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여기는 부끄러우면 지는 공간, 전시 '바티망'

글 입력 2022.08.03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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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에서 교환학생의 신분으로 6개월간 살았던 적이 있다. 내가 살았던 도시는 Växjö라는 곳이었는데, 스웨덴 남부에 위치해 있었다. 공항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스톡홀름 공항보다 코펜하겐 공항이 더 가까웠기에(가깝다고 해도 기차로 3시간 정도의 거리였지만) 종종 덴마크에 방문하곤 했다. 그러던 중 문득, 이렇게 덴마크를 제 집처럼 드나들면서 정작 코펜하겐은 제대로 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펜하겐이 궁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북유럽의 물가는 정말이지 괴로울 정도이다. 오죽하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는 일이 환율을 체크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여행자가 아니었기에 절약하며 사는 것이 최선이었다. 코펜하겐 여행 역시 굉장히 타이트한 예산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자꾸만 돈을 쓰고 싶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끼고 아껴도 모자랄 판인데, 여기는 꼭 가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한 미술관이었는데, 주로 조소 작품들을 전시하는 곳이었다.

 

난생처음 방문한 조소 전문 미술관(괴상한 작명이지만 양해해 주시길). 나는 그곳에서 평생 볼 조소 작품들을 실컷 감상할 수 있었다. 회화에 비해 확실히 생동감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기에 너무 실제 같아서, 살짝 무서웠지만 그게 또 묘하고 좋았다. 한참을 미술관 안을 쏘다니며 나는 서서히 조소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조소를 좋아하게 되니, 설치 미술에도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실제로는 분명 결이 다른 두 영역이지만, 물체감이 있다는 공통점이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 같다. 일상에서 설치 작품을 보게 되면, 전보다 오래 들여다보게 되었고 일부러 찾아보기도 했다. 그럴수록 점점 더 관심이 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 것이다. 전시 <바티망>을 보고 단숨에 마음을 내줄 수밖에 없었던 것 역시,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뇌(Noeud).jpg

뇌(Noeud), 레안드로 에를리치(Leandro Erlich)

 

 

전시 소개를 처음 보았을 때, 가장 눈에 들어왔던 작품. 개인적으로 설치 미술의 특이점은 일상과의 조화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기에 실제 백화점 같은 공간에 구축되어 있는 이 작품이 참 좋았다. 에스컬레이터라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대상을 이렇게 아름답고 창의적으로 꾸며낼 수 있다니! 이 정도의 감각과 실력이라면, 노들섬으로의 여정이 어찌 두려울쏘냐!

 

노들섬의 노들서가에서 진행 중인 전시 <바티망>은 프랑스어로 건물을 뜻한다고 한다. 레안드로 에를리치(Leandro Erlich)의 작품으로 이미 전 세계 투어를 다녀오신 몸이라고! 작품 이름이 전시 이름인 경우가 거의 없어, 실제 전시관에 입장하고 나서야 바티망이라는 이름이 실은 작가의 대표작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와-우-!

 

전시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지금까지 방문했던 전시들 중에서 가장 적은 작품 수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입장 초반에는 입장권 가격이 꽤 비싸다는 생각을 했다. 보통 3-4관 정도 있는 전시관에서 받는 금액과 동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시 <바티망>의 핵심은 관람이 아니었다. 체험이었다. 전시관 입장료에 체험 활동비가 더해진 금액이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와-우-!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면서 또 재미있었던 작품, 아래 <세계의 지하철(Global Express, 2011)>이었다.

 

 

세계의_지하철(Global_Express,_2011).jpg

세계의 지하철(Global Express, 2011), 레안드로 에를리치(Leandro Erlich)

 

 

실제 지하철역에서 볼 수 있을법한 의자 구조물에 앉아 흘러가는 화면을 가만 보고 있으면, 이국적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화면은 계속해서 어느 나라의 풍경을 보여주고 그 풍경을 바라보니 어느새 지하철을 타고 여행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유럽을 여행하던 그때가 떠올랐다.

 

<잃어버린 정원(Lost Garden, 2009)>이라는 작품은 무척 신기했다. 거울의 반사 현상을 활용한 작품으로 한 쪽에서 반대편을 바라보면, 그 반대편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래의 사진을 참고하시길!

 

 

잃어버린_정원(Lost_Garden,_2009).jpg

잃어버린 정원(Lost Garden, 2009), 레안드로 에를리치(Leandro Erlich)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바티망(Batiment)>일 테다. 전시의 표지를 차지하고 있는 초대형 설치 작품. 건물의 외벽을 본 따 만들어 둔 구조물 앞에 거대한 거울이 있어, 구조물 위에서 포즈를 취하면 거울을 통해 건물 외벽에 아슬 아슬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나를 볼 수 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의 호기심과 흥미를 사로잡기에 충분한 이 착시 현상은 그곳에 있는 모두가 온몸을 던져 바닥을 뒹굴며 작품을 체험하도록 만들었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어떻게든 더 실제 같은 착시를 만들어 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그 순간만큼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졌다. 이 재미있는 순간을 누구보다 잘 즐겨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대형 작품이고 순서를 지켜 체험하는 작품이 아니어서 다른 관람객들의 초상권을 지키기 위해 현장의 사진을 공유하는 건 어렵지만, 수많은 매체에서 전시 <바티망>을 소개하고 있기에 어떤 작품인지 찾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단연 독보적인 전시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이들과 함께 즐기기에 좋은 전시라는 생각을 했다. 일반적인 정적인 전시에서는 아이들이 대개 지루해 보였는데, <바티망(Batiment)> 앞에 선 아이들은 하나같이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체험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장 전의 감상과 후의 감상이 확연히 차이가 나는 전시도 처음이었다. 다소 높은 금액과 적은 작품 수를 넘어서는 전시 <바티망>만의 매력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끝으로 만일 전시 <바티망> 관람을 예정하고 있다면, 부끄러움은 잠시 내려두고 작품들을 진정 즐기시길 바란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럴 테니까! 어쩌면 이 지구상에서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공간일지도 모르겠다.

 

 

[김규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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