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나는 결국 당신 유전의 산물 - 거울 [공연]

글 입력 2022.11.18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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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정지] 거울 포스터_최종.jpg

 

 

 

VIGIL



연극 <거울>은 소극장인 보광 극장에서 진행되었다. 무대는 공간 한 칸에서 진행된다.

 

관객들은 1층에서 연극의 간단한 소개가 담긴 리플렛과 굿즈인 ‘거울’을 수령한 뒤 한 층 아래로 내려가면 바로 무대로 진입한다. 무대에 진입하는 순간 이미 극은 시작되어있다. 무대에서는 일렉트로닉 장르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으며, 배우들은 그 비트에 맞추어 이미 배역의 움직임을 진행하고 있다.

 

이때 나오고 있는 노래가 바로 ‘Vigil'. ‘Golden Features’의 노래이며 감각적인 비트와 몽환적인 분위기가 인상적인 노래다. ‘Vigil’은 밤샘, 철야를 뜻한다. 공연 시각이 되면, ‘Vigil’ 노래가 서서히 끝나고 해정의 끝나지 않는 밤이 시작된다.


공연은 해정이 화를 내며 시작한다. 어떤 대사도 없지만, 옷을 죄다 던지는 해정의 표정과 행동을 통해 관객은 그녀가 화났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

 

의문은 다음 장면에서 해소된다. 그녀는 옷 중에서 가장 밝은 색 원피스를 입고 소개팅에 나갔다. 해정의 얼굴을 본 상대방은 해정이 마음에 드는 듯 외모에 대해 칭찬하고, 영화를 보러 가자고 말하고, 실은 자신이 나이를 속였다며 사과까지 한다.

 

해정은 그의 거짓말도 웃으며 넘어가고, 그렇게 둘의 긍정적 미래가 그려지는 찰나, 해정의 한 마디에 상대의 행동은 손바닥 뒤집듯 바뀐다. 그것은 바로 해정의 유전병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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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火)



해정은 포도막염을 앓고 있다. 포도막염은 자가 면역성 질환의 하나로 눈을 싸고 있는 포도막 조직에 염증이 생긴 질환이다. 원인 불명의, 완치도 없는 이 유전병 때문에 해정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스테로이드 알약을 먹는다. 약이 부작용이 있을까 매일 걱정되지만, 약을 안 먹으면 실명이 될 수도 있다.

 

해정은 약을 먹을 때마다, 병원을 갈 때마다, 평생 가지고 살아야 하는 이 유전병 때문에 극심한 괴로움을 느낀다. ‘유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평생 짊어져야 하는 포도막염은, 그 증상 자체를 넘어 그 사실만으로 그녀를 좀먹는다.


그녀는 이 병을 자신에게 내려준 엄마를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꼭 2년 만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처음으로 그녀는 엄마를 만난다. 물어보고 싶었으니까. ‘화’를 내고 싶었으니까. “엄마 딸이 아니었으면, 나도 괜찮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찾아간 엄마는 약도 안 먹고 잘 지낸다고 한다. 약 먹을 때보다, 혼자 운동하며 지내는 지금이 더 건강한 것 같다고. 2년 만에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딸의 방문에 엄마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밥을 먹으며 해정은 처음으로 화를 낸다. 울분을 토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단절되었던 모녀 관계. 해정은 소리친다. 엄마는 엄마였던 적이 없어, 남편의 죽음에 슬퍼하는 아내였을 뿐!


처음으로 화를 오롯이 표출하는 딸을 엄마가 안아준다. 처음으로 서로 진심을 터놓고 이야기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많이 슬펐을, 엄마가 아닌 여자였던 순영은, 처음으로 엄마가 되어 해정에게 사과한다. 해정을 보듬고, 안아준다.

 

그런데? 해정은 그 와중에도 엄마의 말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 엄마의 말이 진심일까, 의심하게 되고 엄마의 진심을 재단하게 된다. 내가 혼자 버텨왔던 모든 아픔이 이렇게 진심일지 의심되는 말 한마디에 모두 해소가 된다고? 그럴 수 없는데. 그런데 엄마가 사과하면 나는 헷갈려, 그러니까.


해정이 다시 밥상 앞으로 돌아온다. 해정의 화는 실제 했던 것이 아니다. 헷갈릴 사과를 받을 바에는 차라리 화를 내지 않는 것이 낫다. 그러니.


해정은 또다시 스스로 마음을 삼키는 선택을 한다. 해정의 화는 단 한 번도 표출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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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遺傳)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해정과, 해정을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는 순영. 함께 걷던 와중, 해정은 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내어 순영에게 던진다. 순영도 그걸 받고 나서 다시 해정에게 던진다. 둘은 그것을 계속 주고받는다. 동글동글 꾹꾹 눌러 굴리기도 하고, 살포시 포물선을 그리며 던지기도 하고. 둘은 웃으며 그것을 한동안 주고받다가, 마지막으로 되돌려받은 해정이 잠시 그것을 응망하다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그것은 무엇일까. 해정이 순영에게 선물했던 작은 거울일까? 아니면, 해정이 순영에게 가지고 있는 애증의 감정 중 증오를 뺀 오롯한 애정일까? 해정은 순영에게 거울을 선물했다. 자신을 비추는 거울. 그 거울은 단순히 오랜만에 만나는 엄마를 위한 선물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 안에 비친 자신을 알아달라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순영과 가장 닮아 그녀의 유전병까지 간직한 것이 해정이기에. 자신을 비추던 거울을 엄마에게 주며, 엄마 속에 담긴 자신을 봐 달라고 말하는 것일 수도. 결국 극 마지막에 거울을 들고 바라보는 사람은 해정이다. 그 속에서 엄마를 닮은 자신을 보고, 엄마에게서 유전된 흔적을 보고, 결국 그 유전 속에 혼자 남은 자신을 보고.


이 극은 ‘유전병’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사실 해정과 순영의 관계성만 보자면 유전병의 소재가 느껴지지 않는다. 약을 먹고 있느냐고 묻지만, 이는 그저 모녀 관계에서 흔히 할 수 있는 걱정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오히려 해정이 순영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다른 것들이다.

 

어릴 때부터 아픈 엄마를 지켜줘야 했던 나의 힘듦, 그녀의 유전병까지 그녀와 가장 닮은 것은 나인데도 나보다 아빠를 사랑했던 것에 대한 서러움, 그 과정에서 비롯된 방치와 관계 단절로 말미암은 상처. 결국, 이 유전병에서 중요했던 것은 유전‘병’이 아니라 ‘유전’병이었던 것이다.


치유되지 못한 상처는 평생 마음에 남는다. 그것이 어렸을 때부터, 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더욱 깊숙한 곳에 자리 잡혀 있다. 제때 치료하지 못한 상처는 병이 된다. 상처를 준 사람이 진심으로 사과하더라도, 시간이 지나 부패하고 더 곪아진 그 상처가 바로 치유가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는 결국 부모에게로 화가 향한다. 내가 당신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얻게 된 병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롯이 비난할 수도 없는 처지다. 내 안에도 당신의 조각이 있기 때문이다. 나도 결국 당신의 유전의 산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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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



연극 <거울>은 ‘포도막염’이라는 독특한 소재에 가장 보편적인 정서를 감각적으로 녹여 낸 극이었다. 원인 불명임에도 평생 혼자 아픔을 감당해야 하는 ‘포도막염’이라는 소재에서 사회적인 함의가 느껴지기도 했다.

 

끝없는 병원 진료와 부작용이 동반할 수 있는 약에 대한 공포를 총을 맞는 것의 수준으로 표현한 것도 인상 깊었다. 특히 해정이 순영에게 묵은 감정을 쏟아낼 때의 감정 표현은 몰입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도 했다.


감정 표현의 연출뿐만 아니라 안무와 움직임의 연출도 매우 흥미로웠다. 움직임극을 전문으로 하는 극단 '정:지'인 만큼, 여느 연극과는 다르게 역동적인 안무와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극에 녹았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으며 의사의 말에 빨려 들어가는 장면이나, 해정을 옥죄어오는 약의 공포를 표현한 기괴한 Ugly Movement는 가히 그 분위기 전체를 압도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의 해정의 독무는 해정의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표현해 강렬한 마무리를 선사했다.


이렇게 다채로운 음악과 안무가 많은 연극은 처음이었다. 신선하고 강렬함과 동시에, 가족 관계에서 비롯되는 상처와 아픔을 정밀하게 비유한 <거울>. 과연 나의 거울 속에는 어떤 나의 유전이 담길지. 실제 극단에서 제공한 ‘거울’을 다시금 바라보며 극을 오래 곱씹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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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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