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지렁이도 이거보다 예뻐! [사람]

원래 예쁘고 정성들여 만들다가 대충 만드는 것에 익숙해지면 돌아가기 어렵다.
글 입력 2022.07.17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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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글씨라는 건 무엇일까


 

초등학생 때 교내 바른 글씨 대회가 열렸었다. 본보기를 주고 그대로 따라 쓰면 되는 간단한 대회여서 1학년이었던 나는 최선을 다해 '그렸다.' 그것은 '쓴다'라는 행위는 아니었다. 내가 쓰던 글씨체도 아니었고 교과서에 나오는 글씨고 본보기를 주면서 그대로 하라고 하니 그림 그리듯 그려서 냈다.

 

그랬더니 우수상을 받았다. 전교생 단위로 실시했던 대회였는데 1학년에게 우수상을 주다니. 살면서 처음 받아보는 상이었기에 굉장히 기뻤다. 그래서 그 뒤로 한동안 엄청난 만족감에 글씨체를 그때 대회에 냈던 그대로 썼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 바탕체로 글을 썼다는 이야기다.

 

삐침을 살리고 모음마다 부리를 살려서 썼다. 그게 귀찮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른 글씨라고 나에게 새겨져 바탕체로 글을 써야 글씨를 잘 쓰는 줄 알았다. 주변 친구들도 바른 글씨 쓰기로 바탕체에 길들어서 그런가. 다들 저학년 때까지 바탕체를 쓰려고 노력했었다. 그래서 그대로 글씨체를 이어 나갔다. 그것이 바른 글씨라고 나에게 정의했기에 그렇게 쓰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 다른 글씨체를 쓰는 친구들이 생겼다. 부리가 없고 자음보다 모음이 큰 동글동글한 글씨체가 너무 귀여웠다. 동글동글 귀여운 글씨체지만 자세히 보면 또 다들 조금씩 달랐다. 자음의 크기가 조금씩 다르고 리을을 이어 쓰는 등 바탕체처럼 정자는 아니지만, 충분히 개성 있고 멋있었다.

 

나도 그들처럼 나만의 글씨체가 갖고 싶어 나만의 글씨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었다. 하지만 글씨체가 확립되기도 전에 사건이 생겼다.

 

 

 

원래 예쁘고 정성들여 만들다가 대충 만드는 것에 익숙해지면 돌아가기 어렵다


 

언니를 따라 영어학원을 등록했다. 다른 학교 학생들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고 그들은 이미 같은 학교고 친한 무리였기에 낯을 가리는 나는 쉽게 친해지기 힘들었고 그들이 하는 행동에 말을 얹기 힘들었다. 그래서 공부나 했다. 나는 처음 배우는 영어였기에 될 수 있도록 예쁘게 쓸 수 있게 노력했고 그 결과는 지금 생각해도 별로다.

 

영어 학원이기에 매번 단어 시험을 쳤는데 같은 반에 친한 사람도 없고 해서 매번 열심히 공부해 갔더니 선생님이 안보는 틈을 타 답을 다 베껴갔다. 그러고는 나 빼고 다 답을 공유했다. 그러면서 막 웃는데 이게 맞나 싶었다.이걸 이르기도 뭐하고 내 기분은 나쁘고 공부하는 보람도 없고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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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못 알아보게 대충 썼다. 한글도 대충 영어도 대충. 목표는 나와 선생님만 알아볼 수 있도록. 그랬더니 보러 와도 못 알아보니 그냥 가더라. 나는 아주 흡족했다. 어린 나이에 문제를 스스로 해결했다는 것에 만족했다. 하지만 대충 쓰는 데 익숙해져 갔다. 인제야 생각해보면 그냥 선생님께 말할 걸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글씨가 왜 이래


 

글씨를 대충 쓰면 좋은 점은 생각보다 많았다. 먼저 누구보다 빠르게 숙제를 끝낼 수 있고 누구보다 빨리 선생님의 필기를 따라갈 수 있었다. 빠르니, 편했고 초등학교와는 달리 숙제를 제출할 일이 잘 없었고 중학교부터는 내가 쓴 걸 남이 볼 일이 잘 없기에 예쁜 글씨체 만들기는 초등학교 이후로는 막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편한 대로 살기로 했다. 이미 익숙해져 버린 글씨체에 말이다. 자세히 봐서 알아볼 수만 있다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글씨가 왜 이렇냐는 말에는 적당히 웃고 넘겼다. 이미 너무 익숙해져 교정하는 데에도 시간이 한참 걸릴 것 같아 학기 중에 시작할 엄두도 안 났고 방학은 워낙 빠르게 지나가서 교정이고 뭐고 그런 거 할 시간이 없었다. 사실 고치려고 노력했다면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의지가 없었다. 서술형 시험 때나 좀 신경 써서 냈지, 그거 말고는 예쁘게 쓰다가 수업 내용 놓치는 것도 싫었고 필기해둔 걸 누가 또 베껴갈까 봐 불안하기도 했다.

  

그렇게 살았는데 가끔 방학 숙제로 빽빽이 쓰기를 시키는 선생님들이 나를 아주 싫어하셨다. 다른 학생들 앞에서 큰 소리로 내 글씨에 대해 말하며 창피를 주곤 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고등학생 때 담임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우리 반 다른 친구들 있는 곳에서 다른 친구 숙제와 비교하며 내 공책을 바닥에 던지시며 창피를 주셨다.

  

그때 참 상처였다. 글씨가 예쁘지 않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걸로 이렇게까지 나한테 상처를 줄 일인가. 펑펑 울었다. 그렇게 창피를 당하고 나니 오기가 생겼다. 다시는 내 글씨에 말 얹지 못하게 하겠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다듬었다. 또박 또박 쓰려고 노력은 했다, 아예 탈바꿈하진 못했다. 글씨체에 시간을 쓰기에 고등학생은 너무나 바쁘니까. 그래도 알아보는데 걸리는 시간이 줄어들긴 했다. 내가 봐도 잘쓴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나쁘지 않다. 정도라 그냥 이렇게 살자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고 다이어리 꾸미기에 빠진 언니는 나한테도 권유했다. 취향인 스티커 모으는 것도 재밌어 보였고 일상을 기록하는 습관을 지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내 마음에 드는 글씨체는 아니다 보니 결과물이 내가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아 점점 손이 안 가게 되었다. 남들 다이어리는 다 예쁘고 아기자기한데 내 다이어리는 글씨와 스티커가 따로 노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교정을 하기 위해 만년필을 샀다. 내가 생각하는 만년필은 글씨를 잘 쓰는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래서 만년필로 조금씩 손으로 글을 쓰고 있다. 색 잉크를 쓰고 싶어서 자주 써내서 연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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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예전보다 글씨에 시간을 할애할 수 있기에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쓰도록 노력하고 있다. 남이 정해준 바른 글씨가 아닌 이제 내 글씨체로 글을 쓴다. 글씨체를 보면 주인의 성격이 보인다고, 유려하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은 투박한 글씨가 나도 모르는 내 성격이 아닐까. 아직 다듬어 가는 중이지만 언젠가 내 맘의 쏙 드는 글씨체로 글을 쓰고 싶다.

 

 

[빈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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