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영화가 만나] 비대칭 속 균형, 코고나다 감독의 세계 上

글 입력 2022.08.13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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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영화가 만나’는 순간을 포착합니다.


방구석에서 본 영화에 대해 신나게 떠들 수도, 재미있게 본 TV 시리즈를 이야기할 수도, 좋아하는 작품을 비교 분석할 수도 있습니다. 가끔 영화제에 갑니다.

 

 

나는 요새 한창 <파친코> 앓이 중이다. 드라마를 끝낸 지는 벌써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출근길에 <파친코> 음악을 듣고, 그걸 듣고 있으면 자연스레 주인공 선자가 생각나는 식이다. 어릴 적의 선자, 사랑에 빠진 선자, 쌀밥을 먹는 선자, 할머니가 된 선자... 그 다채로운 모습의 선자들이 나의 머릿속을 온통 장악하고선 도통 놓아주지를 않는 요즘이다. 애플이 야심 차게 내놓은 드라마 <파친코>는 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로 2022년 3월 25일부터 4월 29일까지 방영되었다.

 

왜 이제야 파친코 앓이를 하냐 묻는다면, 그건 할 일을 끝없이 미루는 자의 특성상 ‘역시 드라마는 몰아보는 맛이지’라고 제멋대로 생각해버리는 나의 낡은 신념 때문일 테고, 나아가서는 매주 한두 화씩 공개되는 걸 꼬박꼬박 챙겨볼 자신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나같이 인내심이 없고 게으르기까지 한 관객은 – 특히 영화보다 드라마의 영역에서 – 늘 유행이 한발 지난 시점에서야 화제가 되었던 작품을 챙겨보고는 뒤늦게 푹 빠져버리는 것이었다. 내겐 <파친코>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킨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도 그러했고, 같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인간수업> 역시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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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방영 종료일로부터 4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하필이면 활활 타오르는 여름날에, 보아야 할 영상 콘텐츠가 쌓여있음에도 굳이 <파친코>의 재생 버튼을 누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순전히 <애프터 양>이라는 영화 때문이었다. 2022 전주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이기도 했던 <애프터 양>은 영화제가 끝나고 한 달 뒤인 6월 1일 한국에서 개봉했다.


독립예술영화이니만큼 엄청난 흥행세를 탄 작품은 아니었다. 그러나 영화를 본 지인들과 관객들로부터 꾸준히 호평의 목소리가 들려오니 자연스레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선천적으로 귀가 얇은 데다 남들이 거듭 추천하는 개봉영화만큼은 극장에서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허둥지둥 바쁜 일정을 끝내고 7월이 되어서야 겨우 <애프터 양>을 작은 상영관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96분이라는 다소 짧은 상영시간에도 <애프터 양>이 내게 주는 울림은 엄청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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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프터 양>

 

 

시대를 가늠하기 어려운 정경부터 어딘가 낯선 조합의 가족, 익살스러운 춤까지. 오프닝부터 경쾌한 충격을 받아버린 나는 영화가 끝나자마자 허겁지겁 감독의 이름부터 찾아보았다. 처음 보는 감독의 작품이 몹시도 취향에 맞아떨어질 경우, 그의 필모그래피를 역순으로 훑어나가는 것은 나의 오랜 관행이었다.

 

예컨대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요아킴 트리에 감독이 그러했고, <티탄>을 찍은 쥘리아 뒤쿠르노 감독이 그러했으며, <그린 나이트>를 연출한 데이빗 로워리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애프터 양>을 찍은 코고나다 감독은 조금 독특한 경우였다. <애프터 양>이 고작 그의 두 번째 장편영화라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그가 <파친코>의 공동 감독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작품 수만 따지면 신인에 가까운 이 영화학자 감독이 애플TV+의 간판과도 같은 <파친코>를 연출했다고? 심지어 영화도 아닌 드라마를? 물론 <지옥>을 연출한 연상호 감독이나 <유포리아>를 찍은 샘 레빈슨 감독과 마찬가지로 영화와 드라마라는 두 영상 매체를 모두 소화해내는 제작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애당초 호흡이 다른 두 영역을 동시에 다루는 일도 그리 흔한 경우가 아니었기에 나는 코고나다 감독의 양쪽 세계가 더욱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덧붙여 <파친코>의 프로듀서가 (제작비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작품 실패의 위험성을 감수하고라도 신인 감독을 기용했다는 점이 눈여겨볼 만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특정 플랫폼 내에서만 유통되는 자체 제작 시리즈는 OTT 구독자 유입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친코>의 총괄 제작자인 작가 수 휴가 신인 감독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건, 그 역시도 코고나다 감독에게서 무언의 가능성을 엿보았다는 뜻일 테다.


그리하여 감독에 대한 일말의 호기심으로 <파친코>를 틀게 되었다. 그리고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 이 감독에게 지독히 빠지겠구나, 라는 걸. 나는 <애프터 양>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파친코>의 1화 오프닝서부터 이 놀라운 대하 드라마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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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콜럼버스>

 


<애프터 양>은 코고나다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이고, <파친코>는 그의 첫 드라마 연출작이다. 그 작품들에 앞서 선행하는 영화가 바로 코고나다 감독의 데뷔작 <콜럼버스>다. <애프터 양> <파친코> <콜럼버스>까지 그의 작품들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나는 코고나다 감독이 그려내는 – 또는 그려내고자 하는 – 어떠한 공통된 감각과 세계를 미약하게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 상실, 남겨진 자와 떠나는 자, 정체성의 혼란, 일상적 사랑, 경애의 마음. 그것은 지금껏 드러난 코고나다의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라 불릴 만하다. 어찌 보면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주제들이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작품이 가족과의 갈등, 연인 간의 사랑, 혹은 관계로부터의 상실을 이야기해 왔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가는 주인공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흔해 빠진 주제들 사이에서도 유독 관객의 시선을 잡아끌거나 마음을 울리는 작품들이 곧잘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창작자로서의 감독이 ‘일상적 특별함’을 얼마나 잘 빚어내는가에 기반하고 있는 듯하다. 카피라이터 유병욱 작가의 말을 잠시 빌리자면, 우리는 ‘보편의 틀 안에서 개별의 삶’을 살아간다. 내가 항상 마음이 끌렸던 건, 인류 공통의 보편을 이야기하면서도 개별적인 인물의 삶에 얼마나 주목하는가에 대한 감독의 태도였던 것 같다. 그 두 가지가 합일되는 순간이야말로 작품이 완전히 독립된 하나의 객체로 내게 다가오는 것이다.


코고나다 감독은 – 시대적 배경이나 관찰자의 시점을 바꾸는 식으로 – 그런 일상적 특별함을 돋보이게 하는 감독 중 가장 탁월한 솜씨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보잘것없는 일상적 소재들까지도 그의 작품에서는 더없이 특별하고, 더없이 평범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나는 코고나다 세계의 어떠한 면에 매료되었나? 그의 작품들을 계속해서 기다리고 찾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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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코고나다 세계로의 문을 열어준 영화, <애프터 양>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애프터 양>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 영화다. 복제인간과 테크노 사피엔스, 그리고 인간이 한 데 공존하는 이곳에서 영화는 테크노 사피엔스와 함께 살아가는 한 가정에 주목한다. 알렉스 와인스틴의 단편소설 《양에게 작별 인사를(Saying Goodbye to Yang)》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가 작품의 제목을 <애프터 양>이라고 지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코고나다 감독이 양과의 작별인사에서 나아가 죽음 이후의 삶과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애프터 양’의 시간에 집중한다.


남겨진 자들. 그것은 코고나다의 세계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무언의 실체다. <애프터 양>에서는 양의 가족들이, <파친코>에서는 4대에 걸쳐 있는 거의 모든 이들, 이를테면 주인공 선자와 그의 어머니 양진, 그리고 모자수와 솔로몬이, <콜럼버스>에서는 한국인으로 등장하는 진이 그 남겨짐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들의 대척점에는 늘 떠나는 자들이 있다. <애프터 양>의 양, <파친코>의 주요 인물들, <콜럼버스>의 케이시가 그 구체적 사례다.


주목할 만한 점은 코고나다의 세계 속에선 남겨진 자들과 떠나는 자들의 경계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파친코>에서 가장 선명히 드러나는 대목인데, 일제강점 시대의 선자와 한수, 그 뿌리로부터 기원하는 현대의 솔로몬과 하나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헤어짐의 대상이 되기도 하면서 코고나다 감독은 그것을 비단 가족과 연인관계에만 한정 짓지 않는다. <콜럼버스> 속 아버지와의 어긋난 관계와 대비되는 진과 케이시의 우정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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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나는 <콜럼버스>의 특정 장면을 보다가 문득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가 떠올랐는데 첫 번째 이유로는 영화 속 두 사람의 중요한 매개체로 담배가 활용되기 때문이다. <콜럼버스>의 진과 케이시,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가후쿠와 미사키가 가장 중요하게 교감하는 순간은 모두 자동차 선루프 위로 담배를 나눠 필 때다. 선루프를 열고 각자의 손이 흰 연기를 훌훌 날려 보내는 순간, 그리고 여느 건축물 앞에서 자신의 꿈이 시작되었음을 고백하는 순간은 두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이다.


무엇보다 각 영화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이 모두 가족으로부터 상처받고 홀로 남겨진 자들이며 나아가 서로에게 치유의 대상이 되어준다는 점에서 <콜럼버스>의 진과 케이시는 <드라이브 마이 카>의 두 사람과 본질적인 유사성을 공유한다. 덧붙여 유사 부녀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비슷한 나이 차 역시 두 영화 속 인물관계의 긴밀한 공통점으로 다가온다.

 

 

- 다음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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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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