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기억은 힘이 세다 [도서/문학]

제임스 설터, 「방콕」
글 입력 2022.08.1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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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 영어사전을 찾다가 생소한 단어를 발견한다.

 

evanescent: 쉬이 사라지는, 무상한, 덧없는.

 

검색목록에 저장된 것을 보니 분명 언젠가 내가 찾아봤을 단어이건만, 그 모양과 뜻이 어쩐지 기이하고 낯설다.

 

우리는 기억하고자 애썼던 많은 것을 잊고 산다. 어떤 날엔 잊고 지냈던 기억이 문득 떠오르기도 하고, 또 어떤 날엔 잊고 싶었던 기억이 불쑥 찾아오기도 한다. 기억은 ‘잃’는 게 아니라 ‘잊’는 것. 쉽게 잊을 수 있기에 기억은 연약하고, 또 언젠가 되찾을 수 있기에 위험하다. 세상의 많은 기억은 그 잔인한 사실에 질긴 뿌리를 둔 채로 이야기된다.


제임스 설터의 짧은 소설 <방콕>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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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 기억


 

어느 날, “명저와 필사본을” 파는 조용한 서점을 운영하던 홀리스에게 “회색 저지 스웨터와 통이 좁은 스커트”를 입은 캐럴이 찾아온다. 지난 연인 사이로 보이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순간은 전혀 애틋하지 않은데, 홀리스에게 캐럴이란 존재는 평온한 현재를 흔들어놓는 불청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 메시지 못 받았어? 여자가 물었다.

받았어.

전화 안 걸었잖아.

응.

전화 안 할 작정이었어?

물론, 그가 말했다.

 

 

기껏 자신을 찾아온 옛 연인 캐럴에게 홀리스는 “서늘하게” 반응할 뿐이다. 그런 홀리스의 태도 따윈 상관없다는 듯 캐럴은 자신이 여전히 홀리스를 추억하고 있음을 말한다.

 

홀리스에게 전하는 캐럴의 진심은 냉정하고(“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어”), 그래서 잔인하다(“보고 싶었을 뿐이야”). 이제 홀리스는 “잘 차려입”은 모습으로 갑작스레 찾아온 치명적 기억과 마주하게 된다. 잊고 있었던 것, 혹은 잊고 싶었던 것. 이러한 종류의 기억은, 끔찍하게도, 여느 기억보다 선명한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언젠가 캐럴이 식당 밖으로 걸어 나온 적이 있었다. 엉덩이에 들러붙는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바람에 치맛자락이 들려 다리가 드러난 채, 점심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계단을 내려왔다. 그날 오후를 그는 잠깐 생각했다.

 


캐럴은 홀리스를 ‘크리스’라고 부르는데, 그 이름은 분명 같은 기억을 공유하던 시절 불렸던 남자의 친숙한 애칭일 테다. 홀리스는 그 이름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거 기억해?” 캐럴은 홀리스와 지난날 함께 했던 여러 추억들을 떠올린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그 질문들은 홀리스로 하여금 답변을 고민하게 만들 것이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기억은 퍼즐처럼 조각이 맞춰지며 더욱 단단해질 테다(“내가 기억하는 것처럼 생각나는지 궁금하네”). 경화(硬化)되는 기억은 더욱 아프게 홀리스를 두드린다.

 

 

 

세 가지 물음


 

소설의 차원에서 캐럴(기억)이란 인물은 홀리스에게 세 층위의 물음을 던진다. 이 물음들에 대한 홀리스의 대답이 그를 그녀에게서 구원해내거나, 혹은 완전히 무너뜨릴 테다.


우선은 현재. 가정을 꾸린 홀리스에게는 가족이 그의 현재가 될 것이므로, 캐럴은 홀리스의 현재를 흔들기 위해 아내와 어린 딸을 공략한다. 홀리스의 아내를 만나 “그 여자한테 당신이 아직도 거길 빨아주면 좋아하느냐 물었”다거나, 어린 딸을 언급하며 “그 애는 여자가 될 거야. 알다시피 젊은 여자를, 그 나이 젊은 여자들을 어떻게 느꼈는지 기억해”보라는 식의 노골적인 직설을 하는데, 이는 마치 신의 대리인을 시험하는 악마의 짓궂은 조롱처럼 느껴진다. 홀리스는 가까스로 첫 번째 시험을 이겨낸다. “있잖아, 캐럴, 역겨워.” 그러나 애석하게도 홀리스는 이미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을 테다.


기억의 두 번째 물음은 난이도를 가일층 높인다. 캐럴은 자신이 알고 있는 홀리스의 모든 것에 대하여 거침없이 쏟아낸다. 그가 책에서 “좋아하던 대목”이나 “팔이 가느다란” 여성 취향, 혹은 “여자들 손을 묶는 걸 좋아”하는 것과 같은 은밀한 섹슈얼리티까지, 추측보다 사실에 가까운 홀리스의 모든 것을 들춰내며 과거를 확인시키는 캐럴은 결정적인 물음을 던진다. “말해봐 크리스, 날 사랑했어?” 캐럴의 질문에 대하여 이 소설을 통틀어 가장 정성스럽게 얘기하는 홀리스의 답변은 의미심장하다.


 
사랑? 그는 의자에서 뒤로 몸을 기댔다. (…) 나는 하루의 매 순간 당신 생각을 했어, 그가 말했다.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을 사랑했어. 당신이 절대적으로 새로운 게 좋았고 당신이 말한 것, 행동한 것이 전부 좋았어. 당신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었어. 함께 있으면 난 삶의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았어. 누구나 꿈꿔왔던 모든 것을. 나는 당신을 숭배했어.
 


캐럴(기억)은 과거에 우리가 사랑했다는 사실을 홀리스 스스로가 확인하도록 만듦으로써, 기어이 돌이킬 여지를 만들어낸다. 이제 홀리스는 위태로워 보인다.


현재에 흔들렸고, 과거를 확인했으니(“당신을 숭배했어”), 이제 가장 중요한 미래에 대한 물음만이 남았다. 캐럴은 홀리스에게 제안한다. 자신과 함께 방콕에 가지 않겠냐고. 그들이 함께 누렸던 것들을 다시 함께 누리자고.


 
여행. 동양. 다른 세상의 공기. 목욕하고, 술 마시고, 책 읽고…….
 


캐럴의 이 제안은 “삶과 그리고 그런 척하는 삶 중에서” 어떤 것을 택하겠냐는 물음이고, 홀리스의 현재는 ‘진짜 삶’이 아닐 거라는 오만한 확신이며,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타난 기억이 홀리스의 내부에서 발생시킨 치명적 충동이다.

 

홀리스는 인정한다. 그녀와 함께 했을 때 “인생의 모든 것을 가졌”던 것처럼 느꼈다고. 그러나 덤덤하게 덧붙인다. 지금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 그러니까 예전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다고. 기억이 건네는 세 번의 강력한 물음 앞에서 홀리스는 일단은 가까스로 버텨낸 것으로 보인다.


끝까지 유혹을 던지며 물고 늘어지는 기억 앞에서 홀리스는 거의 절규하고, (“제발 그만해. 날 가만히 내버려 둬. 내가 당신을 조금이라도 좋아할 수 있게 해줘”) 캐럴은 다시 한 번 홀리스를 떠난다. 홀리스는 홀로 남겨진다.

 

이처럼 기억은 홀연히 나타났다가 다시금 훌쩍 떠나버리곤 한다. 다만 그 짧은 순간에도 기억은 반드시 무언가를 남겨두고 간다. “예전의 모습이 아니라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는 모습”을. 아름다운 추억인지, 고통스러운 미련인지 모를 수수께끼를.

 

그런 날을 통과한 뒤에 우리는 잊고 있었던 기간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랜 시간만큼 기억 속에서 “헤엄치”며 살아야 할 테다. 잊을 수는 있어도 잃을 수는 없다. ‘무상함’(evanescence)과 ‘기억’(memory)은 유의어이자, 반의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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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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