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언니의 지지 않는 여름이

언니, 나의 언니
글 입력 2022.08.28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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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가을 냄새가 난다.


언니한테 쓰는 편지는 항상 여름에 시작했는데 올해는 이상하게도 여름이 다 가도록 한 줄도 완성되지 못했어. 이상한 시간이야. 2022년이라니.

 

준비되지 않은 가을 공기랑 바람을 맞으니까 재채기가 늘었어. 비염이 더 심해졌거든. 언니랑 같이 있으면 항상 내가 감기 걸린다고 호들갑 떨던 때가 생각나. 그게 미안해서 언니가 내 감기를 다 가져갔을까? 언니가 떠난 이후로 감기로 앓은 적이 없네. 아 여기는 코로나라는 이상한 바이러스가 생겼는데, 그거는 한 번 걸렸다. 언니가 걸려본 적 없는 거라 막아줄 수가 없었나?


어쨌든 올해 여름은 유독 햇빛이 강해. 나는 언니와 이야기했던 대로 머리를 기르고 있어. 층이 많이 나버린 머리라서 기르는 게 힘든데도 꼬박꼬박 기르고 있어. 기특하지.


어깨를 경계로 하고 방향을 달리하는 머리를 마른 손가락으로 빗어내리던 손길을 아직도 기억해. 나는 언니의 성마른 빗질을 닮은 빗으로 머리를 빗고 또 빗어. 참을성이 부족한 내가 어느 날 머리카락을 댕강 자르고 왔을 때 언니가 그랬지. 내가 죽기 전엔 너 머리 기는 거 보겠냐면서... 결국 보지 못하고 떠난 언니라 그 말이 어찌나 원망스럽던지.

 

그래도 길러보려고 애를 쓰고 있어. 거추장스럽게 흘러내리는 바람에 대부분 묶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야. 덕분에 늦여름까지 목덜미가 새까맣게 타고 있어. 이렇게 타버린 피부는 언제쯤 벗겨지고 새로운 결로 자랄까. 익숙한 것들 사이에 끼어든 새로운 것들이 낯설어. 언니가 없다는 것이 문득 낯설어지는 것처럼.

 

가만히 있어도 시간이 흐른다는 건 그런 것 같아. 날 구성한 것들이 모두 닳아없어지고 나면 언니가 날 알아볼 수 있을까 어리광 담은 걱정도 해. 언니는 워낙에 기억력이 안 좋았으니까. 그런 언니가 내 생일은 꼬박 기억하는 바람에 내 생일이 올 때쯤이면 부산스러운 언니 목소리가 생각나서 마음이 조금 아려.


목 아래서 들리는 비명은 누구의 목소리일까 괴로워하던 밤도 많이 지나갔어. 내일이 오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고 울던 어두운 아침도 많이 옅어졌어.


지난해까지 언니한테 써왔던 편지를 하나씩 읽어봤어. 지금 생각하면 수신인이 없는 것이 다행일 만큼 부끄러운 감정들로 축축하게 물들어 있는 것들. 모든 편지가 세월에 부르터서는 모퉁이가 둥그렇게 낡아있더라. 자그마치 5년의 추모가 담겼는데도 상자 하나를 다 못 채울 정도로 단출한 모습인 것이 얼마 지나지 못한 언니의 시간 같아서 뒤늦게 눈물이 조금 났다.


얼마 전에는 H를 만나서 언니 이야기를 좀 했어. 그것도 참 오랜만이었네. H도 언니가 생각날 때면 꺼내보는 것들이 있대. 언니도 알다시피 H는 뭘 길게 적고 이런 타입이 아니니까 그냥 찍었던 언니 사진들만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그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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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는 사진이 바래는 것을 매일, 매달, 매년 확인하면서 시간이 지남을 느끼고 있다고 했어. 사진이 그렇게 빨리 바래는지는 처음 알았대. 그것들이 달갑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만큼 우리가 괜찮아졌고, 괜찮아지고 있음의 증명이라고 하면 그것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고 해.

 

그리움의 크기는 시간에 비례하진 않는 거 같아. 곳곳에 복병처럼 숨은 것들이 가끔 우리를 넘어뜨릴 것 같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 잃어본 것들이 있다는 건 그래서 서글픈 것 같아. 무언가의 예행연습이 된다는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란 걸 우리 모두가 알고 있잖아. 머리가 길어서 마침내 언니가 노래를 부르던 생머리가 완성이 될 때면, 언니가 꼭 가보고 싶어 한 체코의 빨강 주황 담벼락 마을 사이에서 길을 잃을 때면, 매번 언니가 사랑한 노래가 울리는 계절이 오면 나는 또다시 편지지를 꺼내겠지만. H는 또 언니 사진을 꺼내겠지만. 그래도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괜찮아져있겠지.


언니가 사랑한 내 웃음이 상하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 맡은 일이라 나는 그것만 열심히 지키려고 해. 언니를 보냈던 여름은 이젠 슬프지만은 않아. 언니랑 태양이가 놀고 있는 동산에 가면 언니 이야기도 들려줘. 참, 다음 달에는 언니가 지내던 독일에 가. 언니가 살던 집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녀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H한테 줄 수 있는 사진이 하나 더 늘어나는 거잖아. 다음 주에는 H와 함께 언니가 담겨있을 필름을 현상하기로 했어.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일이라 긴장이 되긴 해. 언니가 사진에서 웃고 있었으면 좋겠다. 내 기억 속의 언니는 항상 웃고 있어서 다행이야.


여름의 끝자락에서, 언니의 지지 않는 여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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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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