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늙어'가는' 것이 아닌 늙어'버린' 것에 대하여 [도서/문학]

글 입력 2022.11.0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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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이었다. 백세 인생에 고작 사분의 일 남짓한, 나에게는 평생이지만 여전히 어린 스물다섯의 삶 동안 ‘죽음’에 대해서만큼은 충분히 의식한 채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특히 졸업을 앞두고 불확실한 미래가 불안해진 올해는 자기 전 누워 하는 모든 고민의 끝이 ‘내일 갑자기 죽으면 어떡하지’와 같은 다소 무용한 질문이었을 정도로 ‘죽음’이라는 관념에 꽤나 심취해 있기도 했다.

 

어느 여름날 스스로가 ‘늙어버렸음’을 자각하고 충격에 빠진 한 저명한 학자의 이야기 속에서 나 자신에 대한 엄청난 깨달음을 얻고 한동안 얼이 빠지게 되었다. 죽음에 대해 고민한 수많은 밤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나의 ‘늙음’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큰 이변이 없다면 보통의 궤도를 따르는 나의 삶에서 그 종착지인 죽음을 맞기 전에, 나는 거의 반드시 ‘늙음’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당장 내일의 죽음이라는 아주 희박한 확률에 괜한 걱정을 하면서도 보다 현실적으로 노년의 나의 모습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졌다.

 

이러한 자각은 관망하는 태도로 책장을 넘기던 나를 보다 적극적인 독자의 위치로 재배치시켰다. 하지만 저자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차이는 여전히 그녀와 온전히 동화되어 작품을 감상할 수는 없는 한계가 되었다. 

 

‘늙는다는 것’은 인간의 숙명이자 우리의 삶 자체라고 생각했다. 서로 대척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것이 ‘삶과 죽음’의 모순적인 관계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끝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사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루하루 늙어가는 것이라 생각했고, 이러한 의견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기에 ‘리프팅’에 관한 저자의 서술을 볼 때까지도 순도 높은 공감의 시선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늙음’을 자각한 그 여름 전까지의 모든 리프팅을 노화에 대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견에 쉽게 동감하기도 했다. 나 역시도 불과 몇 년 전 사진 속의 내 얼굴과 거울에 비치는 내 얼굴 간에 존재하는 분명한 변화를 바라보며 조금씩 노화되고 있음을 깨닫곤 한다. 그러나 화장을 하는 것이 결코 노화를 감추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저 나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한 행위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여름, 내가 또 한 번의 리프팅 시술을 결심한다면 더 이상 전과 똑같은 이유 때문은 아닐 것임을 깨달았다. 그렇게 된다면, 그건 나이와의 정면 대결이 될 터였다. 나의 아주 작은 부분에만 영향을 줄 마지막 환상 같은 몸부림. 어차피 눈빛이며 행동거지, 목소리, 에너지 등 몸 전체를 리프팅할 수 는 없는 법이니까. (20p)
 

 

하지만 이어지는 담담하고 씁쓸한 고백은 이 책의 제목이 <내가 ‘늙어버린’ 여름>이 되어야 했던 이유를 비로소 깨닫게 해주었다. 그녀가 자신의 노화를 자각하고 우울해질 수 밖에 없던 이유는 늙는 것이 아닌 늙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늙어가는 인간의 숙명이 아닌 늙어버린 자신의 현실을 깨닫고 그 어느 여름 날 노화된 스스로를 인정하고 슬퍼해야 했다. 

 

노화는 서서히 진행되는 연속적인 과정이며 이를 구분하는 사회적 연령 체계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와 별개로 우리 스스로 자신의 노화를 인정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이, 또 이 과정이 다소 갑작스러우면서 새삼스럽다는 것이 괜히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분명 늙어가는 중이지만 늙어 버림은 여전히 한참 멀기에, 나의 늙음을 상상하며 형성한 저자와의 동질감은 다시금 유리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진행과 내 삶의 방향이 반대로 향한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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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업데이트’라는 단어는 일상의 언어가 되었다. 스마트폰이 현대인의 필수품이 되면서였을까, 어플리케이션도 나의 일상의 일부가 된 전자기기들도, 어쩌면 나의 육체와 영혼까지도, 나를 구성하고 있는 혹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정기적이고 꾸준한 업데이트가 당연해졌다. 이러한 업데이트가 일상에 장애가 되거나 스스로를 초라하고 서럽게 만들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그냥 다소 번거롭고 가끔 귀찮게 느껴지는, 그 정도에 불과했다.

 

 
소위 ‘업데이트’라고 하는 것이 나에게는 불안감을 조성하는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업데이트는 끊임없이, 시도 때도 없이 닥쳤고, 그럴 때마다 나는 새로 닥친 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으며, 그러니 그것들이 내 안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기도 어려웠다. (62p)
 

 

별 의식없이 행해왔던 수많은 업데이트들이 세상의 진보를 의미한다고, 업데이트의 주기가 빨라지고 횟수가 잦아진다는 건 그만큼 세상이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내가 별 무리 없이 업데이트를 행한다는 건 나의 삶이 세상의 진행과 같은 방향을 향해 가는 것을 방증한다는 것을 더 이상의 불편도 자극도 느끼지 못하게 된 뒤야 깨닫게 되었다.

 

비로소 나는 ‘업데이트’의 압박을 포착했다. 그 순간 나는 일상에서 심심치 않게 목격했던 꽤 많은 불편들이 떠올랐다. 키오스크와의 소통이 불가해서 끝내 뒤돌아서야 했던, 어플리케이션이 낯설어서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했던 누군가의 움츠러든 뒷모습이 그려졌다. 나에게는 그저 편의에 불과했던 모든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의도치 않은 상처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 강력한 통제력과 다를 바 없이 무심한 시선을 보냈던 스스로를 반성하게 됐다.

 

얼마 전 낯선 거리에서 지도 앱을 보며 열심히 걷고 있던 때가 생각이 난다. 평소라면 역시 초행길이라는 구실 좋은 핑계를 빌려 누군가의 난관을 쉽게 외면했을 터였다. 하지만 봉사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는 일말의 양심은, 완곡하다 생각했던 거절이 실은 냉혹한 회피였음을 지적했다. 단 일분, 아니 어쩌면 몇 초만의 정성만 있다면 나의 편리를 위한 기능을 곤란한 누군가에게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흉흉한 세상은 자꾸만 호의를 움츠리게 하지만, 아주 극소의 정성으로 내 안의 양심을 지켜내고 들었던 ‘고맙다’는 말은 그럼에도 세상이 아직은 그 따스함을 잃지 말기를 바라게 한다. 동시에 그 언젠가 쌓여가는 무게감으로 나를 버겁게 만들 업데이트의 압박을 떠올리게 한다. 나의 삶이 세상의 방향에서 이탈하려 할 때, 그 서러움을 과연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평균 수명 증가에 숨겨진 불편한 속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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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해서라면, 아주 간단하다. 한마디로 나는 죽음을 생각할 수 없으니까. 나는 어떻게 사람들이 분명 살아 있다가 갑자기 사라질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모든 것은 그대로일 것이라고, 가령 계절을 여전히 바뀔 것이고, 도시며 산, 바다도 계속 존재할 테고, 축하받을 일들은 계속 축하받을 것이고, 예술도 영속할 테지만, 그 사실을 증언해야 할 나, 나만 거기에 없을 거라니. (186p)
 

 

우스갯소리로 ‘100세까지 사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곤 했다. 완벽히 장난은 아니다. 그 속내에는 진실로 오래 살고 싶다는 소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은 ‘장수’ 자체를 바라는 것 보다는 사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했다. 따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생에서 분리된 내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그저 아무것도 아닌 ‘무’의 상태가 되리라는 원론적인 결론에 이를 뿐이다. 

 

나에게는 이 ‘무’라는 것 자체가 공포이다. 나의 존재를 인식할 ‘나’ 자체가 없다니.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 온전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 죽음 이후의 상태가 너무 두렵다. 완벽히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의 두려움은 자연스럽게 가능한 오래 살고 싶다는 소망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수많은 노인이 일정한 수준의 나이를 넘어서면,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삶의 질을 높이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의료 행위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리거나, 인간미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에파드EFPAD 양로원 신세로 전락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우리는 이처럼 우리의 생명을 연장해주는 ‘과학이 낳은 기적’ 소식에 마냥 기뻐해야 하는 걸까? (185p)
 

 

죽음이 두려워서 장수를 바라는 나의 꿈이 얼마나 단순하고 미성숙한 생각이었는지에 대한 수치가 밀려온다. 양적 수치에 매몰되어 질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태도가 어리석었음을, 언제나 과거는 아련하지만 미래는 불안할지언정 낙관적일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가 허황되었음을 자각했다.

 

스스로가 ‘늙음’을 진지하게 고려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다시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과학 기술의 발달이 낳은 수명의 연장에 박수를 쳤던 것일까? 평균 수명이 증가하였다는 것은 결국 노인이 된 상태론 더 오래 살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일 텐데. 이성적 판단과 진지한 태도가 결여된 지극히 낙관적이기만 했던 상상속에는, 결코 ‘늙어버린’ 내 모습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유례없이 높은 노인 빈곤율과 노인 자살률을 보며 한국의 불완전한 사회안전망을 비판하곤 했다. 추운 날씨에 폐지를 줍는 노인분들을 보며 노인들에게 보다 쾌적한 일자리와 안정적인 삶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지독한 가식에 불과했음을 인정한다. 단 한번도 진정으로 그들의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다. 연민의 시선에는 결코 그것이 나의 미래가 되리라는 상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야 비로소 그들의 외로움과 서러움을 진심으로 공감하기 시작한다. 단순히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삶의 의미를 긍정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아주 미세한 부분일지언정 이 세상에 보탬이 되고 있다는 자부심이 필요하다고, 따라잡기 어려운 세상의 발전 속도에 하루하루 도전하고 있다 해도 결코 그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외치고 싶다.

 

 

 

상실감은 사랑이 지나간 자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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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관론은 상실에 대처하기 위한 수단이자 상실을 길들이고,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황당함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인 셈이다. 요컨대 버림을 받기 전에 내가 먼저 버리는 것이다. (45p)
 
 
상실감이란 곧 버림받는 데 대한 두려움이다. (46p)
 

 

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나는 첫 죽음을 목격했다. 기억나는 순간부터 나의 모든 유년을 함께했던 두 살 터울의 오빠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갑작스레 생긴 오빠의 빈자리와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부모님의 슬픔을 보며, 머릿속에 정립되는 개념보다도 먼저 온 몸과 마음으로 ‘죽음’과 ‘상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슬픈 것이겠지만, 어린 날 온 가족의 비극이 되었던 소중한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한 것은, 실로 엄청난 충격으로 자리잡았다. 어쩌면 답지 않게 시니컬한 태도를 가지며 성장기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유달리 ‘죽음’을 의식하게 된 배경에도 그 영향이 존재했던 것도 같다.

 

누군가는 이러한 내 모습이 순수하지 못하다고 비난할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꽤 오랜 시절부터 나는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 계산적인 태도를 고수했던 것 같다. 남들에게는 크게 인간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것처럼 나를 포장하곤 했지만, 사실 이는 철저하게 나의 방어 기제였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상대가 같은 크기의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을 때, 내가 준 것에 비례하는 사랑이 되돌아오지 않을 때,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대상이 갑자기 사라져버릴 때 느껴지는 공허함과 허무함이 무서워 미리 겁을 먹고 도망쳤던 것이다.

 

 
나에게는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 되어주었던 그 시절 이후 그 아이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라고는 한 장도 없다. 나는 애정과 공감이 충만했던 그 몇 년의 시간이 물처럼 흘러가는 광경을 그려보면서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했던 존재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에 목놓아 운다. (197p)
 

 

사실 남들에게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솔직한 내 모습은 잔 정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다. 한 때는 사소한 지우개 하나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도 크게 속상함을 느꼈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좀 더 어린 시절에는 사물에도, 사람에도 최대한 정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무언가 내 마음속에 공간을 차지할 때, 그 크기가 크면 클수록 빠져나갔을 때의 빈자리를 견디는 것이 더욱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사랑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상실감이 무서워 피하기에는 내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모든 사랑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여전히 누군가를 잃는 것도,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순간도 무섭지만, 단순히 ‘현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존재감을 느낀다. 죽음 이후에 인간 존재가 완전히 소멸했다고 할 수 없는 그 근본에 사랑이 놓여있는 건 아닐까. 우리의 존재가 ‘관계’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면, 이 삶 동안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그로 인한 ‘상실감’에 충분히 아파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책을 읽던 와중에 들은 비극적인 소식은 ‘늙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무겁게 만든다. 훗날 있을 나의 늙음을 걱정하는 것조차 어쩌면 배부른 소리는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든다. 함께 늙어갔어야 할 백 오십 여명의 청춘을 생각하면 그저 아프고 미안할 뿐이다.


 

[김소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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