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현대미술을 욕하는 당신에게 [미술/전시]
-
"솔직히 현대미술이 왜 가치 있는지 잘 모르겠어."
종종 현대미술 전시를 보러 가자고 물으면 듣는 말이다. 비단 이 친구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내게 이렇게 묻는다. 현대미술 그거, 이해가 안 된다고.
그래서 이 글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최우람 작가의 '원탁'을 중심으로 현대미술의 의미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머리가 없는 밀짚 인간들, 거대한 검은 원탁, 그 위에 올라간 작고 볼품없는 지푸라기 머리.
모두 최우람의 작품 '원탁'을 이루는 요소다. 이 작품은 정적으로 머물러있는 설치물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그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머리가 없는 지푸라기 인간들은 원탁 한 가운데, 위태롭게 존재하는 단 하나의 '머리'를 소유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또 욕망한다. 한 지푸라기 인간이 머리를 온전히 소유하기 위해선 몸을 기울여 머리를 가져와야만 하는데, 여럿의 지푸라기 인간이 함께 짊어진 원탁으로 인해 소망이 이루어지기란 쉽지 않다.
갈망하는 머리가 단 하나라는 것, 그것은 다른 지푸라기 인간이 머리를 가져가 버리는 순간 자신에게 돌아올 머리는 없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최우람 작가는 이런 점을 꼬집어 작품 속에 녹여냈다. 한 지푸라기 인간이 몸을 기울이고 싶어도, 양옆의 지푸라기 인간들이 일어나버리면 강제적으로 자신도 일어나버리게 된다. 이로써 지푸라기 인 중 그 누구도 갈망하던 '머리'를 얻지 못한 채, 무한한 짊어짐만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
사실 이 작품의 진가는 작품 그 자체로 완성되진 않는다. 오히려, 이 작품이 불러오는 여러 질문과 작품을 둘러싼 사람들로부터 완성된다.
최우람 작가의 '원탁'은 현대사회의 무한경쟁을 날카롭게 지적한 작품이다. 지푸라기 인간들 중 누구도 소망을 이루지 못했으나, 무의미한 무한 경쟁만을 반복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작품의 의미를 더하는 것은 작품을 보러 온 사람들이다. 해당 작품은 매 시간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시간에만 작동하기 때문에 지푸라기 인간들의 원탁을 지켜보려면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있다. 그 대기시간 동안 사람들은 빽빽하게 해당 작품을 둘러싸고, 곧이어 시작된 지푸라기 인간들의 사투를 관람하게 된다.
무의미한 몸부림을 이어 나가는 지푸라기 인간들을 지켜보는 관찰자의 시선, 이건 마치 무한경쟁 사회를 지켜보는 '다른 누군가'를 상상하게 하지 않는가.
이뿐만 아니다. 작품은 원래 구조대로라면 중앙의 머리는 절대 떨어지지 않고, 검은 원탁 위를 유영해야 한다. 하지만 종종 머리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런데도 그 누구도 작품을 욕하지 않는다. 그 대신, '떨어진 머리'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의견들이 무궁무진하게 뻗어 나왔다. 누군가는 작가의 의도에 대해 이야기했고, 다른 이는 갈망의 대상인 '머리'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야말로 작품 하나가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불러일으킨 모습이다.
이처럼 현대미술의 의미란, 작품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이를 관람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작품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예술가들은 사람들로 인해 비로소 완성되는 작품을 만들고,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의아함이든, 불만이든, 혹은 다른 수많은 감정들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의 본질이 '질문'과 '소통'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으로서, 현대 미술이야 말로 예술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분야가 아닐까 싶다.
[최현서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