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여러 개의 진실을 찾는 일 -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글 입력 2022.10.17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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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_표1 띠지.jpg

 

 

무엇을 믿을 수 있을까



 
어떤 진실은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진실은 삶을 갈기갈기 찢어서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_364쪽
 


비밀을 품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때로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자기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 그런 마음을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법의 잣대로 논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의 판옌중은 변호사로, 명확한 법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다. 오래된 친구의 아들이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되어 법률상담을 해주고 돌아오던 어느 날, 아내인 우신핑이 사라진다. 판옌중이 아는 대로라면 신핑은 따로 만나는 친구도 없는 데다가 부모는 이미 사망했다. 그러나 아내의 흔적을 좇으며 하나씩 알게 되는 아내의 조각들은 그가 알고 있던 것과는 너무 다르다. 법률의 세계에 살던 그가 이제 마주해야 하는 것은 법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거대한 무질서와 이상하게 작동하는 마음, 그리고 한 사람의 삶을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비밀이다.


소설의 중심이 되는 건 판옌중이 갑자기 사라진 아내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서술자는 초반에 판옌중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초점이 맞춰지는 인물은 계속 변한다. 그럴 때마다 독자가 깨닫는 것은 무엇도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 인물의 관점에서는 당연하고 합리적이었던 일이 다른 인물의 관점에서는 수상쩍고 이상한 일이 된다.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은 연기처럼 사라진 우신핑만이 아니다. 남편인 판옌중도, 신핑의 오랜 친구 오드리도, 신핑의 고향 마을에 살고 있는 쑹화이쉬안의 가족도. 책을 읽어나갈수록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간다.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라는 제목은 그래서 역설적이다.

 

 


피해자 같지 않은 피해자들에 대하여


 

 
몸이 떨렸다. 우신핑이 성적인 폭행을 당했던 사람처럼 보인 적이 있었던가? 그런데 어떤 모습이어야 그런 사람처럼 보이는 걸까? _192쪽
 


한 명의 사람에게 여러 가지 모습이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상황에 따라, 함께하는 사람에 따라 같은 사람이어도 완전히 다른 얼굴을 보여주곤 한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이 사실이 피해자, 특히 성폭력 피해자에게는 예외로 여겨질 때가 많다. 피해 당시 입은 옷이나 음주 여부가 피해자를 비난할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는 이제 비교적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가 평소 가해자를 짝사랑했다면, 사건 직후 그와 웃으며 대화했다면, 심지어 범행 이후에도 오랜 시간 그와 깊은 유대관계를 유지했다면 사람들은 피해자를 얼마나 믿어줄까.

 

강력한 스포일러이기에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에는 전형적이지 않은 다양한 얼굴의 피해자가 등장한다.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인물이지만 그 면면은 우리가 무의식중에 갖고 있는 피해자의 모습과 전혀 들어맞지 않기도 하고, 독자 입장에서 피해자임이 명백한 인물은 자신을 피해자로 정의하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여러 얼굴 사이를 오가며 드러나는 것은 ‘피해자의 얼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인정하기 어렵지만 어떤 성폭력 피해자는 고통받는 와중에도 가해자에게 깊은 애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더불어, 소설은 피해자들의 연대는 언제나 정의롭고 피해자에게 도움이 되는지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연대는 많은 일을 해결해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미투 운동이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건 수많은 이들의 연대 덕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람들 간의 연대가 지나치게 신성시되고 거기에 의존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국가와 사회가 제 몫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선의로 한 일이 꼭 그에 맞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진실을 알아가는 일이 고통스럽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 상처받는 사람이 생기는 것처럼, 선의는 종종 벼린 칼이 되어 선의를 베풀고자 한 자를 향한다. 이 소설에서 그려지는 여러 형태의 연대는 개인이 하는 연대의 한계를 생각하게 만들고, 사회는 그 빈틈을 어떻게 메꿔야 하는지 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



 
“참 어렵다. 가끔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나도 모를 때가 있더라. 어떨 때는 사랑하고 어떨 때는 증오해.” _434쪽
 


분명히 이 책은 불편하다. 사람들은 픽션에서건 현실에서건 피해자와 가해자가 밝혀지고 가해자가 벌을 받는 이야기를 원한다. 그러나 많은 성폭력 사건은 그런 식으로 매끄럽게 마무리되지 않는다. 여성가족부가 지난 3월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2020년 유죄 판정이 난 사건을 기준으로 성폭력 가해자의 66.4퍼센트는 피해자와 아는 사이였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성폭력 피해가 길을 가다가 갑자기 괴한에게 강도를 당하는 것과는 다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연인 간 성폭력, 부부 간 성폭력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고, 드러나더라도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사랑할지도 모른다. 사건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동시에 가해자를 걱정할 수도 있다. 그런 일이 책에서도 현실에서도 존재한다. 피해자가 미성년자이거나 그루밍 성폭력 사건에서는 더 빈번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해자가 겪은 일은 피해가 아니게 되는 걸까? 또한 제 3자인 독자가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그 감정은 ‘가짜’이며 ‘잘못된’ 것이라고 피해자에게 말할 자격이 있을까? 그저 느껴질 뿐인 감정을 참과 거짓으로 나눌 수 있을까?

 

이야기가 진행되며 독자는 하나의 진실이 아니라 여러 인물이 지닌 각각의 진실에 다다른다. 한 진실이 참이라고 해서 다른 진실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그 진실들이 서로 모순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중후반부에 접어들며 사건의 윤곽이 드러났을 때 책을 읽다가 몇 번이고 덮어야 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책을 읽은 독자가 할 일은 피해자의 감정을 평가하고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그루밍 성폭력 및 친족 성폭력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회 구조를 살피는 일일 것이다. 소설의 큰 줄기를 이루는 건 쑹화이쉬안 남매와 우신핑의 이야기지만 소설 곳곳에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사회의 민낯을 발견할 수 있다. 판옌중이 과거의 아내와 있었던 일, 우신핑의 고향 마을에 만연하던 가정폭력, 판옌중이 맡은 성폭력 사건, 오드리의 과거 등. 제각각 다른 사람이 다른 시간대에 연루되고 경험했던 일들이지만 신핑이 겪은 사건과도 무관하지 않다.


대만의 이야기지만 우리나라와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여성의 성을 함구하고 억압하는 사회, 특히 미성년 여성의 성을 무성(無性) 취급하는 사회에서 같은 사건은 언제고 일어난다. 관련하여 책에 실린 작가 후기와 인터뷰가 정말 좋았기에 몽땅 옮기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인상 깊었던 부분을 인용하며 리뷰를 마친다.


 
정확한 수치나 연구 결과로는 ‘여자애’와 ‘성’ 사이의 문제를 설명하지 못한다. 나는 이런 여자애들이 표현하려고 시도해야 한다고 본다. 혹은 표현하려는 자신을 억제하는 과정에서 내면에 남은 우울함과 불쾌함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신체로, 혹은 ‘인간된 몸’이라는 마음으로 이 이야기 속의 모순과 가능성과 상식을 배반하는 모든 부분을 배워야 한다고 본다. _440쪽 ‘작가 후기’ 중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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