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유행처럼 번지는 '놀이'의 행위가 어색하다면 - 2부 [문화 전반]

글 입력 2022.08.15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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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일종의 ‘놀이’이다. 암묵적으로 관객과 배우는 약속을 하고 일정한 규칙에 따라 놀이가 이루어진다. 일상과 단절된 무대와 객석 위에서 관객과 배우는 자발적으로 놀이에 참여하며, 곧이어 완벽하게 몰입한다. 또한 연극 안에서 우리는 가면을 쓰고, 이 은밀함 속에 자신을 감추면서 평범한 세상에서 벗어나 있음을 즐긴다.

 

 

 

연극 <카사노바>에서 발견되는 '놀이'의 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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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4일부터 24일 국립 정동극장-세실 에서 공연한 <카사노바>에서 이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마치 런웨이 무대처럼 객석 사이사이를 무대로 만든 <카사노바>에서는 관객은 또 다른 배우이다. 연극의 말미에 공연장 전체가 전시 공간이 되고 관객은 ‘전시를 관람하러 온 관객’을 연기한다. 이처럼, 관객은 매번 다른 관객이 되어 <카사노바>라는 놀이에 참여한다.


그리고 극 안에서도, 주인공 카사노바는 ‘놀이’를 한다. 카사노바는 1,000명의 여자를 기념하는 물건을 전시하는 회고전의 마지막 쇼케이스를 채우기 위해서 “마지막 운명의 여자”를 쫓는다. 건축가의 아내, 공항 보안검색대 요원, 핀란드 학자, 아티스트, 전시기획자 등 카사노바는 자신의 방황을 끝내줄 마지막 여자를 찾아서 이 모든 여자와 섹스한다. 현실 세상의 규칙 도덕은 다 버리고, 자신만의 규칙으로 ‘섹스’라는 자유를 행한다. 함께한 여자마다 ‘너는 내 운명이야’라고 외치지만, 카사노바는 한 여자와 있는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다.

 

그리고 놀이에 참여하는 여자, 카사노바 모두 ‘긴장’을 느낀다. ‘놀이’의 또 다른 요소 중 하나인 ‘긴장’은 불확실성과 우연성을 의미한다. 안정성은 보장되지 않지만, 마치 스포츠처럼 이 놀이는 일정한 틀 안에서, 일상과 단절된 채 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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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2022 국립 정동극장_세실 창작 ing 연극 <카사노바>프로그램북

 

  

<카사노바>에서 흥미로운 점은, 카사노바와 함께하는 6인의 여자 및 카사노바를 죽이고자 케비넷 메이커가 고용한 탐정 케이트 모두를 한 명의 배우가 연기한다는 점이다. 가발을 벗고 쓰고, 말투만 달리하지만 관객은 달라진 배우를 모른 척한다. 또한 배우들이 객석 사이사이에 위치한 곳(무대)에서 의상을 갈아입거나 대기하는 것도 모른척 해야 하는데, '연극'을 관람한다는 행위, 이유 하나로 관객은 기꺼이 놀이의 규칙을 준수한다.

 

2시간가량의 놀이가 끝나면, 관객들 배우 모두 일상으로 되돌아온다. 스크린이라는 거대 장막에 가로막혀 몸이 묶인 채 이성에 지배되는 영화관 내에서의 경험과는 사뭇 달랐다. 실제로 몸을 움직이는 듯한 ‘놀이’를 연극을 통해 경험했고, 객석 사이사이를 누비며 마주하는 배우들의 숨소리 및 에너지를 몸을 통해 직접 전달받았다.

 

내가 즐기고 싶은 ‘놀이’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의식’이자, 참여를 동반한 ‘놀이’. 정확히 말하면, 내가 인식해야 할 ‘놀이’의 모습이었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의 저자가 정의하는 '놀이' = "문화현상"



'놀이하는 인간'을 뜻하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의 저자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를 생리적 현상이나 심리적 행위가 아닌 “문화적 현상”이라고 규정짓는다. 해로운 충동을 발산시키는 배출구 역할을 하는 ‘발산’이나 ‘긴장 해소하기’등의 목적을 위해 ‘놀이’는 이루어지지 않고, 그렇다고 ‘본능’에 의거한 행위라고 단정하면 '놀이'에 관해 더 이상 설명할 수가 없다.

 

하위징아는 놀이를 비(非)물질이라고 이야기한다. 놀이가 벌어지는 현실은 인간 생활의 영역을 넘어서기 때문에, 합리성에서 그 기반을 찾으려는 것은 무리이다. 즉, 합리성에 근거한 논지로 '놀이'를 해석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이런 놀이의 비합리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합리적 존재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최근 친구들과 모임에서, SNS에서 유행하는 ‘지구방위대’ 챌린지를 함께 즐긴 적이 있다. 중독성 강한 BGM 비트에 맞춰, 우스꽝스럽지만 멋있어 보이는 포즈를 취하고 전방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는 챌린지다. 하면서도 영 어색해, 친구들 맨 뒤에 선 기억이 있다. 챌린지라는 놀이에 온전히 몰입하지 못하고, 나는 머릿속으로 놀이의 ‘의지’와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위징아에 따르면, ‘놀이’란 합리성에서 그 기반을 찾으면 안 된다. 놀이는 그 자체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놀이'는 가짜도, 거짓도 아닌 “문화현상"이기 떄문이다.

 

‘놀이’가 문화인 이유로 하위징아는 인간사회의 다음과 같은 원형적 행위들에 놀이의 요소가 깃들여 있음을 든다. 첫째로는 언어. 말과 언어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놀이를 한다. 모든 추상적 표현 뒤에는 은유가 깃들어 있는데, 은유라는 것은 실은 말을 가지고 하는 놀이이다. 둘째로는 신화의 세계. 원초적 인간은 현상적 세계를 신성의 세계에 위치시킴으로써 추상적 세상을 설명하려 한다. 셋째로는 의례. 처음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 아닌, 재미로 세상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생겨난 놀이가 훗날 사회가 발전한 후에 신성한 행위라는 의미가 깃들여져 의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놀이’와 ‘진지함’의 관계



그렇다면 이쯤에서 가장 궁금한 점은, ‘놀이’는 진지함과는 정반대 개념일까? 합리성에 근거한 해석으로 ‘놀이’를 바라보아 ‘지구방위대 챌린지’가 어색했다면, 나는 ‘놀이’를 재미의 일환으로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하위징아의 말에서 다시 한번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실제로 어떤 ‘놀이’는 아주 진지하다. 어린아이가 놀이를 하는 모습을 관찰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영웅이나, 마법사 등의 역할 놀이를 시작하면 아이는 매우 진지하다. 지구방위대 포즈에 동참하는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그 순간만큼 그 누구보다 진심이 되어, 실제로 방위대 포즈를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취한다. 즉 놀이와 진지함의 관계는 유동적이다. 놀이하면서 유발되는 ‘웃음’은, 생리적 행위일 뿐이다. (따라서 '웃음'은 '진지함'과 관계가 없다.)

 

*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서, ‘놀이’가 진지한 행위라면 나는 왜 ‘놀이’ 앞에서 머뭇거리는가? 누구보다 진지한 을 좋아하는 나인데.

 

그 이유는 ‘놀이’의 다른 특성에 기인한다. 바로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는 뜻이다. 재미있어서 하는 '놀이'에는 자유가 깃들어 있다. '놀이'는 의무적으로 수행해야 할 일이 아니며, 놀이의 ‘필요’는 놀이를 즐기고자 하는 ‘욕망’에 정비례한다. 카사노바의 놀이에 모든 사람이 동참할 수 없는 이유이다. 카사노바의 놀이를 즐기고자 하는 욕망이 강한 자만이 놀이를 필요로 하고 행한다. 그 사람에 한해서만, 진지해질 자격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놀이가 '의례'와 '의식'과 같은 사회적 기능으로 인식이 될 때, '놀이'는 그제야 강제성을 띤다.

 

그래서 '예술'이라는 장치가, 이러한 자발적 행위에 강제성을 더한다. ‘연극을 관람한다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놀이’를 끝까지 해낸다. 예술의 미학성이 주는 재미를 얻고자 우리는 기꺼이 돈과 시간을 지불하고 놀이에 동참한다. 마치 '제례'라는 의식이 조상님과 식사를 함께하는 역할극 놀이에 강제성을 부여해, 가족 구성원의 평안과 행복을 비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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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각종 SNS에서 유행하는 ‘놀이’의 행위나 혹은 미래에 다가올 ‘놀이’를 조금 더 유연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놀이’에 기꺼이 동참할 만한 사회적 기능이나 이유를 부여하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을 내리기 전, 또 다른 의문이 든다. 왜 이렇게까지 받아들이려고 애를 쓰는 것인가? 이런 마음을 깊게 들여다보면, 실은 내가 놀이에 동참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가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가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임지민 연출가가 이야기한 것처럼, 카사노바가 몇 명과 잤다는 사실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었냐를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 함을 이야기하고 싶다.

 

카사노바는 순간을 산다. 어떤 의도나 의미도 없지만, 순간을 살아가면서 오롯이 살아있는 육체를 느낀다. 우리도 단 한순간이지만 현재를 산다면, ‘놀이’라는 것을 통해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보통의 일상에서 이를 예술이 대신 하지만 ‘놀이’의 본질을 잘 이해하고 이용한다면, 우리는 근대의 인간을 탈피하여 진정한 '놀이하는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궁극적으로 '놀이'라는 것에 좀 덜 어색해할 수 있지 않을까.

 

 

* 참고문헌 :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 이종인 역, 연암서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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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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