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가 시간에 대해서 상상하는 경우 [영화]

<박하사탕>의 시간과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시간
글 입력 2022.08.19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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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가끔씩은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사랑했던 연인과 헤어지기 전으로, 부모님의 임종 순간 이전으로, 부장에게 큰 실수를 했던 회식 전날로. 행복했던 먼 과거의 일을 떠올리면서, 혹은 끔찍했던 어제를 곱씹으면서 시간을 되돌아가는 상상은 행복하고, 어쨌거나 시간은 결코 되돌아가지 않으므로 결국 불행하다.


최근 시간에 대한 영화 두 편을 봤다. 하나는 시간을 되돌려야 사는 사람의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시간을 거슬러서 사는 사람의 이야기다. 두 작품 모두 호평을 받았던 작품임을 알고 있었고, 영화를 보면서 내가 너무 늦게 봤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시간을 되돌릴 수 있기를 잠깐 동안 바랐다.

 

 

 

미래가 존재하지 않을 때 - <박하사탕>



한 남자가 있다. 취한 것 같기도, 애초에 미친 것 같기도 한 남자가 철교 아래 누워서 울고 있다. 일어난 남자는 흥이 한껏 오른 야유회 속에 불쑥 끼어든다. 다행히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지만(“이게 누구야. 너 김영호 아니야?”) 정작 영호는 그를 향해 반갑게 몰려드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듯 보인다.

 

한동안 날뛰던 영호는 철교 위에 올라서서 달려오는 기차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영호라는 인물의 최후처럼 보이는 장면 앞에서 우리는 의문을 던진다. 그는 왜 미쳤으며, 결국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가.

 


[크기변환]박하사탕 스틸컷.jpg

 

 

<박하사탕>은 여러 차례의 플래시백을 통해 사흘 전의 일부터 더 먼 과거의 사건까지 영호의 생애를 보여준다. 우리는 영화가 보여주는 영호의 과거를 역순으로 조립하며 그가 철로 위에 서야만 했던 이유를 이해해간다.

 

영화적 시간에서 광인 > 악인 > 선인의 순으로 등장하는 영호는, 거꾸로 말하면 삶의 시간에서 선인에서 악인으로, 그리고 광인으로 점차 변해갔다는 것. 결국 그가 관통해온 현대사적 사건과 몸소 겪어야 했던 삶의 고통이 순수했던 그를 철로 위로 몰아세웠다는 것.

 

선인에서 악인으로의 변화는 삶에 대한 집착이 만든다. 더 ‘잘’ 살고자 하는 욕심으로 기꺼이 악하게 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는 흔하게 목도한다. 하지만 악인이 광인으로 변하는 과정은 그 결이 전혀 다른데, 광인은 삶에 대한 미련이 기어이 사라졌을 때, 즉 미래가 존재하지 않을 때 비로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호가 광인으로 변한 순간은 언제인가. 의식을 찾지 못한 채 병실에 누워있는 순임을 만난 후다. 순임은 그의 첫사랑이었고, 그를 첫 번째로 망가뜨린 시절의 사람이었고, 그가 차마 부르지 못하고 떠나보내야 했던 연인이었다.

 

어쩌면 악인이 되어 타락한 그를 구원해줄 유일한 인물이었기에, 그녀와 정상적으로 재회하는데 실패한 영호는 미래를 포기한 광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 미래가 없어졌으므로 그에게 남은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다. 이제 우리는 철로 위 영호의 아찔한 외침을 이해할 수 있다. “나 다시 돌아갈래!”


영화의 마지막 장면. 영호는 다시 한 번 철교 아래에 누워있다(사실은 이 장면이 영호가 철교 아래에 최초로 누웠던 때였을 테다). 영호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배음으로 깔리는, 1979년 야유회의 회원들이 부르던 노래이자 1999년의 영호가 불렀던 노래 <나 어떡해>의 가사는 이제 이런 자조로 들린다. “다정했던 ‘내’가, 상냥했던 ‘내’가 그럴 수 있나.” 철교 아래에 울면서 누운 영호와, 이름 없는 꽃 옆에 누운 영호는, 같지만 이미 다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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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로 시간을 거스르기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그리고 이어서 보는 다른 한 편의 영화. 첫 장면은 폭우가 몰아치는 날, 병실에 누워 임종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한 노인과 그녀의 곁을 지키는 딸의 대화로 시작된다. 거꾸로 가는 시계가 걸린 기차역에서 시작되는 노인(데이지)의 회상은 앞으로 진행될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 진실이라 주장하며 나아간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일단은 제목 그대로 ‘시간’에 대하여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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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가 가지고 있는 일기장은 벤자민 버튼이라는 남자가 생애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쓴 회고록이다. 벤자민은 태생부터 기이하고 위태롭다. 생모가 그를 낳은 직후 사망했을 뿐 아니라, 그 자체도 노인의 신체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 아이의 울음소리를 내는 노쇠한 육체는 그의 생부에 의해 어느 노인 요양시설에 버려진다. 시설 운영자 퀴니의 보살핌 덕에 벤자민은 무사히 성장하고, 그의 육체는 점점 젊어진다.


노인에서 중년으로, 다시 청년으로 변해가면서도 벤자민은 일상을 살아간다. 탄생과 노화를 거쳐 죽음에 이르는 일반적 생물학 법칙을 거스르는 기이한 육체로 뱃일을 하고, 전쟁에 나가고, 사랑을 속삭이는 벤자민의 삶은 평범한 인물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렇듯 거의 정상처럼 보이는 벤자민의 시간이 다시금 위태롭게 느껴지는 순간은 곧 찾아올 텐데, 그의 연인 데이지와의 사랑이 깊어졌을 때다.


누군가의 시간만 거꾸로 간다면, 타인의 시간과의 균열은 필연적이다. 데이지는 벤자민과의 결혼, 출산, 양육, 노후, 사망의 순차적 과정을 꿈꾼다. 하지만 벤자민의 시간은 결혼과 출산 이후 (자기 자신의) 양육 단계에 오래 머물러야 한다. 같은 시기를 추억할 수 있지만 같은 시간을 공유할 수 없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어긋나는 시간은 특히나 가혹할 테다. 이 가혹함을 묵묵히 견디는 벤자민과 데이지는 아름답고, 그래서 잔잔하게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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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벤자민 역시 삶과 사랑의 여러 장면들을 통과하는데, 영호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눈에 띈다. 시간을 통과하며 영호는 무너졌고, 벤자민은 굳건했다는 것. 아내 데이지와 딸 캐롤라인을 남겨두고 스스로 떠날 수 있을 정도로 벤자민 버튼은 충분히 성숙했다는 것. 벤자민에 한정한다면 이 영화는 시간이 아니라 성장에 대한 이야기다.


영호는 뒤로 돌아 지나간 순간들을 휘청이며 되짚어 가는 것처럼 보이고, 벤자민은 (육체로는) 뒤를 보며 오지 않은 순간들을 향해 꼿꼿이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과 다르게 마주하는 두 개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시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기로 한다. 시간은 되돌아가지 않으며, 오직 어긋날 수만 있다. 그래서 시간은 잔혹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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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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