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으로 얄팍하게 덧댄 붕괴의 흔적

글 입력 2022.06.20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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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에브가 엄마를 독살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때 영화는 독살 장면을 직접 보여주지 않고 에브가 SNS 라이브로 생중계하는 화면을 통해 보여준다. 다음으로 로랑 가문 기업의 공사현장이 CCTV화면으로 보인다. 일상적인 공사 장면이 이어지다 이내 벽이 무너져 내린다. 영화를 시작하는 이 두 씬은 앞으로 영화에서 전개될 붕괴를 암시하는 걸까?

 

영화 <해피엔드>는 프랑스 칼레의 부르주아 가문인 ‘로랑’ 가족에 에브가 일원으로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된다. 로랑 가족은 전형적인 유럽 부르주아 가문으로 조르주를 비롯한 3대가 모여 산다. 이들은 저녁이면 늘 함께 식탁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한다. 그러나 로랑 가족은 각 구성원들이 저마다 결핍을 갖고 있는데, 서로 간에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완벽한 겉모습과 달리 황폐한 이면을 지닌 로랑 가족을 에브는 조용히 지켜본다.


치매를 앓던 아내를 떠나 보내고 자신에게도 치매가 서서히 오기 시작하자 계속해서 자살을 시도하는 조르주, 이미 에브의 엄마와 이혼한 뒤 재혼을 했음에도 또 다시 불륜을 저지르는 토마스,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는 아들 피에르를 붙잡고 가업을 잇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몰아세우는 앤, 엄마 앤의 기대가 부담스러우면서도 스스로 열등감에 차 있는 피에르, 마지막으로 자신의 엄마를 독살한 에브까지. 각자 결핍과 광기를 지닌 이들은 부르주아 가문의 화려한 포장 뒤에 철저히 가려져 있다. 심지어 서로에게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위선, 혹은 위악을 떠는 것이다. 영화는 에브의 시선을 이용해 이를 폭로한다.


유일하게 서로 진심 어린 소통을 나누는 인물은 바로 조르주와 에브다. 로랑 가족 중 가장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조르주는 자꾸 에브의 존재를 잊어 버리지만 에브가 자살 기도를 한 이후 둘은 진실한 대화를 나눈다. 조르주는 치매를 앓던 아내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였고, (이 이야기는 <해피엔드>의 전작인 영화 <아무르>와 연결된다.) 에브는 학교에서 마음에 들지 않던 친구에게 약을 먹여 죽일 뻔 했다. 또한 삶에 대한 의지가 별로 없다는 점에서 둘은 닮았다. 에브는 아빠 토마스가 불륜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알고 버려질까 하는 두려움에 자살 기도를 했다. 조르주는 에브와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한다.


"창 밖에 매가 비둘기를 갈가리 찢어버리는 모습을 봤어. 텔레비전으로 보면 아무렇지 않은 장면인데, 실제로 보면 손이 덜덜 떨려."


직접 보는 것보다 미디어를 통해 보게 되면 상황은 보는 이에게서 훨씬 멀어지고 그 거리만큼 감정적으로도 멀어진다. 상황을 객관화, 타자화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를 독살할 때 휴대폰을 꺼내 그 모습을 지켜본 에브는 직접 보는 것보다 미디어를 통해 보는 것이 더 익숙하다. 에브는 상황 속의 적극적인 참여자이기 보다 늘 미디어 밖의 방관자로 존재하며 극단적 상황에도 감정적으로 무디다.


조르주는 영화의 마지막, 에브에게 부탁해 자신의 휠체어를 바다로 밀게 한다. 심지어 에브는 조르주를 바다로 밀어버린 뒤 그가 서서히 물에 잠기는 모습을 휴대폰 동영상으로 찍는다. 에브의 이런 행동은 영화의 첫 장면과 연결된다. 조르주를 구하러 뛰어가던 앤의 휴대폰 카메라를 돌아보는 눈빛이 관객들에게 날카롭게 꽂히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는 프랑스 칼레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프랑스 칼레는 영국으로 넘어 가기 위한 난민들이 모여 난민촌이 형성된 도시다. 칼레는 2016년 난민촌 철거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영화에서는 칼레의 이런 배경을 드러내기 위해 백인 등장인물들 사이 흑인 난민들을 등장시킨다. 특히 마지막 만찬 장면에서 피에르는 난민들을 대거 데려오는데, 여기서 드러나는 위선적인 부르주아 백인들과 흑인 난민들 사이의 어색한 긴장감은 영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를 가장 잘 보여준다. 영화는 유럽이 인종차별, 난민 문제 등에 포용적인 태도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이면에는 차별과 혐오가 만연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즉, 영화가 단순히 어느 부르주아 가족의 이야기에 국한하지 않고 더 나아가 유럽 사회 전반의 위선을 폭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감독인 미카엘 하네케는 미디어 문제와 권력에 대한 냉철한 시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탁월하다. 영화 <해피엔드> 역시 그의 이러한 특징이 그대로 묻어난다. <해피엔드>에는 롱테이크 기법을 활용한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토마스가 불륜 상대와 음란한 채팅을 나누는 장면은 대화를 주고받는 시간과 그 사이 약간의 텀까지 리얼타임으로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을 긴장시킨다. 또한, 영화 처음의 휴대폰 화면과 cctv화면 역시 롱테이크 기법으로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영화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영화 안에서 상황을 관음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를 두고 영화 평론가 이동진은 “영화 <해피엔드>는 끊임없이 관객을 영화 속 자리로 초청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감독은 관객을 영화 속 자리로 불러들임으로써 관객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영화는 묻기만 할 뿐, 답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 둔다. 그저 마지막 장면에 에브의 휴대폰 화면 너머 앤의 눈빛만이 관객의 마음에 무겁게 자리잡는다.

 

 
[이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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