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혼자 잘 먹고 잘 보낸 추석

혼자 보낸 연휴의 기록
글 입력 2022.09.21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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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은 설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큰 명절 중 하나로 음력 팔월 보름날이다. 명절에는 가족과 친척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코로나 이후로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현재 나는 수험생인 동생과 둘이 살고 있다. 수시 원서 접수를 앞두고 자기소개서를 계속 봐주고 있던 터라 추석에 본가까지 함께 가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집에 남아 혼자만의 연휴를 즐기기로 했다.


8일 저녁, 아트인사이트에 글을 올리고 잠깐 낮잠을 잔다는 것이 눈을 떠보니 7시 10분 전이었다. 반찬가게가 연휴 내내 문을 닫기 때문에 급하게 가서 고사리나물과 총각김치를 사 왔다. 명절 음식은 느끼하기 때문에 김치는 필수다. 집에 돌아와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전을 부치기 시작했다.


최근 애호박 가격이 정말 많이 올랐다. 저렴할 때는 1000원도 안 하던 것이 3000원을 웃돌기 시작하자 식탁 위에서 애호박은 자취를 감췄다. 덕분에 호박전은 이번 추석 상에도 오를 수 없게 되었다. 이미 집에 있는 채소와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을 생각하다가 버섯전을 선택했다.


버섯전이라고 하면 보통 팽이버섯을 생각하겠지만 나름 오독오독한 맛을 내는 흰 만가닥버섯이 냉장고에 있었기에 계란과 밀가루에 버섯을 가득 넣고 전을 여러 차례 부쳐냈다.


9일 점심, 실온에 놓아두어 잘 익은 총각김치의 무청을 작게 잘라주고 김칫국물, 고추장, 간장, 식초를 잘 섞어 비빔장을 만들었다. 전날 만든 버섯전과 매콤한 비빔국수를 먹으며 느긋하게 연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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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고 식탁에 앉아있자, 창문으로 들어오는 쨍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이 밖으로 나오라고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좋아하는 카페가 영업을 하는지 확인한 후에 소금빵을 사러 나갔다.

 

그렇게 밖으로 나왔을 때는 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햇볕과 바람은 너무 좋았지만, 그늘이 없는 시간대라는 것을 간과했다. 덕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소금빵 두 개를 들고 집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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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점심, 약속에 나가기 전 간단하게 표고 우엉 수프를 만들었다.

 

기름에 표고버섯을 바짝 볶고 감자칼로 얇게 벗긴 우엉을 넣어 또 볶는다. 밀가루를 넣어 풋내가 날아갈 정도로 볶고 두유를 부어 걸쭉해지면 완성이다. 전날 사 온 소금빵을 곁들여 먹고 집을 나섰다.


이맘때쯤 덕수궁 주변을 걷기 좋았던 기억이 있어 근처의 해가 잘 드는 카페를 찾아갔다. 항상 이용하는 지도 앱에 따로 휴무 공지가 나오지 않아 당연히 열었겠다고 생각했는데… 멀리서부터 어두컴컴한 입구가 보였다. 주변의 들어갈 만한 카페는 한 군데 빼고 모조리 닫혀있었고 열려 있는 카페는 사람이 차고 넘쳤다.


다행히 조금 걸으면 나오는 카페가 연중무휴라고 쓰여 있어 그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계속해서 걸어도 카페가 나오지 않았고 결국 “길 없음”이란 표지판까지 마주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 카페는 고깃집과 이어져 있는 카페였고, 일행과 내가 고깃집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바람에 더 멀리까지 이동한 것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찾아간 카페는 사람이 거의 없어 편하게 음료를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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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 좋은 날의 정동길과 덕수궁 돌담길은 언제 걸어도 기분이 좋다. 정동길의 빼곡하게 늘어선 나무와 멋스러운 건물은 잠시 유럽에 온 듯한 기분까지 들게 한다. 덕수궁 돌담길의 기와, 위로 늘어진 녹음, 그리고 멀리 보이는 현대적인 건물의 조화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계속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잠시 덕수궁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도심 속의 숲에 들어온 것 같아 상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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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고 잠시 덕수궁을 구경하다가 예약한 장소로 향했다.

 

낮에는 대화 없는 사색의 공간, 밤에는 와인과 함께하는 공간으로 운영되는 곳인데 경치가 마음에 들어 꼭 가고 싶었다. 도착하고 20분 정도가 지나자 하늘이 물들기 시작했다. 주황색으로 시작해 점점 분홍빛으로 물들더니 이내 빨갛게 하늘을 장식했다.


일행과 나 모두 술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인데 와인은 쳐다보지도 않고 하늘에 넋을 빼앗겼다. 해가 지는 동안 큰 창문 너머의 하늘을 보며 감탄이 끊이지 않았다. 사진으로는 풍경이 다 담기지 않아 열심히 찍다 포기하고 소파에 늘어져 일몰을 감상했다.


11일 저녁, 독특한 음식을 만들고 싶었다. 얼마 전부터 빠에야가 먹고 싶었기 때문에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가며 만들기 시작했다. 해감한 바지락을 양파, 마늘과 같이 볶다가 물과 스톡을 넣어 끓여냈다. 건더기는 건져내고 바지락 육수에 쌀을 넣어 불려주었다. 스페인 사람이 보면 기겁할만한 레시피겠지만 집에 현미 말고 다른 쌀이 없어 별수 없었다.


맛있는 올리브유에 잘게 썬 양파와 토마토를 볶고, 물기가 없어진 후에는 잘 불린 쌀을 넣어 기름을 먹여가며 볶는다. 남은 바지락 육수, 파프리카 가루와 사프란을 넣고 쌀이 익을 때까지 끓이면 된다. 간만에 먹은 빠에야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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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점심, 남은 고사리 나물로 파스타를 해 먹었다. 고사리는 들기름과 잘 어울리기 때문에 고소한 크림 파스타와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마늘은 얇게 썰고 캐슈넛 스프레드는 따뜻한 물에 풀어서 준비한다. 기름에 마늘과 고사리를 볶다가 향이 올라오면 물에 푼 캐슈넛 스프레드를 넣는다. 물기가 사라지면 두유와 약간 덜 익힌 파스타면을 넣고 농도가 나올 때까지 졸인다. 캐슈넛 스프레드를 구매하면서도 이걸 요리에 쓸 수 있을까… 싶었는데 걱정이 무색한 맛이었다.


저녁에 동생이 집으로 돌아오며 나흘간의 연휴는 끝이 났다. 쉬는 동안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고 푹 쉬었더니 풍족한 기분이 들었다.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지낼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더 어른이 된 기분도 들었다. 나를 챙기기도,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하며 쉬는 날을 더 잘 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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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예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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