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특수하고 복잡하며 두려운 비밀 -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글 입력 2022.10.17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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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겐 비밀을 만드는 능력이 있다. 이성과 지능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이후부터 각자의 비밀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또 밝혀져 소멸되기를 반복했을 테다.


우리가 기억하는 최초의 비밀은 아마 어린 시절 엄마 몰래 찬장에 넣어둔 초콜릿을 꺼내 먹었다거나, 다락방에 자신만의 아지트를 만들었던 일처럼 사소하고 귀여운 일탈이었을 것. 오늘 우리가 품고 있는 비밀들을 떠올려보자면, 우리의 성장과 함께 비밀의 규모와 그 은밀함도 커져갔을 테다.


이처럼 커져버린 우리의 어떤 비밀들은 때때로 법리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하는데, 그중 법리의 경계를 교묘히 비껴간 어떤 비밀은 윤리와 사회의 영역으로 침투해온다. 법과 윤리의 사이에 놓인 비밀은 위태로운 이야기가 되어 우리에게 경고를 던질 테다.


우샤오러의 장편 소설,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한스미디어, 2022)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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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법이 비밀이 될 때


 

변호사인 판옌중은 오랜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그의 아들 추전샹을 만난다. 추전샹은 나나라는 여학생과 여러 차례 성관계를 맺었고, 만 16세 미만과 성관계를 맺을 시 합의 여부와 상관없이 처벌을 받아야 하는 법률에 저촉된 상태. 정치계에 몸담고 있는 친구의 평판을 지키고 법으로부터 그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판옌중은 나나의 친모와 합의를 보고자 노력한다. 그는 충분한 액수의 금전적 보상을 약속하며 비밀 보장을 요구한다. 제시된 금액을 본 나나 친모의 “눈에서 빛이 번쩍”(15쪽)이면서, 위법은 비밀이 되어 덮이는 데 성공한다.


일이 마무리되며 대화를 나누던 중 추전샹은 판옌중이 덮어놓은 비밀을 살짝 들춘다. 판옌중이 재벌가 출신의 이혼한 첫 번째 “부인을 때렸다”는 뉴스를 봤다는 것. 판옌중은 사실을 극구 부인하면서도 심란한 감정을 드러낸다. “그건 가짜뉴스다!”(19쪽) 반성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 추전샹과, 어쩔 수 없이 법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야 하는 자신을 법리적 층위에서 분리시키던 판옌중은 결국 윤리적 층위에서 섞이게 된다.


비밀이 된 위법은 내면 깊은 곳에서 지워지지 않는 고통으로 변해갔을 것. (추전샹의, 혹은 그 자신의) 위법행위를 비밀로 덮기 위해서 고군분투했던 판옌중은 “따뜻한 목소리에 위안”(19쪽) 받고자 지친 마음으로 현재의 아내 우신핑을 찾는다. 그러나 그날 온종일 연락이 닿지 않던 아내는 결국 행방불명된다.


사라진 우신핑을 찾으면서 알게 된, 그녀가 학창시절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은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나나와 우신핑이, 추전샹과 자신이 이대로 완전히 겹쳐진다면 꿋꿋이 지켜왔던 자기 자신은 붕괴될 테다. 판옌중은 아내의 비밀을 밝히고 그녀를 찾아야 한다. 그것이 윤리적 고통이 된 자신의 비밀을 해원하는 길이 될 테다.

 

 

 

비밀을 낳는 비밀



실종된 우신핑을 찾기 위해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이 벌이는 추적 과정을 담은 이 소설은 본격적인 전개를 시작한다. 사라진 우신핑을 찾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이 미스터리 소설의 두께를 더하는데, 같은 상처를 공유했다고 믿으며 우신핑을 열렬히 사랑하던 그녀의 친구 오드리는 우신핑에 대한 악의적 증언들을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그녀를 옹호한다. 오히려 가정폭력이라는 비밀을 숨기고 있는 남편 판옌중을 의심하며 우신핑을 찾아 헤맨다.


어릴 적 그녀가 믿고 의지했던 선생님에게 성추행을 당한 상처를 품고 살았던 오드리는 우신핑을 만나 일시적 안정을 얻는다. “성공적인 거짓말이 되려면 거짓 사이에 진실을 섞어야”(285쪽)하듯, 성공적인 비밀은 진실 사이에 거짓을 섞어야 한다. 마음을 터놓으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줄 존재가 된 우신핑의 성공적인 비밀은 오드리를 구원했고, 또한 그 속에 섞인 거짓은 그녀를 다시 절망하게 만들 테다.


우신핑을 사건의 중심으로 몰고 간 것은 학창시절 그녀와 진심으로 마음을 나눴던 쑹화이쉬안과의 숨겨둔 비밀. 지역 유지 가문의 딸인 쑹화이쉬안은 불안정한 가정환경 속에서 의붓오빠에게 여러 차례 성범죄를 당한다. 쑹화이쉬안의 고통과 두려움을 멈추기 위해 우신핑은 그녀가 화이쉬안의 의붓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허위 진술을 하게 된다.


과거가 너무 두려워 차라리 “과거의 자신을 없애”(429쪽)는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때 비밀은 생겨난다. 그러나 그렇게 사라지길 시도했던 자신마저 없애지 못했을 때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대체로 실패하므로) 비밀은 몸집을 불려 숨통을 조여 온다. “비밀이란 그런 것이다. 비밀의 존재를 숨기고 없는 척할수록 그 비밀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진다.”(111쪽)


비밀을 품지도, 그렇다고 스스로 구원하지도 못한 쑹화이쉬안은 우신핑을 원망하며 그녀를 찾아 납치하고 감금한다. 그녀들은 서로를 사랑했고, 그 사랑의 결실로 둘만의 비밀을 낳음으로써 구원을 꿈꾸지만, 그 시도는 오히려 사랑의 파국으로 치닫는다.

 

 

 

피해자다움, 혹은 비밀로 덮기



비밀의 존재가 드러났으니, 존재를 들킨 비밀은 이제 자신의 모양을 서서히, 그리고 정확히 밝혀야 한다. 여러 비밀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소설에서 가지들을 도려내면 큰 뿌리가 드러난다. 성범죄가 심각한 범죄로 인식된 오늘에도 남아있는 폭력적 주장은 피해자임을 직접 증명하라는 것.


 

몸이 떨렸다. 우신핑이 성적인 폭행을 당했던 사람처럼 보인 적이 있었던가? 어떤 모습이어야 그런 사람처럼 보이는 걸까? (192쪽)


신핑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피해자였다. (298쪽)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입증하고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런 사람”처럼 보여야 하는 절망적 모순이 소설을, 나아가 사회를 관통하는 거대한 비밀의 뿌리이자 줄기라는 것. ‘피해자다움’을 입증하지 못하면 “사회 전체가 가해자를 비호하려 들 거라”(386쪽)며 박해받는 것은 언제나 무고한 피해자 쪽이라는 것.


우신핑과 쑹화이쉬안이 만들어낸 비밀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만든 결정적 장면이 목격되며 우리의 신념은 잠시 흔들린다. “네가 화이구 오빠를 안아주는 걸 봤어.”(433쪽) 그러나 우리는 이내 깨닫는다. 끔찍한 고통을 준 가해자에게 피해자가 재차 포옹을 건네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행위가 진정한 용서의 단계에 도달하기 이전에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성범죄의 특수하고 복잡하며 가장 두려운 점이라는 것을.


이처럼 소설은 미스터리라는 장르를 통해 단순한 인식이 성범죄라는 거대한 죄악에 대해 예민하게 세워야 할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현실에 경종을 울린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처가 어렵다면 회피하고자 하는 욕망이 나타난다. 그 욕망은 비밀이 되기도, 거짓이나 폭력이 되기도 할 테다. 성범죄의 경우 더욱 그렇다.


 

이성적으로는 그 일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잘 알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론 이 일이 커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섰어요. (291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한 사람 정도는 이 사람 편에 서야 한다.”(292쪽) 올바른 그 “한 사람”들이 모이면 정의가 된다. 피해자가 긴 비밀의 터널 끝에서 “자기의 삶”(52쪽)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가 그 “한 사람”이 되어줄 수 있기를. 아니, 애초에 피해자가 더는 생겨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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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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