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3년 만에, 다시 축제다운 축제로 1 – 2022 부산국제영화제

글 입력 2022.10.23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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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부터 내심 기다리게 되는 것들이 있다.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 누군가와의 만남, 지난 연말 계획했던 목표를 1년에 걸쳐 이뤄냈을 때 뒤따라올 결과에 대한 보상 등. (물론 매년 세우는 이런 거창한 연초 계획은 늘 지켜지지 않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어떤 행사보다도 자연히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이 있다면, 단연 10월에 있을 ‘부산국제영화제’다.


매년 상반기에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과 칸영화제 수상식을 거치고 나면 부산영화제를 향한 갈증의 마음은 더욱 부풀어 오르고 만다. 올해는 과연 어떤 작품들이 상영될까,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는 볼 수 있으려나, 좋아하는 감독의 신작이 초청되면 좋겠다, 따위의 생각을 하염없이 하고 있노라면 어느덧 한 해의 절반이 훅 지나가 있다. 그로부터 두세 달간은 무더위에 지쳐 붕 뜬 마음과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눈 감았다 뜨면 벌써 9월이었다.


9월은 부산국제영화제를 준비하는 일종의 의식적인 기간에 가깝다. 공개된 상영작들을 훑어보며 보고 싶은 작품을 몇십 개 정도로 추리고, 몇 단계에 걸친 상영 계획표를 짜고, 숙소를 예약하고, 예매권을 사들이고, 티켓팅(전쟁)에 참가하고, 그러다 보면 한 달은 쏜살같이 흘렀다. 어느새 10월로 넘어간 달력에 맞춰 나는 부산행 기차를 타고 있었다.

 

올해는 예년과 다르게 금요일 일정이 끝나고 바로 기차에 몸을 실었다. 보통 때처럼 주말 새벽에 출발하는 기차를 탔다면 올해는 이벤트 할인 혜택까지 받아 4만 원 가까이 기찻값을 절약할 수 있었을 테지만, 급작스럽게 계획을 변경한 건 부산으로 떠나기 약 일주일 전이었다.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심야 상영 영화를 보기 위해서. 3년 만의 부산국제영화제 정상 개최와 함께 부활한 ‘미드나잇 패션’은 자정부터 공포/스릴러 장르의 영화 세 편을 연속 상영하는 프로그램이다. 말 그대로 ‘무비올나잇’인 셈. 지난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의 심야 상영 관람이 꽤 좋은 기억이 남아있어서 더욱 마음이 끌린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와 핑곗거리야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었다. 장르물을 꽤 좋아하는 편이라서, 평생을 올빼미족으로 살아온 만큼 밤샘 정도야 특출나게 자신이 있어서, 기대작이 포함되어 있어서, 가격이 저렴해서 등등···.


그러니까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주말 새벽 열차를 타고 4만 원을 절약할 것인가, 아니면 금쪽같은 할인 혜택을 포기하는 대신 무비올나잇을 만끽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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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은 나의 지갑 사정과 다음 날 몹시 피곤할 것이라는 점을 들어 전자를 부르짖었고, 그의 단짝인 감성은 내게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였다. 부산에서의 금요일 밤, 자신들의 새벽을 기꺼이 내어준 이들과 하루의 끝과 시작을 영화로 함께한다는 건 얼마나 낭만적인지! 평생을 감성주의자로 살아온 나로서는 5분 정도를 고민한 끝에 결국 주말 열차를 취소하고 금요일 밤 기차를 예매할 수밖에 없었다.


당일 기차를 타고서는 정신없이 잔 기억밖에 없다.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서는 졸리지 않아도 잠들어야 했다. 다행히 만반의 준비로 목베개까지 챙겨간 덕에 잠 한 번 깨지 않고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졸린 눈을 뜨며 부스스 일어나니 부산 도착까지는 약 10분이 남아있었다.


기차가 10분 조금 넘도록 연착된 탓에 도착하고서부터는 눈코 뜰 새 없이 움직였다. 부산역에서 숙소로 이동해 짐가방을 던져놓고 나오니 영화 상영까지는 약 20분 정도가 남아있었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버스정류장까지 찾아가 오매불망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당최 이곳에 택시가 다니긴 할까, 싶어질 정도로 인적 하나 없는 컴컴한 거리 위에서 절망적인 심정으로 카카오T를 켰다. 몇 번의 호출 끝에 기적적으로 잡힌 택시는 4분 뒤 도착한다고 했고, 그제야 숙소에서 체크카드를 챙겨 나오지 않았음을 깨달은 나는 우사인 볼트 빙의해 미친 듯이 숙소 계단을 뛰어올랐고, 다행히 도착 예정 시간에 맞춰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택시를 탈 수 있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15분 정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도착 예정 시간을 검색했다. 영화의 전당, 11시 56분 도착 예정. 자정까지는 4분 정도의 여유가 있었지만,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영화의 전당을 향해 뛰어가는 몇 분 뒤 내 모습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조마조마했다. 문득 이렇게까지 개고생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 간절한 마음만큼이나 영화의 오프닝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영화 상영 중간에 들어가 주변 관객의 감상을 방해하는 일은 더 최악이었다.


이런 내 쪼들리는 마음을 읽으신 모양인지 기사님은 도착 예정 시간보다 몇 분이나 더 일찍 나를 목적지에 내려주셨다. 나는 연신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극장가에 도착해 화장실을 들른 뒤 허겁지겁 자리에 앉으니 영화 시작까지는 약 1분을 남겨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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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지나간 4박 6일간의 시간은 섬광처럼 느껴진다. 첫째 날 부산에서의 심야 상영 관람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온 시각은 동이 틀 무렵이었다. 마음만큼은 새하얀 침대에 누워 몇 시간이고 잠을 청하고 싶었으나 내게는 오전 9시에 봐야 할 영화가 있었다.


밤을 꼴딱 새우고 오전 영화를 보러 간다는 건 분명 무리한 일정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해당 작품을 볼 수 있는 날이 당일 오전밖에 없었고 관심 있는 감독의 신작이기도 하여 어쩔 노릇이 없었다. 나는 또다시 개고생을 감내해야 했다. 그렇게 숙소에서 할 일을 끝마치고 충혈된 눈을 비비며 다시 영화의 전당으로 돌아와 온종일 4편의 영화를 관람했다.


자정부터 시작해 늦은 저녁 시간 진행되는 야외 상영까지 총 7편의 영화를 관람한 날. 이 말도 안 되는 끈기와 오기는 영화제에서만 발휘되는 특출난 능력 같은 것이 틀림없었다. 다시는 못 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왠지 모르게 다음 영화제에서도 심야 상영 관람을 포기하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 조명, 온도, 습도, 이불까지 챙겨온 이들의 철저함, 쿨쿨 잠들어버린 관객들의 모습, 영화가 끝난 뒤 다 함께 아침을 맞으러 나가는 우리는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수시로 눈꺼풀이 감기고 정신이 멍해져도 분명 ‘미드나잇 패션’을 다시 찾으리라는 확신은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얻은 수확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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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총 18편의 영화를 관람했다. 4박 6일간의 여정 중 하루 평균 3편을 관람한 셈이다. 첫날을 미친 듯이 영화, 영화, 영화로 불태우고 난 이후로는 체력이 달리기도 하여 느슨하게 계획을 짜도록 노력했다. 친한 친구들과의 약속으로 저녁을 통째 비워두는 날도 있었고, 평소 영화로 알고 지내던 지인들과 만나기 위해 오후 영화 한두 개를 포기하기도 했다. 첫날을 조금 더 여유 있게 보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지만, 1일 7영화는 한 번쯤 경험해본 것으로 만족한다.


작품에 대한 만족도는 어땠냐 하면, 아쉽게도 예년만큼 마음에 쏙 드는 영화를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2021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나보았던 당해 황금종려상의 주인공 <티탄>에 이어 올해의 수상작 <슬픔의 삼각형> 역시 무척이나 만족스럽게 본 것은 개인적으로 의미 깊다. 또 지난 8월 개봉한 영화 <베르히만 아일랜드>로 단숨에 나를 사로잡았던 감독 미아 한센-러브의 신작을 이번 영화제를 통해 만나볼 수 있었다. 좋아하는 감독의 신작에 평소 눈여겨보던 배우들이 등장한다는 건 또 다른 즐거움이고 말이다.


이와 더불어 영화 <프란츠>(2016)로 나를 하염없이 매료시켰던 감독 프랑수아 오종의 신작을 이번 영화제에서도 만나보아 기쁘다. 2년 전 오종 감독의 신작으로 <썸머 85>라는 영화를 야외 상영으로 관람한 적이 있는데, 아직도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있다. 손발이 덜덜 떨릴 정도로 너무 추웠기 때문이다. (역시 개고생이 더 기억에 남는 법이다) 그날 밤의 공포 이후 야외 상영이 있는 날이면 꼭 전날부터 날씨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부지런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오종 감독의 신작은 매년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에서 주로 만나볼 수 있다.


아울러 거장들의 영화로 소개된 노아 바움백의 <화이트 노이즈>, 제임스 그레이의 <아마겟돈 타임>부터 국제영화제 수상작으로 주목받은 루카스 돈트의 <클로즈>, 알리 아바시의 <성스러운 거미> 등 다수의 화제작을 만나볼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 외에 인상 깊게 본 작품이 있다면 피에트로 마르첼로의 <스칼렛>, 엠마누엘 무레의 <어느 짧은 연애의 기록>, 안나 카제약의 <빌어먹을 휘게> 정도를 언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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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관람하지 못했지만, OTT나 극장 개봉을 통해 접한 작품들도 있다. 예컨대 리티 판의 <에브리씽 윌 비 오케이>라는 영화는 올 9월 개최되었던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통해 미리 만나볼 수 있었다. 비슷한 제목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부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마침 개봉일이었으므로 영화제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복귀 이틀 만에 극장가로 달려가 관람할 수 있었다.


또 애플TV+ 오리지널 작품에 해당하는 <레이먼드 & 레이> 같은 경우, 지난 21일 해당 OTT를 통해 공개된 바 있다. 늦잠을 자느라 놓쳤던 알랭 기로디 감독의 <노바디즈 히어로>는 11월 개최될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에서 만나볼 예정이다. 끝으로 12월 개봉 예정이었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신작 <본즈 앤 올> 역시 11월 30일 개봉으로 앞당겨져 연말까지는 부산국제영화제의 흔적을 열심히 쫓아다닐 예정이다.


부산에서의 관람을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워서일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이라는 타이틀은 알게 모르게 간질간질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이상하게 관람 욕구가 불타오른다고 해야 하나. 물론 이것이 작품을 보는 부산영화제의 안목과 그를 향한 신뢰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나는 안다. 당해 상영작들을 클리어하겠다는 마음으로, 열정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건 꽤 괜찮은 일이 아닌가 매년 생각한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정신없는 일상을 보내다 보니 벌써 11월이 다가오고 있다. 시간은 어찌나 이렇게 빨리 가는지 영화제에서 보낸 시간이 벌써 아득하게만 느껴져 야속할 따름이다. 부산에서의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 긴긴 여운을 떠나보내기 위해서는 오로지 글로 남기고 기록하는 법밖에 없겠지. 지면이 길어진 관계로 올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금쪽같은 작품들에 대한 소개는 다음 글로 미루도록 한다. 아무쪼록 내년에 보자,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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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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