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너는 내 최초의 절망 下

어느 아이돌 팬의 사적인 기록
글 입력 2022.07.16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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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조롭던 일상을 뒤집는 한 발의 신호탄이 어느 날 예고없이 울렸다. 내내 걱정하던 일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 펼쳐지고 말았다. 사실과 거짓이 뒤섞인 출처모를 글이 인터넷을 장악했다. 추락에 가속도가 붙었다. 더 이상의 희망 같은 건 없이 나와 우리 모두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 사람은 나보다, 그리고 ‘우리’보다 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은 채 매정히 등을 돌렸다. 언젠가 그 사람의 뒷모습이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였는지에 대해 밤새워 글로 적곤했다. 처음으로 그 사람이 밉다고 생각했다.

 

방심했다. 정말 이 모든 것들이 영원할 줄 알았다. 그 사람만 변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내 인생이 얼마나 엉망이 되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순진했다. 너무 좋아서, 좋은 것만 보다가 결국은 이제 막 탈피를 마친 소라게 마냥 연약한 상태로 망망대해 가운데 혼자 남겨졌다.

 

한 순간 기둥을 잃어버린 채 휘청대는 몸뚱이를 이끌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 시기, 견딜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내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초라한 내 모습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사랑받고 싶어서 이리저리 헤매다 잔뜩 지쳐버린 나를 대면하는 일. 어쩌면 그 사람만큼이나, 그 사람을 사랑하는 나 자신을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사람을 잃은 내가 이렇게까지 무가치해 보일 일은 없을 테니까.

 

애초에 어디서도 축복받을 수 없었던 외사랑이었으므로 다른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결국 늘 하던 대로 키보드를 있는 힘껏 두드리며 가슴 속에 담긴 응어리를 터뜨려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는 '절망'이 '정말'로 자주 오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그동안 한 번도 내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절망'이라는 단어를 선택해본 적 없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정말이지 절망스러웠다.

 

유일하게 나를 지탱하던 끈이 끊어지자 대상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안개처럼 피어 올라 사방을 에워쌌다. 습관처럼 예견하던 그 사람과 나의 미래도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이후 나는 뜻하지 않게 눈물을 쏟는 날이 많아졌다. 잠이 오지 않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종종 불시에 가슴이 답답해져 하던 일을 멈추고 숨을 천천히 크게 내쉬어야 했다.

 

탓할 대상이 없어 말을 아꼈다. 연이어 차오르는 마음 속 웅성거림이 출구를 잃은 채 방황했다. 폐가 부풀고, 정신이 아득했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던 빛을 탐낸 형벌에 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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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같던 상황과 감정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 가기 시작한 건 반년, 어쩌면 일년쯤 지나서의 일이다. 속이 상할 대로 상해서 처음보다 더 엉망인 상태로 끝날 거라고 자조했던 생각은 오산이었다.

 

오히려 몸이 뜨거웠다. 더 이상 누구도, 무엇도 밉지가 않았다. 무거웠던 마음을 내려놓고 초연한 마음으로 나를 돌보기 시작했다. 깨진 유리 조각을 정리하듯 세심하게 내 지난한 갈래의 마음들을 정리했다. 걸음마다 버석하게 메마른 잔재가 밟혔다.

 

나와 어울리지 않던 미움, 순리에 맞지 않는 거대한 바람 그리고 나를 대체하려 들었던 거품 같은 잔상들을 지워냈다. 누군가를 오래 또 깊이 아끼고 보듬을 수 있는 마음과, 사랑을 표현하며 얻은 해방의 기억은 주머니 속에 고이 챙겼다.

 

그리곤 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다. 모든 사람은 결국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찾아 떠나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그 사람의 돌아섬에 토를 달 수 없고, 나 또한 언제든 이곳을 떠날 수 있다. 나는 그곳이 내가 묻힐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했으나 실은 어디라도 세상의 눈이 감기는 곳은 없고, 영원히 한 자리에 머물며 나를 지키기 위해 존재할 사람도 없다.

 

멍청하기만 한 내 모습도 계속 보다 보니 감흥을 잃게 되고, 없으면 죽을 것 같던 불안한 애정도 적정 온도를 찾아갔다.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영영 모르는, 별나고도 뻔한 애정은 그렇게 저물었다.

 

 

[고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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