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산속 별장에 파묻히기 [여행]

무위도식이 필요할 때 떠난 즉흥여행
글 입력 2022.09.01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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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하는 활동이 부담스럽지 않다. 소위 혼자놀기 만렙이다. 처음에는 가볍게 혼밥과 혼영(혼자 영화보기)을 시작으로 코인노래방, 쇼핑, 게임을 했고 나중에는 혼술, 혼뷔페까지 섭렵하였다. 그런데 20대 후반이 되도록 혼자 여행은 가보질 않았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좀 황당했다. 그래서 나는 작년 여름,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났다.


그때 당시에는 영어학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학원 방학이 이틀을 남기고 끝나갈 무렵이었다.

 

‘이번 여름은 휴가 없이 이렇게 끝나는 건가.‘

카페 창밖으로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근데 아마 성수기라서 갑자기 예약할 수도 없을거야.’

 

무기력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체념하듯 생각하다 뭔가 이상하다 느꼈다. 가고 싶으면 가면 되지. 왜 이러고 있지? 같은 곳에 있으니 생각도 같은 곳에서 맴도는 느낌이었다. 물음표를 띄우고 나니 못 갈건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 성수기이든, 시간이 없든 여행에 가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필요한 건 의지였다.

 

 

 

산이 포근하게 감싸는 숙소를 찾고 싶어



그 생각이 들자마자 숙박 애플리케이션을 켰다. 예상대로 당장 내일과 모레 묵을 수 있는 괜찮은 숙소는 이미 만석이었다. 숙소의 퀄리티는 포기하기로 했다. 그러나 원하는 조건은 하나 있었다.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물이 흐르는 곳을 찾고 싶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에어비앤비를 검색했다. 마찬가지로 거의 예약이 꽉 차 있었는데 우연히 강원도 홍천 공작산 안에 있는 별장을 발견했다. 호스트님이 혼자 살고 계시는 2층짜리 집이었다.

 

사진으로 확인한 숙소의 모습은 흰색 벽에 빨간색 테라스가 포인트인 커다란 별장이었고, 내부는 1층의 홀이 2층의 천장까지 뚫려있는 시원한 구조였다. 코난 극장판에 등장하는 산속 별장이 떠오르는 외관이었다. 숙소는 2층의 남는 방인 듯 했다. 문제는 숙소가 산속에 있어서 차가 없으면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버스는 거의 오지 않았고, 택시는 생각보다 비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호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기만 하면 픽업을 나와주겠다는 답장이 왔다. 야호 다행이다. 나는 바로 숙소를 잡고 버스표를 예매했다. 그렇게 즉흥적으로 계획없이 여행을 가게 됐다. 목적은 하나였다. 자연 속에 파묻히다 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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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홍천까지는 족히 3시간. 멀미가 심해서 버스를 잘 이용하지 않는 편인데 그때는 그것도 괜찮을 만큼 자연 풍경을 보는 게 절실했다. 단 1박 2일인데도 첫 혼자 여행이라 그런지 설레었다. 성인이 되고 친구들과 처음 떠나던 내일로 여행만큼 신나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것도 매우 오랜만이었다. 숙소 소개 글을 인상 깊게 본 덕에 설렘이 가중되기도 했다. 호스트님의 글에서 느껴지는 성격이나 가치관, 에너지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사장님과도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오르막길의 케이블카처럼



버스를 타고 가는 여행은 길고 길었다. 거의 세 시간의 탑승 끝에 홍천 버스 터미널에서 내릴 수 있었다. 내리니까 어지러워 세상이 돌았다. 차가 막혀 도착했을 땐 호스트님이 역 앞에 이미 마중 나와 계셨다. 먹거리를 전혀 챙겨오지 않아 급한 마음에 역사 편의점으로 들어가 간단한 식삿거리를 샀다. 컵라면 두 개와 컵밥 하나, 물과 과자도 하나씩.


횡단보도를 건너 만난 호스트님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회색이지만 풍성한 곱슬머리에 건강해 보이는 눈동자와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코발트블루의 반바지 차림에 힘찬 발걸음이 잘 어울렸다. 나중에 듣고 보니 나이가 60대 후반이라 하셨는데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숙소는 지도대로 산길 속으로 계속 들어가야 했다. 오르막길 도로에서 작은 차는 안쓰러울 정도로 털털거리며 느리게 움직였는데, 옆으로 쌩쌩 올라가는 차를 보자니 마치 중력이 우리에게만 작용하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괜찮았다. 홍천 시골의 경치가 빠르게 지나가지 않아서 좋았고, 아저씨와 더 오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다.


나도 처음 보는 사람과 이야기를 잘하는 편인데 아저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더 잘 털어놓았다. 왜 아가씨 혼자 이곳에 왔는지 궁금해하는 것도 잠깐. 가족부터 고향, 그동안 해왔던 일까지 이러저러한 인생의 요약본을 숙소까지 갈 동안 알차게 펼쳐 놓았다.

 

소박한 산길을 올라가는 내내 왼편으로는 저수지를 보고 오른편으로는 길가에 붙어있는 알록달록한 들꽃 무리를 보았다. 백미러로 보이는 산과 파란 하늘에 걸린 구름도 보았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나는 그런 풍경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신기한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잠깐 지나치며 담기에는 아까운 풍경이었다.

 

 

 

쉴 때도 효율성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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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도착하니 배가 너무 고팠다. 인천에 있을 때는 끼니도 잘 챙겨 먹지 않았는데 이곳에 오니 입맛이 돌았다. 편의점에서 장을 대충 본 것이 후회됐다. 그러나 내게 있는 식량은 작은 컵라면 두 개와 육개장 컵밥 하나였다. 일단 컵라면을 먹기로 했다. 하나를 비우고 나니 더 허기졌다. 에피타이저를 먹은 것처럼 입맛이 돈 것이다. 이미 올라와서 다시 내려갈 수도 없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의무적으로 식사를 하던 내가 웬일이람. 있는 식량을 다 먹어버릴 수는 없었다. 과자라도 사오길 다행이라 여기며 아쉬움을 달랬다.

 

내 방은 통창이었고 대각선 옆으로는 산이 보였다. 막힌 게 없어서 탁 트인 하늘도 보였다. 그러나 감상도 잠시, 컵라면을 먹고 맘이 급해진 나는 아저씨가 잠깐 마당에 앉아서 쉬자고 하는 것도 거절하고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때는 세시가 넘어있었다. 쉬러 왔는데도 마음이 급했다. 하루밖에 없으니까 자연을 얼른 느껴야 할 것 같았다.


바램처럼 공작산은 앞을 봐도 뒤로 돌아도 산으로 둘러싸일 수 있는 곳이었다. 숙소를 나와 무작정 길을 따라 걸었는데 문제가 있었다. 습하고 무더운 여름철, 길가에 사람은 없고 방금 비가 그쳐서 모든 벌레가 땀나는 짐승에게 달려들었다. 그건 바로 나였다. 귀 양 옆에서 서라운드로 앵앵대는 소리가 공격적이었다. 이게 아닌데. 나는 풍경을 구경하다가도 카메라를 놓지 못해 셔터를 누르며 벌레를 쫓으며 정신없이 걸었다.

 

 

 

먹고 자고 쉬는 무위도식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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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기 전 머릿속으로 그린 그림은 여유롭게 산책하고 사진도 찍었다가 풍경을 보며 한적한 저녁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오랜 버스 승차로 체력이 떨어져 있었고, 급한 마음으로 밖에 나와 걸었더니 피곤하기만 했다. 결국 나는 주변만 확인한 후에 방으로 들어와서 뻗어버렸다. 잠이 쏟아졌다. 다섯 시가 되어도 눈이 안 떠져서 겨우겨우 정신을 차렸다. 자는 와중에도 눈을 떴다 감으며 창밖으로 보이는 산과 푸르른 하늘을 깜빡깜빡 담았다. 그 풍경이 아까워서 ‘아 이제 일어나야 하는데.’ 하고 되뇌었다.


다섯 시 반쯤에 눈을 뜨니 날씨가 완전히 개어서 화창했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비가 오고 있었는데 자는 동안 흐린 하늘이 맑아지고 방 안으로는 햇빛이 쏟아졌다. 기절하듯 잔 낮잠도 오랜만이었다. 잠을 깰 겸 커피 믹스를 하나 타서 저수지 쪽으로 내려갔다. 양옆으로 산이 있는 저수지는 엄청 컸다. 지나가는 고양이 말고는 사람이 없었다. 쉴 새 없이 흘러가는 물을 보며 커피를 마시고 멍을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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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풍경을 가만히 보며 앉아있다 보니 이 배경으로 두고 만찬을 먹지 않는건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있으면 산자락을 타고 노을도 질 거고 비도 그쳤는데 고기를 안 먹는 건 손해처럼 느껴졌다. 아까와 같은 후회가 몰려왔다. 여행을 오면서 먹거리를 고민하지 않은 건 실수였구나. 그렇게 나는 갑자기 기본적인 욕구에 충실해져서 아저씨께 부탁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머릿 속은 고기로 가득 찼다. 멋진 저녁 식사를 상상하며 종종걸음으로 숙소를 향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마침 아저씨가 마당에서 골프 연습을 하고 계셨다. 살짝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마트로 데려다주실 수 있냐고 물었다. 괜히 민망해져서 여기 오니까 배가 고프다는 둥 바비큐를 먹어야 할 것 같다는 둥 TMI를 방출했다. 그리고 넌지시 함께 먹자고도 부탁했다. 아저씨는 아주 흔쾌히 응해주셨고 우리는 또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며 마트에서 소고기와 삼겹살을 사 왔다.


둘 다 바비큐에 서툴러서 불을 붙이는 데만 애를 먹었다. 숯에서 나온 가루가 고기에 다 붙기도 했다. 또 갑자기 마주 보고 같이 식사하려니 어색했다. 낯가리는 자아를 급하게 숨기고 외향형 자아를 꺼냈다. 고기가 익으니 이야기가 시작됐다. 그렇게 노을이 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면서 식사했다. 숯 향이 벤 삼겹살은 역시 맛있었다. 우리는 열 시가 넘도록 그 앞에서 별의별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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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라보는 당신과 나의 태도


 

아저씨의 인생 이야기를 엄청 많이 들었다. 맥주 한잔하다 보니 재밌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본인의 삶과 행복, 자식 이야기, 앞으로 쓸 ‘시비프스의 회상’이라는 책, 죽음에 관한 견해, 그동안 만났던 옛 연인들, 세상을 떠난 친구들과 그것을 바라보는 당신의 생각, 최근 연애사까지. 상당한 고뇌와 경험으로 점철된 이야기였다. 책도 추천받았다. 알베르 까뮈의 수필집이 있다는 것과, 루소의 수필집, 헤밍웨이의 삶과 죽음 등.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자신이 봤던 것을 여러 가지로 추천해주셨다. 해가 지니 나무에 매달린 전구에서는 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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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비가 쏟아졌다. 간이 처마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2차를 했다. 그런 마당 있는 집을 가지면 다양한 공간을 한 곳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게 좋아 보였다. 아저씨는 해본 것도 많았고 취미도 많았다. 과거에는 성악도 하셨다고 했다. 아저씨 노래를 영상으로 보고, 가장 좋아하시는 노래를 들었다. 간간히 생기는 침묵은 빗소리가 채웠다. 그의 삶은 여유롭고 자유로웠다. 과거의 일에서 후회가 없으면 거짓말이겠지만 적어도 현재는 만족스럽다고 했다. 아쉬운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홀로 원하는 것들을 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게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랑이라고. 과거의 연인들과 사랑은 아쉬워도 추억할 수 있어 좋아 보이는 듯했다.


아저씨와 저녁 시간을 가지며 혼자 온 여행의 외로움도 잊을 수 있었고, 나보다 많이 살아본 자의 경험과 느낀 점을 들으며 현재 나의 상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의 고민이 생각보다 무거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먹고 자고 쉬고 싶은 단순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게 정말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인데, 그동안 무시하고 있었다. 역시나 그날 밤은 너무 잘 잤다. 아침에는 마당에 나가 식사를 했다. 산을 보면서 밥을 먹으니 찬이 없어도 맛있었다. 여름이라 공작산 초입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어 길이 안 보였다. 캠핑하던 이들이 나를 불러세우며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산을 간다고 하니까 입구를 알려줬다. 인적 드문 곳에서의 아침 산책은 살짝 으스스하기도 했지만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뜻밖의 만남과 새로운 삶의 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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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는 그 큰 별장에서 혼자 살지만, 이곳이 아주 맘에 든다고 했다. 여름도 좋지만, 겨울의 풍경이 그렇게 절경일 수가 없다고. 새벽녘 눈이 차르르 내린 공작산이 정말 아름다웠다고 했다. 실제로 이곳에 살며 안정되고 행복해졌다고도 말했다. 혼자서도 취미가 많아서 재밌게 사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이틀간 본 취미만 해도 여러 개였다. 아침에는 노래방 기계로 가곡을 부르고, 낮에는 마당을 가꾸다가 골프 연습을 했다. 글도 쓰고 가끔은 나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사람에 대한 외로움도 있으실 것 같은데, 그 적적함을 달래려고 에어비앤비를 하시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즉흥적으로 갑작스레 떠난 여행이기도 했고, 기간도 짧았고, 특별히 뭘 보고 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혼자 떠나서 내 목소리와 내 기분에, 상태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여행에서 느끼는 감상들도 더 또렷이 느껴졌다. 무언가를 보고 체험하고 느끼러 가는 여행만 해오다가 이렇게 다녀와 보니 사실은 먹고 자고 쉬는 무위도식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걸 알았다.

 

새로운 삶의 모습을 보여준 산장 아저씨를 보면서 행복이 별거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홀로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 외로움을 슬프게만 느끼지 않는 것. 그 두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었다.


짧은 1박 2일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 혼자 여행의 매력을 알게 됐다. 그 후로 두 번의 국내 여행을 다녀왔다. 한 장소에 더 오랫동안 머물며, 내 생각과 감상에 귀기울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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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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