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밤의 세계를 함께한 우리 - 뮤지컬 '오즈의 의류수거함' [공연]

조금만, 더 조금만 용기를 내 봐
글 입력 2022.10.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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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마법사가 익숙한 당신은 ‘오즈의 의류 수거함’이란 제목에 갸우뚱할지도 모른다. 혹은 패러디에 반가웠을지도.

 

‘마법사’가 ‘의류 수거함’이란 단어로 치환되었으니, 의류 수거함은 필히 마법사처럼 마법을 부리는 존재일 것이다. 마법같은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매개이지 않을까.


위와 같은 가설을 세운 채, 온갖 공연들로 가득 찬 대학로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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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공연은 제3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오즈의 의류 수거함>을 뮤지컬화 한 것으로, 외롭고 소외된 사람들의 밤을 그려냈다. 보통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낮의 세계가 중심인데, 밤의 세계에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 독특한 요소이다. 주인공 도로시는 내내 교복을 입고 있지만, 낮의 ‘학교’ 공간이 아닌 밤의 ‘거리’와 더 가까운 인물이다.

 

도로시는 외고 시험에 불합격한 뒤, 자살을 생각했던 학생이다. 그러던 도로시에게 눈에 띈 동네 의류 수거함. 그는 매일 밤 의류 수거함 속 헌옷을 빼내어 빈티지 옷 가게를 운영하는 마녀에게 팔아넘긴다. 경찰에게 들키지 않도록 치밀하게 밤의 업무를 진행하던 도로시는 노숙자 ‘숙자’ 씨를 만난다. 숙자 씨와 함께 일하기로 한 도로시는 높은 꼭대기 층에서 가게 ‘숲’을 운영하는 마마를 소개받는다.


한편 도로시는 의류 수거함에서 일기장을 발견한다. 일기장 속 내용은 온통 자살 기도.

 

도로시는 이 일기장 주인의 정보를 차근차근 모은다. 글씨를 잘 쓴다, 수상 경험이 많다, 지금 죽고 싶어 한다…

 

일기장엔 이름조차 적혀있지 않아, 일기장 주인의 이름은 의류 수거함 번호를 본떠 195가 된다.

 

한때 자기 모습과 겹쳐보인 도로시는 195를 살리기로 마음 먹고, 숙자 씨, 마마, 마녀는 한마음 한 뜻으로 195 살리기 프로젝트에 동참한다. 이 이야기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낯선 타인에게서 위로를 받는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서로를 보듬고, 이해하고, 비로소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다.

 

 

혼자였던 너와 내가 만들어낸 기적

나에게도 다가와 우리가 되어줘

조금만 더 조금만

용기를 내 봐

내일 넌 오늘보다 빛나

밤의 세계를 함께한 우리

 

- 뮤지컬 넘버 중

 

 

2022년 경기문화재단 경기예술지원 기초예술창작지원 사업에 선정된 ‘오즈의 의류 수거함’은 쇼케이스 당시 “탄탄한 내용 구성과 가슴을 울리는 넘버, 감동적인 연기”로 호평받았다. 등장인물 간의 관계성이 무척 빛나는데, 탄탄한 내용 구성에 캐릭터 간 얽힌 플롯이 큰 역할을 했다.

 

마마의 아들은 현재 ‘숲’으로 운영되고 있는 곳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도로시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 한 켠에 묻어둔 채 호주로 가겠다는 희망으로 살고 있으며, 195는 자살만을 바라보며 철저히 준비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과거, 스스로의 목숨을 끊겠다고 결심한 과거, 그리고 현재의 사람들. 그러나 이들이 정말로 원한 것은 더 깊은 심연 속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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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가 쓰레기통이 아닌 의류 수거함에 일기장을 버린 이유는 뭘까. 그에게 자살은 모순이었을 것이다.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치부. 그러나 들통나고 싶은 진실. 그에게 아픔은 분리배출 되거나 소각 따위로 없애고 싶은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든 수거되고 싶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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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의류 수거함>에 더욱 몰입할 수 있던 요소는, 디테일한 소품과 연출이었다. 최근 내가 감상한 공연 대부분은 무대 연출이 빈약하여 몰입을 깼다.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배경으로 진행되거나, 캐릭터를 전혀 살릴 수 없는 뚱딴지 같은 의상을 입힌다거나. 공연의 분위기를 잘 드러내는 소품이 단 한 개도 없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 공연은 꼼꼼했다. 작은 무대 공간이었지만, 알차게 활용하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였다.

 

숙자 씨는 노숙자이지만, 패션을 잘 아는 인물로 나온다. 본인의 패션 철학이 확고한만큼 무척 멋에 신경 쓰는 캐릭터인데(이름이 숙자인 점도, 노숙자라고 아무거나 막 걸치는 줄 아냐는 대사도 전부 웃음 포인트였다), 이러한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트렌치코트와 어울리는 갈색 슈즈를 신고 나왔다. 와중에 한쪽은 샌들, 한쪽은 구두로 짝짝이인 모습을 보며 극 중 캐릭터 성격과 현실성 사이에서 적절한 줄다리기를 했음이 눈에 띄었다.


마마의 가게, ‘숲’은 각각 하나의 나무 같은 등장인물이 자라고 모여 숲을 이룬다는 메타포를 가진 공간이다. 무대 오른 편에 ‘숲’이라고 적힌 네온사인이 환하게 켜질 때가 있었는데, 그 때는 늘 등장인물들이 ‘숲’을 이루는 나무의 모습과 같을 때였다. 즉, 성장하고 자랄 때 네온사인이 환하게 켜져 무대 한 켠을 밝혔는데, 소소한 장치였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극의 호흡을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왔다.

 

‘죽음’이나 ‘자살’은 누군가에게 부정적이고 어려운 주제로 다가갈 수 있지만, 오즈의 의류 수거함은 이러한 주제를 유쾌하고 긍정적으로 풀어낸 연극이었다. 세 주인공은 ’죽음’이라는 가장 아픈 과거를 공유하며 서로가 서로를 끌어주며 연대하고, 결국 죽음의 의지를 삶의 의지로 바꾸는 기적을 만들어낸다.

 

극의 마지막에서 195는 더이상 숫자가 아닌, 자신의 이름 ‘차준호’로 불린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장면에서 난 비로소 195, 아니 차준호가 자신의 아픔을 완전히 수거하였음을 느꼈고, 덩달아 벅찼다.


이들과 밤의 세계를 함께 할 수 있어 기뻤다.

 

 

[권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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