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즐거운 나의 집 - 뮤지컬 '테레즈 라캥'

글 입력 2022.10.11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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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극장 공연을 좋아한다. 다른 곳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독특한 낭만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자리도 좁고, 때론 퀴퀴한 먼지 냄새가 날 때도 있지만 그만큼 무대와 객석의 거리가 가까워 공연자의 감정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마치 모닥불을 앞에 두고서 비밀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 같다.


소극장 공연을 즐기는 나만의 방법 중 하나는 바로 무대에 집중하는 것이다.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 같은 곳과 달리 소극장은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무대의 크기가 제한적이다. 따라서 무대를 어떻게 쓰느냐가 공연의 재미는 물론, 때론 전체적인 완성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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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뮤지컬 '테레즈라캥'


 

뮤지컬 <테레즈 라캥>의 무대는 바로 ‘집’이다. 공간이 한정적인 소극장 공연의 특성상 극중 가장 중요한 공간을 무대로 만들 수밖에 없는데 <테레즈 라캥>의 경우는 바로 ‘집’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스레 집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대관절 집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흔히들 내 집 마련의 꿈을 이야기한다. 이 말을 통해 유추할 수 있듯 집은 일반 시민이 소유할 수 있는 가장 큰 재산이자 최종적인 목표다. 어느 시대이든, 어느 장소이든 간에 집이 중요하지 않았던 적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집은 바깥세상과 나를 구분 짓는 경계선의 역할을 수행한다. 물론 대부분은 그 경계선의 존재 덕분에 아늑함과 편안함을 느낀다. 하지만 가끔은 집에 머무르는 것에 답답함을 느끼며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자가격리를 당했던 사람이라면 아마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때의 집은 안식처라기보단 벗어나고픈 감옥에 더 가깝다.

 

이러한 ‘집’의 면모는 예술에서도 꽤나 중요한 소재로 다뤄지고 있다.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려 보자. 이 영화는 평범한 소시민이었던 수남이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혀 전락하게 되는 과정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이때 그녀가 가진 꿈은 바로 자기만의 집을 갖는 것이었다. 이 영화 속에서 집은 반드시 이루고 싶은 간절한 꿈이었다.


그에 반해 영화 <김씨 표류기>에서 집은 조금 다른 의미로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인 정연은 히키코모리로 집 밖으로 나가는데 두려움을 갖고 있다. 하지만 영화의 말미, 그녀는 남자 주인공을 만나러 가기 위해 스스로 집밖으로 나선다. 이를 통해 관객은 그녀가 성장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이때 집은 그녀를 가두어 놓은 감옥이자, 뛰어넘고 싶은 현실의 벽으로써 존재한다.

 

집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이 가장 잘 반영된 작품으로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있다. 이 영화에서는 두 집이 등장한다. 하나는 박사장의 집이고, 다른 하나는 기택의 집이다. 가난한 기택의 가족에게 박사장의 집은 꿈의 대상이 된다. 그에 반해 기택의 가족이 실제로 살고 있는 반지하 집은 벗어나고 싶은 답답한 현실이다. 그들은 툭하면 곱등이가 튀어나오고, 폭우가 오면 침수되는 이곳을 벗어나 박사장의 집이 있는 언덕 위로 올라가고 싶어 했다. 비록 그 방법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뮤지컬 <테레즈 라캥>에서 '집'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이 작품에서도 집은 가장 중요한 공간이자 네 인물의 욕망이 펼쳐지는 주무대로 등장한다. 가령 테레즈의 경우, 이 집을 벗어나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램은 라캥 부인의 조용히 하라는 말과 인해 번번히 좌절되었다. 카미유 역시 테레즈와 비슷한 꿈을 갖고 있다. 그는 병약한 자신의 몸과 파리에서의 생활 때문에 지쳐 있으며, 이곳을 떠나 사랑하는 테레즈와 다시 시작하기를 꿈꿨다.


한편 라캥 부인의 욕망은 앞선 두 사람과는 방향이 다르다. 집을 떠나고 싶어 하는 그들과 달리 라캥 부인은 아들(카미유)이 다시 건강해지고, 세 가족이 이 집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랬다. 로랑의 바램 역시 집을 향해 있다. 극중 로랑은 아버지와 관계가 소원하며, 경제적으로도 궁핍한 상태로 묘사된다. 그렇기에 그는 새로운 가족을 이루고 좋은 집을 소유하기를 욕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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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뮤지컬 '테레즈라캥'


 

서사 예술에서 모든 인물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움직인다. <테레즈 라캥>의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다만 한 가지 흠이 있다면 그들의 욕망이 2% 모자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기묘한 아이러니가 피어오른다.

 

극중 테레즈와 로랑은 기어코 카미유를 살해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행복해졌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테레즈의 욕망은 이 집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욕망을 외부에서 온 이방인인 로랑과의 관계를 통해 해갈하고자 했다. 반면 로랑의 욕망은 새로운 가족을 이루고 좋은 집을 소유하는 것이었다. 그는 카미유를 살해하고 그의 빈자리를 대체함으로써 이 욕망을 충족시켰다. 이제 카미유의 집은 로랑의 소유가 되었다. 따라서 그에겐 이곳을 나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욕망은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다. 한 사람은 이 집을 떠나고 싶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이 집에 들어오고 싶어 했다. 그들은 그저 문 앞에서 잠깐 마주쳤을 뿐이고, 그 순간에 서로가 같은 꿈을 꾸고 있다고 착각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테레즈와 로랑은 서로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었다.

 

처음 로랑이 집에 왔을 때 그곳은 텅 빈 액자로 가득했다. 로랑은 그 텅 빈 액자에 그림을 그려 채워 주었고, 그렇게 테레즈의 마음에도 들어와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카미유가 죽은 후 그의 자리를 대체한 로랑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불안을 핑계로 자신이 그렸던 그림을 없애는 것이었다. 액자는 다시 텅 빈 순간부터 그는 테레즈에게 더 이상 로랑이 아니었다. 그는 카미유2였다.

 

한편 이 중에서 유일하게 2% 모자란 방식으로라도 자신의 욕망을 이루지 못한 인물이 있다. 바로 카미유다. 어찌 되었든 테레즈는 사랑하는 로랑과 결혼했고, 로랑은 새로운 가족과 좋은 집을 얻었다. 라캥 부인 역시 죽은 카미유 대신 로랑을 아들로 삼으며, 그가 가족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 믿었다(실제로 극중 라캥 부인은 카미유에게 했던 대사를 나중엔 로랑에게도 똑같이 반복했다).

 

그에 반해 카미유는 어떤 방식으로도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지 못했다. 그는 파리를 떠나 사랑하는 테레즈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어 했다. 그러려면 우선 테레즈가 카미유를 사랑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먼저 충족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카미유를 사랑하지 않았다. 다른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을 대신하여 이뤄줄 대체재가 있었지만 카미유에겐 없었다. 테레즈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그의 세상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의 욕망은 거세당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인간이 욕망을 통해 주체, 자기만의 정체성(Ego)을 형성한다고 주장했다. 욕망하지 않는 인간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카미유는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사랑했던 사람들로부터 살해당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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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뮤지컬 '테레즈라캥'


 

뮤지컬 <테레즈 라캥>에는 두 개의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첫 번째 아이러니는 앞서 말한 것처럼 연인이었던 테레즈와 로랑이 결국 서로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욕망은 처음부터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아이러니는 바로 테레즈와 카미유의 관계에 있다. 테레즈는 이 집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 바램을 이뤄줄 사람이 로랑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는 그녀를 집에 가두어 버렸다. 그렇다면 그녀를 집에서 내보내줄 수 있었던 인물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건 똑같이 이 집을 떠나고 싶어 했던 카미유였다.

 

극중 테레즈는 딱 한 번 집 밖으로 나갔다. 그 한 번을 만들어준 게 바로 카미유다. 카미유는 프로포즈를 위해 로랑의 도움을 받아 그녀를 센 강으로 데려갔다. 이뿐만이 아니다. 극중 카미유는 이 집(파리)을 떠나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베르농으로 가자고 테레즈를 끊임없이 설득했다. 오직 카미유만이 그녀를 이 집에서 데리고 나가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로랑과의 관계에 푹 빠져 있던 테레즈는 카미유의 제안을 거절했고, 오히려 그 제안을 계기로 카미유를 살해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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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뮤지컬 '테레즈라캥'


 

그럼 이쯤에서 공연의 주 무대인 집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극중 테레즈와 로랑은 어째서 들킬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바깥이 아닌 집 안에서 밀회를 즐겼을까. 그건 바로 그들에게 (집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간에)이 집이야말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기에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이 집은 꿈을 꾸는 곳이었다.

 

하지만 카미유가 죽은 후 집의 의미는 서서히 변했다. 테레즈와 로랑, 라캥 부인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했다. 하지만 그건 완벽한 방법이 아니었고 그들은 다시 불행해졌다. 테레즈는 집에 갇혔고, 카미유는 죽었다. 라캥 부인은 끝내 불구가 되었으며 마지막에는 눈앞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이 해체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로랑 역시 망가졌다. 그와 아버지 사이처럼 로랑과 테레즈, 라캥 부인 사이에는 불화가 피어올랐다. 좋은 집을 갖게 되었지만 궁핍한 생활은 도저히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집에는 먹을 것이 떨어졌다. 이제 집은 더 이상 꿈을 꿀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현실, 그들의 말마따나 현재의 지옥이었다.


마지막에 이르러 로랑은 테레즈에게 다같이 소풍을 가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다음날 테레즈는 로랑에게 밖이 아닌 집에서 소풍을 즐기자고 말했다. 그 말이 나는 퍽 슬펐다. 그녀는 떠나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도리어 로랑에게 밖으로 나가지 말자고 제안한 것이다. 행복을 꿈꿨던 연인의 말로가 비참해서 슬픈 게 아니다. 누군가 죽어서 슬픈 게 아니다. 그들이 욕망하기를, 꿈꾸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슬프고 비극적인 것이다.


밖으로 나가길 꿈꿨던 여자는 안에 머무르길 택했고, 안으로 들어오길 꿈꿨던 남자는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입었던 옷과 함께 다시 이방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앞서 나는 욕망하지 않는 인간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스스로의 욕망을 거세한 그 순간부터 그들은 더 이상 살아있다고 볼 수가 없다. 그렇기에 두 연인은 기꺼이 독이 든 포도주를 나눠 마셨다.


짧았던 커튼콜이 끝나고, 테레즈를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무대에는 어둠이 찾아왔다. 다시 불이 켜졌을 때 무대는 텅 비었다. 결국 무대만 남았고, 그 집만 남았다. 테레즈도, 카미유도, 로랑도, 라캥 부인도 없다. 그 안에서 행복한 꿈을 꾸었던 사람들은 어디 가고 달라지지 않는 현실만이 남았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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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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