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자아 인지와 혼란의 이야기 - 아무도 [격주의 문학]

글 입력 2022.07.03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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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격주의 문학에서 소개할 소설은 위수정 작가의 단편소설 「아무도」이다. 「아무도」에서 그리고 있는 것은 내연 당사자인 여성 ‘희진’의 이야기이다. 남편 ‘수형’이 아닌 다른 남자와 모종의 관계를 맺기 시작하여 별거를 시작하게 된 한 여성. 이러한 인물은 사회적 인식 속에서 보통 악인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문학이 하는 일은 자세한 내막을 그려보고, 선인이든 악인이든 그 기저에 존재한 미묘한 진실과 아이러니를 발견하는 것이다. 위수정 작가가 그리고 있는 진실 또는 아이러니는 무엇일까. 무엇이 한 여성으로 하여금 가정을 파괴하게 만들었을까. 소설은 물론 명확한 대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독자에게 자아와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떠한 단초로써 작용을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위수정 작가는 201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에 「무덤이 조금씩」으로 당선되며 문단 생활을 시작하였다. 위수정 작가의 이야기들은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인간의 모습들, 인간이 필연적으로 마주해야 하는 고통들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능력이 있는 작가이다. 물론 나도 위수정 작가의 작품을 읽어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서 문단의 평가에 의존하여 소개할 수밖에 없어 아쉽다. 그렇지만 「아무도」를 읽었을 때, 그러한 세간의 평가들이 아주 적절하다고 느꼈다. 비슷한 분위기의 작가를 생각해보면, 정영수 작가와 유사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정영수 작가는 여러 사랑의 모습에서 답습되는 실수와 고통들을 조금 더 세심하게 표현했던 것 같다. 반면에 위수정 작가는 (내가 느끼기에는) 사랑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지만, 반드시 사랑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개인의 이야기, 인간 자체의 이야기에 관한 것 같은 느낌을 좀더 크게 받았던 것 같다.


「아무도」는 2021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서 발표되어, 문학과지성사의 『소설보다: 봄 2022』의 이 계절의 소설로 선정되었다. 내가 느끼기에 근래 대중의 호응을 크게 받는 신인 소설가들은 눈물보다는 웃음을, 현실보다는 환상을 작품에 많이 녹여 넣는 경향이 있는데, 위수정 작가는 조금 더 정통적인, 그리고 날카롭게 인간을 겨냥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에서 다루어지는 이야기는 젊은 독자들에게 고리타분하거나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 같고, 오히려 이 시대에 가장 이야기되어야 할 부분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나로서도 “격주의 문학”에서 문학의 기법이나 표현상을 많이 다루었는데, 오늘만큼은 우리가 잊고 지내고 있던 인간과 자아의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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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는 남편 ‘수형’과 별거를 시작한 ‘희진’의 이야기이다. 희진은 원룸을 얻어 혼자서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원룸을 시작하기로 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희진의 선택에 대해 별 반대 없이 희진의 이사를 묵묵히 도와준다. 아버지는 가끔 희진을 방문하여 먹을 것을 같이 먹기도 하고, 같이 운동을 하기도 한다.


희진은 별거하는 시간 동안 여전히 자신의 마음을 정하지 못한다. 언제는 수형과 함께 시어머니의 생신 자리에 참석하는가 하면, 언제는 또 유부남인 내연남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저녁을 함께하기도 한다. 그런 시간 속에서 희진의 별거는 점점 길어진다. 내연남을 생각하다가 수형에게 연락을 하기도 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지러웠다. 내가 테이블을 잡은 채 눈을 감고 서 있자 그가 다가와 나를 잡았다. 괜찮아요? 나는 그의 얼굴에 손을 대어보았다. 우리 섹스할래요? 나의 말에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머뭇거리는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혀가 내 입술에 닿았다. 나는 입술을 뗐다. 나는 이러려고 집을 나온 거에요. 그런데, 왜 나를 볼때마다 아내 얘기를 하는 거죠? 그건 다신 아내한테 해야 하는 말이잖아요.

 

나는 그의 상처받은 얼굴을 보았다. 한참 후에 그가 입을 열었다.

 

희진 씨, 나는 1999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나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상당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희진은 자신의 마음을 정하지 못해 스스로 괴로워하면서, 동시에 두 남자를 피말리게 하고 있다. 수형에게는 내연남이 좋아서 집을 나온 거라며 고집을 부리지만, 동시에 내연남을 떠오르는 순간에도 수형을 찾는다. 내연남 역시 비슷한데, 그는 희진을 만나는 순간에도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렇듯 각 인물의 말과 행동이 불일치하는 모습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이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부분들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소설의 긴장감을 한껏 높여준다.


이러한 상황이 초래되는 것은 각각의 인물이 스스로에 대해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게 된다. 희진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어떤 상황에 있을 때 행복을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인지에 대해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이혼을 하게 될 때 혹은 다시 수형과 같이 살게 될 때 희진은 각각 무언갈 얻거나 잃을 것인데, 희진은 결정을 미루기만 한다. 결정이 미뤄지면서, 남은 두 남자는 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이혼을 한다면 수형은 상처받겠지만, 그 결정을 미루는 것 역시 수형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다.


사실 희진의 이러한 혼란을 일이나 학업에 대입해 생각한다면, 꽤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아무도」의 상황을 보고서 이러한 종류의 고민은 가정과 일에서 모종의 평행성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대중들은 연애나 가정사에 있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이러한 인물에 대해 꽤 엄격한 편인 것 같다. 그런데 회사 신입사원에 대입해서 생각해보라. 몸은 현재의 회사에 있지만 머리로는 계속 이직을 고민하고, 정작 회사 일에 집중을 하지 못하니 실력도 늘질 못하고 성취감도 얻지 못한다. 고민은 자신의 미래를 위한 것이지만, 그 고민이 지속되는 동안,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그 영향을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희진의 이러한 혼란은, 사회적 위치가 안정되지 못한 수많은 우리들의 현실과 비슷한 것 같다.


그렇지만 자아는 단일하게 규정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이해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내가 행복하고 또 주변 사람들이 행복하려면, 자신을, 자신의 마음을 잘 알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것이 아마 메타 인지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오늘날의 세태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마음이란 하나로 정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아도 하나로 정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자아들을 생각해라. 연애할 때는 상대가 마냥 좋을 때도 하지만 의심스럽기도 하고, 동시에 상대를 갈구하기도 한다. 상대를 좋아하는 자아도, 의심하는 자아도, 갈구하는 자아도 모두 자신의 모습들이다. 이러한 자아들 속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문학은 가끔 독자로 하여금 내면의 소리를 귀기울여 들으라고 재촉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소설의 주인공은 남이지만, 소설이라는 형식은 주인공의 현실을 온전히 자신의 현실처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희진(혹은 내연남)과 같이 자신의 자아들이 충돌하고 있지는 않는가, 혹은 타협 없는 강행으로 자신의 소중한 자아들을 괴롭히고 있지는 않은가. 스스로를 잘 규정하고 그래서 빠르게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자신의 자아들 속에서 적절한 균형을 형성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


이 소설을 이렇게 독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무래도 대학을 졸업하고 새로 처한 나의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내가 내 자신을 잘 모르거나, 혹은 잘 알고 있다고 오해할 때, 혹은 상대를 오해할 때, 나는 물론이고 같이 있는 동료까지도 모두 괴로워질 수 있다. 어쩌면 우리의 상황들은 개인에게 지나치게 명확한 결정을 요구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자아와 현실 사이의 간극은 크고, 그 간극은 고통스럽다.


위수정의 문학은 당연한 인간의 고통을 우리에게 조금 더 의미있는 방식으로 전달해주는 것 같다. 인간은 시시각각 바뀌는 존재이고 또 여러 동시간적 자아들이 겹쳐있는 형태이다. 우리는 지금 서로에게 너무 많은 명확성을 요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스스로에게조차 충분한 명확성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가? 명확성이 충분하지 않아서 더더욱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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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수정 작가

 

 

[한승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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