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욕망의 독 안에 든 4인 : 뮤지컬 '테레즈 라캥'

글 입력 2022.10.15 0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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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테레즈 라캥이 2019년 초연에 이어 3년이 지난 2022년 재연을 맞이했다.

 

뮤지컬 <테레즈 라캥>은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으로 대표하는 작가 에밀졸라(Emile Zola)의 <태레즈 라캥>을 원작으로 한 극으로, 금기를 넘어선 인간의 야망과 욕망 그리고 공포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메인 포스터.jpg



세기를 넘어 150여년 동안 끊임없이 부활해온 원작 「테레즈 라캥」. 박찬욱 감독 영화 「박쥐」의 모티브이자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에밀 졸라의 걸작을 뮤지컬로 만나다.

 

[synopsis]


1860년대 프랑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고모에게 맡겨진 뒤 병약한 사촌, 카미유와 함께 유년 시절을 보낸 테레즈. 테레즈는 고모와 함께 카미유를 돌보며 아버지를 기다리지만 아버지는 결국 돌아오지 못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카미유와 애정 없는 결혼을 하는 테레즈.

 

무의미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 카미유의 어린 시절 친구인 로랑이 그들을 찾아온다. 테레즈는 카미유와는 다르게 완숙한 남성미를 가진 로랑에게 순식간에 마음을 빼앗긴다. 두 사람은 곧 은밀한 관계로 발전하고,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기 시작한다. 서로를 탐닉하는 밀회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둘은 그들에게 걸림돌인 카미유를 없애기로 계획한다. 한 치의 의심도 받지 않는 완전 범죄에 성공하지만, 이미 그들에게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파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는데…

 

인간에게 잠재되어 있는 본질적인 욕망이 불러온 파국이 휘몰아친다.

 

 

 

살아있는 삶



이 극에 등장하는 4인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살아있는 삶'을 살기 위해 어떠한 행동을 시작한다.

 

카미유와 라캥 부인은 '집 안'에서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가장'의 역할을 하기를 원했고 이러한 억압적이 상황에서 테레즈는 '집 밖'으로 나가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을 갖는다. 이러한 테레즈의 욕망을 한순간에 이끌어 내준 것은 테레즈의 이상적 공간인 '집 밖'의 인물이었던 로랑이다. 하지만 테레즈와는 상반되게도 그는 '집 안'으로 들어오고자 했다. 집이라는 울타리에 들어서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남편이길 바랐다.


극을 볼 때 사실 '로랑'이라는 인물에 대한 관심도가 크게 있지는 않았다. 넘나드는 감정을 매 순간 드러냈던 카미유과 테레즈의 소리가 더 컸기 때문이다. 로랑은 카미유처럼 귀신으로 등장하지도, 테레즈처럼 발악하지도, 라캥 부인처럼 이상한 약에 집착하지도 않는 '욕망'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특징이 없던 인물이다.

 

하지만 극이 끝나고 극을 복기해 보니 4인의 인물 중에 가장 '이방인'이었던 로랑과 가장 '연약'했던 카미유가 크게 느껴졌다.

 

로랑이 테레즈에게 접근한 이유가 과연 사랑때문이었을까 대한 의구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서로 이성적으로 끌렸던 것을 사실이지만 서로에게 구원자가 되어 줄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얕은 환상에서부터 시작된 관계가 아니었을까 생가하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극을 보면서 개연성이 없어 보였던 부분들에 당위성이 생기는 같았다. 테레즈와 로랑이 한창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할 때 들렸던 로랑의 한마디 덕분에 말이다.

 

 

"카미유를 죽이자!"


 

인물들에 대한 파악이 아직 잘되지 않은 극의 초반에 전개되었다 보니 갑작스럽다 못해 조금은 뜬금없이 들리기도 하였다. 로랑이라는 캐릭터의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를 따라가기 힘들다고 느껴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로랑의 목적이 테레즈가 아닌 '집 안'이었다면 그 대사의 속도에 충분히 설득력 있게 다가올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그가 그 말을 꺼낸 순간 씌여진 또하나의 '악의 막'은 그들이 바닥끝까지 가게 될 것이라는 일종의 암시가 아니였을까. 


테레즈보다 로랑의 욕망을 들끓게 했던 카미유는 몸이 아파 라켕 부인과 테레즈에게 의지해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자신의 의지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 자격지심을 느끼는 인물로 그 감정을 상대적으로 약자로 그려지는 테레즈에게 쏟아붓는다. 그는 내성적이지만 그동안의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히스테리악적인 인물로 그려지지만 사실  살아서는 그 누구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친 못한다.  (그의 단순한 대사와 적은 분량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게다가 그의 힘없는 가부장적인 목소리는 사람을 상당히 옥죄어와 보기만 하던 나 또한 굉장히 힘 빠지게 했다.


그랬던 그는 죽어서는 그 집에 대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이로 그려진다. 그는 없던 물소리를 만들어내고 없던 썩은 물을 만들어내고 혼자 춤추게도 만들었다. 그가 죽으면서 카미유는 어느 때보다 집안에서 가장 큰 인물이 되었다. 말과 표현이 서툴렀던 그 다운 모습으로 그들의 죄의식 속에 나타나 그들이 행복할 수 없게 만든다. 


맨 마지막 장면은 작은 무대에서의 많은 공간적 분리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장면은 무대의 한 가운데에서 어떠한 공간의 경계 없이 진행되는데 (마치 그곳에서의 '집'의 역할은 더 이상 없다는 듯이 가장 밝고 가장 노출된 곳에서 말이다.) 2층에 걸려있는 죽은 카미유의 초상화가 가장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 시간 그 공간은 카미유의 손바닥 안과도 같이 느껴졌다. 

 

그곳에서 카미유는 자신을 억압했던 라캥 부인에게는 '억압'을 자신을 죽였던 테레즈와 로랑에게는 '죽음'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관찰자 혹은 실험자'라고 생각되었고 테레즈, 로랑, 그리고 라캥 부인은 무방비한 실험실에 가둬진 '실험 대상'처럼 보였다.

 

자신의 죽음으로, 살아서 자신의 적이었던 그들의 모든 것을 무용하게 하고 결말을 정한 그의 '권력'을 마지막 3인의 추악한 모습과 함께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잔인함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조금은 아쉬웠던,



공연 시작되면 무대 안에서 공간들의 존재를 소개해 주듯이 각 공간에 있는 조명들이 반짝거린다. 극을 다 본 이후에 다시 곱씹어 보는 그 잔잔한 시간은 단지 공간의 존재를 소개해 주려는 단순한 느낌이 아닌 그 안에서 벌어졌던 기이한 상황들을 처음부커 끝까지 관망한 이들의 살떨리는 호들갑같이 느껴졌다.


무대는 2층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홍 6개의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해당 인물이 갖고 있는 권력과 힘의 위치가 잘 드러날 수 있는 구조였다. 큰 소품보다는 작은 소품들이 오밀조밀 모여진듯한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그중의 임팩트가 느껴진 공간은 없었지만 '투 머치'한 느낌이 강해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벗어나지 못하는 테레즈의 공간으로서의 기능은 충실히 수행해 낸듯싶었다. 


다만 조금 아쉬웠던 점은 마지막에 테레즈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카미유와 테레즈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의 사이즈가 다소 작아 보였다는 점이다. 극의 후반, 그림 속 카미유의 얼굴에서 환각을 보는 테레즈는 그에 대한 죄의식에 파묻혀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그때마다 그림 속 카미유의 모습이 (사이즈 면에서) 관객에게 더 압도적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면 더욱 고조된 극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인간의 원초적 욕망



 

“뮤지컬 ‘테레즈 라캥’은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대인의 문제, 특히 한국인의 문제, 나의 욕망과 사회적 기준과 길을 찾아가는가에 주목하고 있다. 공연을 보는 것은 동시간을 호흡하는 것이다. 동시간에 우리가 같이 고민할 수 있는 것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하는 것”

 

- 윤진현 교수

 


뮤지컬 <테레즈 라캥>은 파국으로 치닫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라기보다는 그 뒤에 숨겨진 인간 내면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극으로 자신도 몰랐던 자신을 찾아간 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 삶에 녹여 표현했다.

 

모두의 욕망의 대상이었던 '집과 가정'을 통해 어떠한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과 권력들 앞에서 강자는 어떻게 바뀌는지, 강자를 제외한 약자들이 어떻게 변하고 어떤 상황에 처하지는 지에 대해 보여주기도 한다.


그들이 행동한 사실만 보면 무조건 '악인'이라는 생각에 극이 단편적이고 일차원적이라 느껴질 수 있었겠지만 '그들의 삶'이 우선해서 보였기 때문에 그들의 결핍이 보였고 그 결핍을 통해 나의 결핍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으로부터 나온 추악한 모습 또한 우리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기에 충분히 공감 한 방울을 마시고 올 수 있는 극이다.

 

무겁고 무섭지만 매우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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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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