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갑자기 창밖을 보고 싶었어 [여행]

글 입력 2022.08.3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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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다. 아침잠이 많은 내가 눈이 번쩍 뜨였다는 것에 놀랄 틈도 없이 어떤 생각 하나가 머리를 사로잡았다.

 

‘지금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보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이상한 기대에 가득 차 고민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지금 커튼을 열면 창을 통해 들어온 빛으로 방안이 환해질 테고, 그렇다면 창가 바로 옆에서 자고 있는 K가 깰 것 같아 잠시 고민을 했다. 하지만 이미 내 움직임으로 인해 잠에서 깬 K가 쟤 뭐야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

 

어젯밤 우린 고성으로 여름휴가를 왔다. 00지망생(백수)인 나는 직장인 K의 퇴근시간에 맞춰 그녀의 직장으로 향했고 어쩌다 보니 사장님과 사소한 대화도 나누게 되었다. 무슨 일하냐는 질문에 ‘(쉬고 있지만) 00해요’라고 소심하게 답했고 K는 ‘얘 글도 써요’라며 한 마디 얹어주었다. 정작 당사자인 나는 사람들에게 글을 쓴다는 이야기를 못 하고 있는데 친구인 K는 내 이름 석 자에 글 또는 작가라는 단어를 흔쾌히 붙여주곤 한다. 그럴 때마다 부끄러워 콧김이 쉭쉭 나오지만 어쩐지 광대는 슬쩍 올라간다. 코로나가 안겨준 마스크를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는 순간이다.

 

2시간 30분을 달려 고성에 도착한 우리는 숙소에 짐을 풀어두고 간단히 요기할 것들을 사러 밖으로 나갔다. 해수욕장 바로 앞에 숙소를 잡은 덕분에 편의점으로 향하는 내내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과 해수욕장의 묘한 파란 조명 그리고 저 멀리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뿐 인 풍경이었지만, 아마 그때부터 내일 아침 해가 뜬 바다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밤바다는 파도가 거세고 어두워 무섭지만 햇빛을 받고 있는 바다는 한없이 아름답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커튼 젖혀도 돼?

-(고개 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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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가 확신으로 가득 찬 순간이었다. 나의 예상대로 기분이 엄청 좋아졌다. 일출이라기엔 이미 해가 떠버렸지만 새벽빛을 약간 머금은 바다의 모습은 여행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야 이거 봐. 진짜 예뻐.

-우와 예쁘다. 근데 너 왜 일어났어?

-몰라.

-난 너 일어나길래 화장실 가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창가로 가서 뭐하나 했음.

-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

-눈이 확 떠졌는데 갑자기 창밖을 보고 싶었어.

-그래? 신기하다.

-근데 화장실도 가고 싶다.

-야 이쪽으로 누워서 보면 더 예쁨.

 

사진도 몇 장 찍고 화장실도 다녀온 뒤 대충 옷을 껴입고 밖으로 나갔다. 비 소식이 무색할 정도로 맑은 하늘은 우리의 기분을 한없이 들뜨게 만들었다. 입추가 지난 뒤 급격하게 가을이 찾아오고 있었고 아침 바닷바람은 꽤나 쌀쌀했다. 짧은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잠옷으로 갈아입은 나와 K는 이번 고성 여행의 유일한 계획인 스노클링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다시 잠에 들었다.

 

*

 

나는 일출에 대한 꽤 재미있는 추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추억은 일출에 대한 첫 기억이기도 하다. 때는 아주 오래전 꼬꼬마 시절. 정확한 시점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었고 분홍색 겨울 잠바를 즐겨 입는 아이였다. 우리 가족은 해남 땅끝 마을로 새해 일출을 보러 갔는데, 어두운 새벽길을 지나 도착한 일출 명소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부지런히 도착한 우리는 꽤 좋은 명당을 차지할 수 있었고 추위에 떨며 일출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검정 옷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말을 걸어왔다.

 

방송국에서 나온 팀인데 인터뷰를 진행하고 싶다, 혹시 가능하시냐 등의 이야기를 했고 흔쾌히 수락한 부모님은 열심히 인터뷰에 답했다. 그 당시 꽤 유명했던 프로그램이라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언니와 나는 어느새 일출은 뒷전이고 처음 보는 방송국 카메라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한창 인터뷰를 진행하던 중,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출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해 뜬다를 외쳤고 재빠른 방송국 스태프가 우리 가족에게 떠오르는 해를 보며 큰 함성을 날려달라고 했다. 해를 향해 열심히 함성을 지르던 우리 가족은 새해 첫 일출에 대한 두근거림보다는 텔레비전에 나온다는 기대감에 더 두근거렸을지도 모른다.

 

한 번 더 부탁드려요! 더 크게 한 번 더! 등을 외치며 서너 번 함성을 지르는 모습을 담은 뒤, 땅끝을 알리는 문구가 써져 있는 비석을 향해 키순으로 나란히 세우고는 새로운 일 년을 맞이하는 비장한 표정을 지어달라고 주문하셨다. 제법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는 생각에 뿌듯하게 촬영을 마친 우리 가족은 피디에게 방송 일자를 받은 뒤 이미 다 떠버린 해를 뒤늦게 볼 수 있었다. 이런 건 처음인데 안 떨고 제법 잘 해냈다며 우린 방송 체질일지도 모른다는 너스레를 떨며 따뜻한 새해의 기운을 가득 받아냈다.

 

며칠 뒤, 본방사수를 위해 텔레비전 앞으로 모인 우리 가족은 예상과 다른 모습에 배를 잡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추운 날씨 탓에 두 볼이 빨개진 채 연신 훌쩍거리는 코와 거세게 부는 바닷바람에 사방으로 날리는 머리카락은 코미디를 방불케 했고,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고 생각했던 비석 장면에서는 넷 다 웃음을 참느라 콧구멍이 벌렁거리고 입꼬리가 실룩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온 식구가 새해부터 방송 데뷔(?)를 했다며 기분 좋은 웃음을 남겼다.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면 혹시 그때의 기억이 00지망생(백수)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하고 예상해 보지만,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기억들은 무수히 많기에 하나의 추억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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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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