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영화가 만나] 비대칭 속 균형, 코고나다 감독의 세계 下

글 입력 2022.09.26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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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애프터 양>으로 돌아와 보자. 앞서 코고나다 감독의 작품들에는 끊임없이 떠나가고 남겨지는 자들이 대치를 이루며 등장한다고 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인물들의 ‘정체성’이다. <애프터 양>은 코고나다 감독의 세 작품 중에서도 정체성에 관한 고민과 갈등의 흔적이 가장 치열하게 엿보이는 영화다.

 

<애프터 양>에 등장하는 주인공 가족은 백인 남편과 흑인 아내, 이들의 입양아인 중국계 딸, 그리고 테크노 사피엔스 ‘양’으로 구성되어 있다. <애프터 양>은 양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양과 아시안으로서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는 미카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는 영화 속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직접 드러난다.


어느 날 미카는 학교 친구들로부터 ‘진짜 부모님’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 미카는 이 사실을 양에게만 털어놓는다. 그리고 아이들의 말에 동조하기라도 한 듯 “(엄마 아빠가) 부모님은 맞지만... 진짜 부모님은 아니잖아”라고 말한다. 그런 동생의 고백을 잠자코 듣고 있던 양은 미카를 어딘가로 이끈다.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져 있는 그곳에서 양은 한 나무의 가지가 다른 나무로 옮겨가고 있는 신비로운 장면을 미카에게 보여준다. 양은 접목 현상을 비유로 “넌 이 가지처럼 엄마 아빠와 연결돼 있어. 넌 가족 나무의 일부야.”라고 이야기한다. 곧이어 “두 나무는 모두 중요해. 다른 가족 나무도 너한텐 중요한 일부야”라고 미카를 위로한다. 기원의 뿌리는 다를지언정 미카와 부모님이 서로에게 연결되어있는 중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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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오빠도 (가족 나무의) 일부겠네”라는 미카의 말에는 대답하지 못하는 양. 이는 두 인물의 기원적 뿌리가 다르기 때문일 테다. (인간이라는) 땅 밑 뿌리에서 자라나 서서히 자신만의 가지를 뻗어가며 접목하는 두 나무와 달리 양은 두 나무를 이어주는 접목 테이프 혹은 중간서부터 생겨난 곁가지에 더 가까운 존재다. 실제로 양은 주인공 부부가 미카에게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역사를 일러주기 위한 목적으로 들여온 안드로이드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그가 비록 프로그래밍 된 안드로이드일지라도 양이 미카에게 대단히 의미 있는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같은 민족성을 공유하는 아시아인으로서, 비슷한 고민을 나누고 상처를 어루만지며 자라온 남매로서 말이다.


나는 여전히 양 스스로가 정체성에 관한 고민을 했으리라고는 확언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오랜 시간 여러 가족의 곁을 머물면서 살아있는 육신의 탄생과 소멸을 지켜보며 인간과 로봇 사이의 존재론적 고민을 했으리라고 자꾸만 어림짐작하게 된다. 마침 <애프터 양>을 관람한 시기에 김영하 작가의 『작별인사』라는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은 우연한 행운이었다. 『작별인사』의 초반에는 주인공의 독백으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팔, 다리, 뇌의 일부 혹은 전체, 심장이나 폐를 인공 기기로 교체한 사람을 여전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 책 『작별인사』 中

 


영화 <애프터 양>과 책 『작별인사』를 접하며 나는 끊임없이 위와 같은 질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신체의 주요 기관들을 인공 기기로 교체한 사람과 로봇으로 탄생했으나 인간과 같은 죽음을 맞고 두려움을 느끼며 삶의 의지를 지닌 안드로이드를 상상하며 거듭 고민했다.

 

『작별인사』에는 안드로이드라는 정체성을 넘어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의 의미를 두고 두 인물이 대립하는 장면도 나온다. 그러나 다양한 인물들의 생각을 전해 들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결론 내릴 수 없었다. 지금보다 과학 기술이 더욱 정교하게 발달해 『작별인사』와 같이 인간의 죽음과 정서를 그대로 물려받은 안드로이드가 탄생한다면, <애프터 양>에서와 같이 삶의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안드로이드가 생겨난다면, 나는 이들을 인간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인간의 정체성이 무엇이었던가. 태어나서 죽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두려움에 떨면서도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 살아가려는, 살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자들이 아니었는가. 그런 인간적인 특성을 마침내 기계에도 완벽히 적용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여전히 이들을 로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나 자신이 오히려 아무런 감각도, 삶의 의지도 느끼지 못하는 기계처럼 느껴지고 앞서 언급한 작품들 속 안드로이드가 더욱 인간(적인 것)처럼 느껴질 때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영화에서 양이 작동을 멈추자 “처음부터 새 제품을 사자고 했잖아”라고 말하는 인간의 위치는 어디인가. 같은 뿌리에 기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생명성(生命性)이 부여된 유기체를 마음껏 사고팔고 처분하는 곳에서 과연 인간의 존엄성을 논할 수 있는가.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행동하는 기계들 앞에서 우리는 –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 더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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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나는 <애프터 양> 속 미카와 양으로부터 낯선 이방인의 정서를 느꼈다. 같은 ‘가족 나무’의 범위에 속해있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뿌리에 기반하는 이들이 서구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이곳에서 알 수 없는 이질성과 낯선 기운을 느꼈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이방인의 정서는 영화를 제작한 코고나다 감독의 뿌리에 많은 부분 기인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한국인 부모님과 미국 이민을 떠난 코고나다 감독은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늘 타국의 이방인이자 디아스포라(고국을 떠난 사람)의 경계에서 살아왔다.


코고나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디아스포라가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을 끊임없이 조국 바깥에서 바라보도록 만든다”고 말한 바 있다. 또 아시아계 미국인이 겪는 정체성의 고민에 관해 “고국에 대한 기억이 없는 이민자 2~3세가 어떤 정체성을 가져가야 하는지를 늘 고민해왔기에, (‘애프터 양’의 주인공) 양을 통해 생각해보고 싶기도 했다. 중국 역사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중국을 경험하지 않은 양을 통해 고국과의 진정한 연결성을 염원한 것도 같다”고도 했다.


<애프터 양>에서 느껴지는 이방인의 정서는 <파친코> <콜럼버스>에서도 그 결을 나란히 한다. <파친코>가 한인 이민 가족 4대의 억척같은 삶을 그리고 있다면, <콜럼버스>는 의식불명에 빠진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 한국계 미국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코고나다 세계의 인물들은 모두 그와 같은 이방인의 정체성을 띠고 있고, 그것은 대개 아시안으로서의 디아스포라와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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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코고나다 감독의 작품이 그토록 내게 와닿은 이유 중 하나는 내가 미국에 머물면서 느꼈던 이 디아스포라의 정서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고작 몇 개월간 타지 생활을 했을 뿐이지만, 나는 대체로 모든 장소와 공간에서 ‘한 발짝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것이 나의 개인적인 착각과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나는 이따금 그들이 보내오는 눈빛과 태도에 상처 입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낯선 공기에서 벗어나는 완벽하고도 유일한 순간은 오로지 같은 아시아인이 함께 자리할 때였다. <애프터 양>에서의 양과 미카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한평생 타국에서 살아온 코고나다 감독의 경우는 어떠할까. 그는 인터뷰에서 “미국인이자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나 같은 사람들의 처지도 일면 그러하다. 우리는 국적이나 민족과 관계없이 우선 아시아인으로 묶여 분류된다. 아시아계 디아스포라들이 서로 다른 나라에서 왔음에도 많은 경험을 공유하게 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고 자연스럽게 서로 상호 정체성이 형성된다”고 말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정체성이란 관념을 뛰어넘는 코고나다 감독의 작품적 특징이다. 그는 “이민자로서 아시아인들의 공통적 정체성에 관심이 많다. 다만 작품에서 다루고자 하는 건 아시안으로서 정체성보다 감수성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돌아보면 나는 그의 세계가 담고 있는 무언의 감수성 – <애프터 양> 속 양의 기억 장치와 우주를 유영하는 장면,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과의 연결점 등 – 에서 가슴을 일렁이게 하는 깊은 감동과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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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의 작품들에서 눈에 띄는 건 아름다운 자연풍광과 시대를 뛰어넘는 공간성,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 정적이면서 마음을 끄는 음악들이다. 한편으로는 그런 정적인 이미지들과 분위기에 완전히 상반되는 순간을 덜컥 만나기도 한다.

 

그 쾌활함의 순간은 주로 인물들이 춤을 추는 장면에서 마주하게 되는데 내가 <애프터 양>과 처음 사랑에 빠졌던 순간이기도 하다. 세 작품 모두에서 주요 인물들이 예기치 못한 타이밍에 춤을 추고 등장한다는 것은 코고나다 세계의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이다. <애프터 양> <파친코>의 오프닝, <콜럼버스>에서 ‘아무것도 안 한다’라며 막춤을 추는 케이시, 또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밴드 공연에 맞춰 힘차게 춤추는 <파친코>의 솔로몬까지.


주목할 점이 있다면 코고나다의 세계에서 춤이란 행위는 대체로 예정된 슬픔이나 실패가 닥치기 전 또는 후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사업에 실패하거나 누군가와 이별하기 전이나 불우한 환경에 처한 이들이 춤을 출 때만큼은 모든 것을 내던지고 몸을 흔드는 것이다. 나는 이것에 - <싱 스트리트> 속 - ‘Happy Sad’(행복한 슬픔)의 정서가 깃들어있다고 명명하고 싶다. 그래서 이 모든 춤은 더욱 아름답고, 처절하며 어떻게든 삶을 이어가려는 의지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파친코>의 오프닝에는 사무치게 외롭고 가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활짝 웃는 표정으로 경쾌한 춤을 추며 등장한다. 이때 배경으로 흘러나오는 노래가 ‘Let’s Live for Today’(오늘을 위해 살자)라는 것을 상기하면 짐작건대 나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들어도 오늘을 위해 살아보자’라고 외치는 듯한 인물들의 얼굴에서 아득한 연대와 위로의 감정을 느꼈던 게 아닐까 싶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고 싶은 건, 코고나다 감독이 그려내는 ‘기억’이라는 모티프다. 오프닝에 이어 <애프터 양>에서 나의 마음을 끈 것은 단연 양의 3초 기억 장치였다. 아름다운(혹은 아름답다고 생각한) 순간들을 3초 단위로 기억 장치에 담아둔 양. 이는 미카의 아버지 제이크가 양의 지난 궤적을 밟고 그의 기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매개로 등장하기도 한다. 놀라운 건 이 모든 기억 장치의 순간들이 코고나다 감독의 개인적인 상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애프터 양>의 원작에는 양의 실제 기억들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코고나다 감독은 “와인스타인의 소설은 양의 기억을 생략한 채 아버지의 회상만을 제시한다. 바로 그 지점에 숨겨진 기회가 있었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양의 기억을 새롭게 써 내려가기 시작했고 기억 장치를 디자인했다. 그 안을 탐험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 내 주된 관심사 중 하나였다.”라고 말했다. 기억의 주체가 되는 인물을 뒤바꿔 완전히 다른 시점으로 극을 전개하는 코고나다의 새로운 해석은 관객이 제이크뿐만 아니라 양의 입장에서도 그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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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파친코>에서도 영리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시간 순으로 사건을 진행하는 원작소설과 달리 드라마 <파친코>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대를 자유로이 오간다. <파친코>의 도입부서부터 드라마 <와이 우먼 킬>이 떠오른 이유다. 다중 시간대 구조를 따르는 작품이 많음에도 유독 <와이 우먼 킬>이 자주 생각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두 작품은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 않는다. <와이 우먼 킬>은 1960년대, 1980년대, 2019년 현재의 세 이야기를 담았고, <파친코>는 1930년대와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공간성 역시 달리 한다. 전자는 호화로운 미국 주택을 배경으로 같은 공간에서 각기 다른 시대에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조명하고 있으며 후자는 4대 재일 한국 가족의 역사를 한반도와 일본을 오가며 다루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파친코>를 보면서 자꾸만 <와이 우먼 킬>이 떠오른 것은, 두 작품 모두 ‘살아남고 견뎌낸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파친코>가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마음에 가닿은 이유는 해당 작품이 일제 강점 시대 한민족의 고난과 수난을 유려하게 담아낸 민족사이자 각박한 이민사회의 모습을 더없이 현실적으로 그려냈기 때문일 테다.


저스턴 전 감독과 공동연출을 맡은 코고나다 감독은 <파친코>의 1, 2, 3, 7화를 연출했다. 코고나다 감독은 일제 강점 시대의 한 조선인 가족에서 시작하여 침략당한 조국의 당대 현실을 반영함에서 나아가 7화에 이르러서는 원작에 없던 ‘관동대지진’ 사건까지 포함시킨다. 한 에피소드를 통째 할애하여 코고나다 감독이 ‘관동대지진’의 역사를 담은 이유는 무엇일까.

 

관동대지진 학살 등을 통해 일본 본토에서 핍박받은 조선인들의 모습을 담아내려던 뜻도 있었겠지만 이는 타지에 머무르고 있던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아시안들이 재난으로 고통받았다는 사실까지 기록하고자 했던 코고나다의 의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앞서 “이민자로서 아시아인들의 공통적 정체성에 관심이 많다.”는 코고나다 감독의 인터뷰를 보고는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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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나는 영화 <콜럼버스>를 언급하며 글을 마치고 싶다. <콜럼버스>에 등장하는 많은 대사가 코고나다 감독의 세계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에는 모더니즘 건축물에서 아름다움을 엿보는 케이시의 입을 통해 “비대칭 속 균형이 있다”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코고나다 감독의 작품들도 이와 얼추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엇나가고, 삐걱대는 개인사를 가진 인물들이 ‘그럼에도’ 어떻게든 삶을 이어가려는 것, 사소한 일상을 포착하고 소중한 순간을 간직하려는 것. 나는 그 묘한 비대칭의 세계에서 황홀하고도 아름다운 균형을 맛보았다.

 

영화에서 진은 케이시에게 건축의 메카 ‘콜럼버스’에 사는 주민들도 당신과 같이 모더니즘 건축물에 열광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케이시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익숙한 것에는 의미를 두지 않게 된다”고 답한다. 어쩌면 평범한 듯 보이는 코고나다의 세계가 유독 빛나는 이유도 익숙한 것들에 의미를 두고 그 대상을 섬세하게 포착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과 공동 작업을 많이 한 각본가 노다 코고의 이름을 변형해 예명을 지었을 만큼, 오즈 야스지로 감독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코고나다 감독. 그는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이전에 비디오 에세이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애프터 양> <파친코> <콜럼버스>까지 그의 궤적을 톺아 나가면서 나는 코고나다 감독의 비디오 에세이까지 찾아보게 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핸즈 오브 브레송>을 보고 나서는 이 감독의 미적 감각과 더불어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를 더욱 흠모하게 되었고 말이다. 작은 일상이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순간들이라고 생각한다는 코고나다의 다음 세계가 더욱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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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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