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며 있는 힘껏 사람들을 다독이던 글과 카타르 현지에서 연신 ‘대~한민국’(짝짝 짝 짝짝)을 외치며 열성껏 선수들에게 힘을 실어준 관중석 사람들에 벅찬 고마움을 느낀다.


특히 이들의 간절한 염원만큼이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투혼을 불태운 선수들에게도 무한한 존경과 감사와 용기를 느낀다. 언젠가 ‘기적은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찾아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이지 이렇게 딱 맞는 상황도 없을 것이다. 트위터에서 한 유저는 이번 한국의 16강 진출을 두고 “방법이 있는 한 불가능은 없다”라고 말했다.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부딪혀보는 것. 포기하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투혼의 의지를 불태우는 것. 많은 이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조차 내면의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는 것. 그런 담대한 마음들이 모여 기적을 이뤄나가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기적이란 꽤 자주 일어날 수 있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건지도 모른다. 그곳에는 꺾이지 않는 마음이 늘 자리하고 있을 테지. 이 황홀하고도 아름다운 깨달음의 축제 속에서 다시 한번 월드컵의 기적을 바라본다. 이제는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붉은 악마의 당신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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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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