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다른 세계에 편입되는 시간 [도서/문학]

목정원의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글 입력 2022.08.12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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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예술을 즐기다 보면 시간의 흐름이 야속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일정과 금전적인 부분을 모두 고려해서 관람하기에 충분히 즐겼다고 생각해도 애정 가득한 공연이 떠나가고 나면 아쉬움이 남게 된다.


목정원의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은 이렇게 사라지는 공연예술과 시간이 슬픈 동시에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책이다. 흘러가고, 소멸하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다양한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저자는 일부러 많은 시간을 기록하지 않은 채로 흘려보냈다는 글로 책의 서문을 연다. 작품이 모두 사라진 때에, 즉 저자와 독자에게 작품의 거리감이 비슷해진 시기에 글을 작성하려 했다고 한다. 글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나도 언젠가는 흘려보낸 시간과 예술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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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소리가 어떻게 울리고 또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감각하는 일은 그 공간이 어떤 공간인지를 감각하는 일과 닿아 있었다.


저자가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몸과 목소리 사용하기’ 수업에서 느낀 감상이다. 이 대목을 읽고 나는 관객으로서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라는 연극을 떠올렸다.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시몽 랭브르의 죽음과 죽음 이후에 남겨진 것들을 다루는 이야기이다.


연극에서는 심장 소리를 들려주면서 관객들의 숨을, 심장 박동을 하나로 맞춘다. 그의 심장이 어떤 소리를 내며 살아왔는지 감각하게 한다. 점멸하듯 시야를 채우는 바다와 파도 소리는 물살이, 시몽 랭브르의 삶이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떠나가는지 느끼게 한다.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를 본 날의 극장은 한 배우가 소리를 내는 공간이자 한 사람의 죽음과 죽음 이후의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대해 온전하게 고뇌하는 공간이었다.


공연예술의 가장 큰 특징은 사라짐에 있다. (중략) 관객은 사라짐의 목격자가 되어 영영 혼자만 알아볼 흐릿한 여운을 안고 극장을 나선다. 더 이상 존재가 없으므로 점차 기억은 희미해진다. 그중 어떤 기억은 되바꿀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몸에 기입된다. 그렇다 해도 흔적이 남는 것과 존재가 남는 것은 아득히도 다른 일이다. 시간예술의 근본에는 슬픔이 있다.


찬란하게 빛나며 사라지는 것들을 사랑한다. 연극 ‘알앤제이’의 학생들은 억압적인 기숙사 학교의 규율을 피해 밤마다 금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기한다. 체벌의 익숙함 속에 살아가던 이들이 연극을 하며 알게 된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렬하다.


학생1은 아침이 밝아오는 와중에도 연극을 이어 나가고 싶어 한다. 높은 곳에 올라가 “어젯밤에 꿈을 꿨어!”를 외치며 빨간 천을 던지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이 나는데, 이때 학생1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남은 학생들은 이 짧고 찬란한 시기를 기억하며 살아갈 것이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도 마찬가지다. 발레 학교 입학을 위해 마을을 떠난 빌리가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발레를 하며 반짝반짝 빛나던 그 마음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될 것이다.


이렇게 소멸하는 아름다움과 공연예술이 가지는 특성이 결합할 때 걷잡을 수 없는 벅참을 느낀다. 학생들, 빌리, 그리고 나의 기억 또한 되바꿀 수 없는 어떤 감정과 함께 나의 일부가 된다. 큰 기쁨에는 그만한 슬픔이 따른다고 생각한다. 사라지고 희미해지기에 더 아름답고, 그 아름다움에 따라오는 슬픔은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내가 노래할 줄 알면 나를 구원할 텐데”


저자는 희곡 ‘비평가’를 생각할 때면 항상 볼로디아에게 이입한다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책을 편 순간부터 글의 전체적인 톤에서 볼로디아가 생각났다. 저 대사는 볼로디아가 “내가 노래할 줄 알면 구원받을 텐데”라고 말하는 것에 스카르파가 받아치는 대사이다.


여기서 노래가 뜻하는 바는 진실한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책의 다른 챕터 ‘비극의 기원’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천오백 년간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건 남성뿐이었다. 그 시절 여성들의 목소리는 지워지고 배제되었다. 그런 과거를 생각했을 때 극작가 스카르파가 여성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극으로 올린 것은 그가 ‘노래’하며 스스로를 구원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당신에게 노래를 나누어준다. 당신은 또 다른 곳으로 가 노래의 일부를 나눠줄 것이다. 목도한 슬픔을 당신의 몸에 기입하며. 당신의 호흡대로 춤추며. 다시 사랑하며. 그렇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이 되었다가, 마침내 우리가 아닌 것들로 흩어진다.


저자가 볼로디아와 비슷한 비평적 태도를 가지는 것과 별개로, 명확하게 노래할 줄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공연예술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뿐만 아니라 음악을 하며 세상에 메시지를 남기는 모습 또한 그러했다. 목소리가 어디로 흘러가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표현한 대목이라고 생각했다.


예기치 못한 고통과 아름다움으로, 눈앞에서 명멸하는 몸짓과 물질로, 몸은 건드려지기를 희망하고, 생은 휘청거리기를 원한다. 연극만이 펼쳐줄 수 있는 다른 세계에 가기를 나는 원한다.


내가 극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끊을 수 없는 이유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야기만을 원한다면 수고스럽게 극장까지 갈 필요가 없다.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가 내 세계를 깨뜨리고 무너뜨리며 다른 세계에 편입되기를 원한다. 비록 몇 시간짜리 짧은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그 세계를 겪고 극장 밖으로 나온 나는 극장에 들어가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다.

 

생생하던 공연이 희미해졌다는 것을 깨달을 때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을 느낀다. 그렇지만 시간예술은 그 시기의 나만 느낄 수 있는 감상을 만든다. 모든 조건이 동일한 극이 돌아와도 감상하는 내가 달라지면 다른 생각이 나온다. 때로는 흐려지는 감각을 즐기며 지금의 나를 곱씹는 것이 공연을 기억하는 또 다른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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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예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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