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현서씨, 하고 불렀다 [사람]

이슬아 <가녀장의 시대>를 읽고
글 입력 2022.11.05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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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부터 가녀장이 되었는가.


이슬아 작가의 장편소설 '가녀장의 시대'를 읽고 떠오른 의문이다.


아마도 내 몫의 수입이 생겨난 시점부터였을 테다. 학자금 대출의 도움으로 홀로 뛰어든 대학 생활 동안 학과 내 근로 활동을 이어나가며 경제적 독립을 선언했다. 그 무렵 나는 동생과 둘이 자취를 시작했다. 매달 빠져나가는 월세는 만만찮았고 삼시 세끼 따뜻한 밥과 잔소리를 늘어놓던 엄마의 부재가 크게 느껴졌다.


우연한 기회로 입사한 직장에서 벌어들인 수입은 나를 가녀장으로 등극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집안 중대사의 최종 승인 단계에 서게 된 것이다. 가녀장으로서 막중한 책임을 느끼게 된 재작년 봄, 엄마의 건강은 온통 적신호였다. 무릎부터 허리 수술까지 엄마에게도 내게도 힘든 나날이었다. 마침 퇴직금이 넉넉했고 실의에 빠진 엄마를 북돋우며 나는 그녀의 보호자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보호자가 된다는 것은 책임감이 따르는 일이었다. 순전히 경제적 책임에 그치지 않고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바라보는 심경이 되었다. 엄마에게 나는 여전히 생떼 부리던 어린아이에 멈춰있겠지만, 내게 엄마는 더 이상 무섭기만 한 존재가 아니었다.


“허리가 너무 아파. 무통주사 한 번만 맞을게.”


거동이 불가능해 종일 침대 위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던 엄마는 내게 허락을 구했다. 고통을 인내하는 얼굴에 마음 아픈 것도 잠시, 문득 생각한다. 무통주사가 얼마였더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엄마 말마따나 야비했다. 수술 후유증에 힘들어하는 사람을 두고 돈으로 환산하려 한 것이다. 그 사이 원무과에 나의 몫으로 달아놓은 병원비는 불어나고 있었다. 내가 감히 엄마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안정을 되찾는 대가가 돈이라면 어느 정도의 고통까지 용인되는 것일까. 한 집안의 장(長)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야비한 일이구나.


감히 그렇게 생각했었다. 내가 이 가정을 떠받치고 있다고.


소설의 주인공 ‘슬아’는 물론 나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경제력을 지녔다. 그럼에도 지출은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가녀장의 역할은 버르장머리도 없고 야박한 군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였다. 소설 ‘가녀장의 시대’를 읽으며 감탄한 것은 바로 그를 따르는 모부의 태도 때문이었다. 이토록 쿨하고 따뜻한 가족이 있구나, 신기했다.


소설의 주 무대가 되는 낮잠 출판사에는 슬아 이외에도 두 명의 직원이 있다.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복희'와 '웅이'였다.


복희는 음식을 했고 웅이는 청소를 한다.


두 사람은 작가의 모부 되시겠다. 어머님, 아버님 하는 호칭 대신에 복희씨-, 웅이씨- 하고 부르는 장면들이 처음에는 어색하게 느껴졌다. 내게 아직 유교적 잣대가 남아 있는 것일까. 복희씨- 하고 부르면 그저 복희를 복희 그 자체로 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복희는 된장 출장 중 - p93’은 복희가 친정어머니와 함께 쑨 된장이 그들의 저녁 식탁에 오르게 되기까지를 소개한다. 작가는 복희의 된장을 좋아했다. 비록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그녀였지만 말이다. 소설의 끄트머리쯤 다다랐을 때, 나 역시 작가처럼 혼란에 휩싸였다. 가부장의 실패를 가녀장에서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복희가 출판사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무보수로 수백 번의 식탁을 차리고 치웠다. 시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의 대가였을지는 모르지만 분명 정당하고 즐거운 일은 아니었을 테다. 치워버리면 그뿐인 밥상을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복희는 뜻 모를 회의감에 젖게 된다.


나는 현재 가족 누구와도 함께 살지 않지만 냉장고를 가득 차지하고 있는 각종 김치들은 엄마의 손에서 탄생했다. 혼자 사는 딸의 끼니 걱정을 매일같이 했다. 저번 금요일에는 내가 좋아하는 파김치와 깍두기가 도착했고, 이어서 어제는 갓김치와 배추김치 등이 김치냉장고 한편을 차지하게 되었다.


[김치 보냈다. 금요일 이전에는 도착할 거야. 바로 넣지 말고 하루쯤 익혔다가 김치냉장고에 소분해서 넣어. 바로 꺼내 먹을 수 있게.]


응, 알겠어. 이틀에 한 번꼴로 밥은 먹었냐며 전화를 걸어오는 엄마에게 나는 ‘김치 잘 먹을게.’라는 말은커녕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엄마의 김치는 그토록 당연한 것이었다.


 

복희가 죽으면 어떡하지? 그것은 슬아의 오랜 질문이다. 복희는 영원히 살지 않을 텐데, 복희가 죽으면 된장은 누가 만들 것인가. 중년이 된 슬아가 노년이 된 복희로부터 된장을 전수받을 것인가. 아니면 마트에서 파는 된장을 사 먹으며 엄마와 외할머니를 그리워할 것인가. 그러다 목이 메어 눈물을 훔칠 것인가.

 

- ‘복희는 된장 출장중’ p98-98

 


나 역시 가끔 생각해 본다. 엄마가 없으면 어떡하지? 김장은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김치를 사 먹어야 하나? 다른 김치는 먹기 싫은데. 그러다가 설명하기 힘든 감정에 파묻혀 한바탕 펑펑 울며 잠들기도 했다.


인생을 스스로 책임져야 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어째서 그녀의 된장을, 김치를 꽉 붙잡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내 몫의 김치를 더하기 위해 허리를 혹사하며 담갔을 김장 노동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엄마도 복희처럼 영원하지 않으므로, 좀 더 엄마의 김치를 바라는 게 괜찮지 않을까 하며.


소설은 세 가족의 평범한 일상을 이어나간다. 단지 사장님은 딸, 직원은 모부라는 고용관계가 더해져 이토록 재미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복희씨는 꽤나 귀엽다. 책으로 처음 뵙게 되었지만 독자인 내게도 그녀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전달되었다.


나 역시 작가처럼 엄마에게 지적 아닌 지적을 하는 편인데 복희와 달리 엄마는 웃다가도 질색했다. 그래 너 잘났어, 정말! 하고 말이다.


별로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려 한 것은 아니었는데. 엄마는 가끔 내가 자식이 아니라 딱딱한 상사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스스로 인생을 책임지게 된 이후부터 엄마를 대하는 태도가 어딘가 비뚤어진 느낌을 받는다. 어느 정도 공감한다. 살가운 성격이 아닌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곤 애정을 핑계 삼아 던지는 지적들뿐이었다.


가정을 돌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은 주인공 ‘슬아’와 같은 가녀장이 되려면 한참 멀었다. 나는 여전히 모부에게 몸도 마음도 의지하고 있다. 계속해서 홀로 서기 위해 노력하지만 혼자가 될까 봐 두려워하는 모순을 품는다.


소설 속 가녀장과 나의 다른 점을 꼽자면 나와 모부는 고용관계가 아니다. 딱딱하고 무정한 상사 역할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만약 회사를 개업하게 된다면 나의 모부를 고용하여 일을 시킬 수 있을까. 아직은 숙제와도 같은 일들이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한 것은 가녀장의 역할이 중요하겠지만 그를 따르는 가족들의 태도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가녀장을 인정하는 태도 말이다. 웅이는 친구들 앞에서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사장님이자 제 딸인 슬아를 존경했다. 가녀장으로서 고군분투하는 슬아는 멋진 여성이 분명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만드는 웅이 역시 멋진 직원이자 아버지였다. 가녀장의 이야기가 궁금해 읽어본 이야기에서 나는 다시 한번 가족의 힘을 느낀다.


언젠가 엄마와 내가 서로를 인정하며 각자의 삶을 존중하는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면, 나는 엄마를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 날이 온다면 엄마 대신에 감히 불러봐도 되지 않을까.


현서씨- 하고 부르면 돌아볼 얼굴이 궁금하다.

 

 

[이보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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