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거슬리는 말이 하나쯤은 있다 [문화 전반]

신경을 거스르는 단어를 붙잡아 보자
글 입력 2022.06.11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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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익숙해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문득 낯설게 뇌리에 꽂히는 무언가를 발견할 때가 있다. 걸을 때 덜렁거리는 팔의 각도, 쉬운 단어의 발음 등 대부분 사소한 것들이다. 이렇게 한 번 눈에 띄어 이상하리만치 어색해진 보통의 것들은 며칠 동안 머리를 맴돌며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시켜버린다.


최근 이 현상이 다발하고 있는 것은 단어다. 특정 단어를 들으면 없던 화가 욱하고 올라오거나, 대화가 끝나도 계속 되뇌면서 마음 한편이 거슬리게 된다. 단어는 또한 습관이라 그 말을 반복하는 이를 마주하고 있으면 도무지 대화에 집중이 안 되고 언제 그 단어를 내뿜을까만 의식하게 된다. 그리곤 어김없이 나오는 그 단어. 알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모두 이런 단어를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지 않을까. 요즘 내가 이상하게 꽂혀버린 단어는 이것들이다.

 

 


1. 갑자기



‘갑자기’란 단어가 특히 유행했던 시기가 있었다. 맥락이 다른 주제를 꺼낼 때는 물론이거니와 어떤 말만 건넸다 하면 ‘갑자기↗?’ 하고 말끝을 올려버렸고, 항상 말문이 막혔다. 조롱하는 듯한 말투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갑자기’가 무시하고 생략해버린 발화자의 서사가 더 신경 쓰였다.


‘갑자기’는 당신을 만나기 전에 쌓였던 생각의 시간이, 그 생각을 기어이 말로 꺼내 보이려는 용기가 무의미해지는 순간이다.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튀어나온 말엔 그 사람의 세계가 어느 정도 묻어나 있다. 그 말은 ‘갑자기’라는 평가를 받기엔 꽤 오래도록 쌓여온 서사다. 적어도 곱씹어보지도 않고 바로 '갑자기'를 내뱉는 건 발화자에 대한 존중이 극히 낮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남발하는 ‘갑자기’ 앞에선 어떤 세계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이 나만의 인지상정이다.

 

 


2. 그치



‘그치(그렇지)’는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는 단어다. 적절하게 문장 사이에 쓰인다면 부드러운 느낌을 주며 더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 단어가 거슬리는 순간은 모든 문장의 끝에 위치할 때다.


‘이거 너무 예쁘지 않아? 그치.’ ‘이거는 좀 별로일 것 같은데? 그치.’ ‘좋은데? 그치. 그치.’


문장으로만 나열해도 벌써 숨이 막힐 것 같다. 그치가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닌 동의를 암묵적으로 강요하게 되는 순간 청자에겐 굉장한 부담이 된다. 나만의 의견이 피어날 시간도 주지 않고, 의견을 뿌릴 공간도 허용하지 않는다. ‘응’이라는 단 한마디의 무의미한 대답을 계속 던져야 한다는 점에서도 에너지를 빼앗는다. 보채지 않아도 대화의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그치’는 대부분 긍정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것이 무분별한 강요로 이어지는 경우는 대화의 주체가 당신 하나밖에 없음을 상기시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3. 근데



역접의 부사어 ‘그런데’의 줄임말 ‘근데’는 앞선 발화에 반대되는 말을 할 때 사용된다. 이 역시 모든 문장의 시작에 위치할 때, 즉 남발될 때 거슬리는 단어 중 하나다.


모든 문장 앞에 ‘근데’가 사용된다는 건 누군가의 말이 단 하나도 흡수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자기 세상의 적절함이 명확하고 타협의 여지가 없는 대상이라면 그 쓰임이 이해가 가지만, 습관적으로 모든 대상에게 사용되는 이 단어는 그야말로 말할 의지를 상실시킨다. 대화가 아니라 선언이나 연설을 듣는 느낌이 든다. 이럴 때 나의 말은 그 사람의 세상을 공고히 하고 그 사람의 말을 띄어주기 위한 도움닫기로 전락한다. 이 단어로 '주장'을 '대화'로 교묘히 포장해버리는 시간은 나에게 필요하지 않다.

 

 


4. 플랜테리어



plant(식물)와 interior(인테리어)가 합쳐진 플랜테리어는 최근 유행하고 있는 현상이자 단어다. 앞선 단어들과 맥락이 다르지만, 최근 식물과 함께하는 ‘식집사’가 된 이후로 이 단어가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있다.


인테리어라는 말속에선 식물의 가치가 생명보다는 소품에 더 치중되어 있다고 느낀다. 공간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소품,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소품, 죽으면 좀 안타깝고 금방 새로 교체하는 소품.


역시 활기를 주고 감정을 나누고 같이 살아가는 생명인 반려동물을 인테리어와 합친 ‘펫테리어’라는 말은 없다. 당연하게 생명으로서의 가치가 오롯이 존중되기 때문이다. 물론 동물과 식물이 생존하고 살아가는 방식엔 다소 차이가 있지만, 같은 기능을 하는 생명이라는 점에선 비슷하다. 비교적 동물보다 경시되는 식물의 가치가 더 높아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플랜테리어라는 말을 되도록 사용하고 싶지 않다. 정적이지만 누구보다 높은 생명력으로 또렷한 그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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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은 단어만 예민하게 잔뜩 늘어놓은 것 같아 살짝 민망하니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단어 한 가지를 설명하고 싶다.


바로 ‘낙조’다.


낙조 자체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낙조의 발음과 뜻과 연상되는 이미지 모두를 그려보고 있으면 자연히 마음이 차분해진다. 무언가 떨어지는 듯한 느낌의 ‘낙’ 옆의 ‘조’는 넓은 바다 위에 떠 있는 해처럼 자리해 아이러니한 상승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 덕분에 깃털이 가라앉듯 차분히 내려앉는 해를 상상할 수 있다.


떨어지는 와중에 모든 걸 비추는 낙조. 낙조를 받은 자연물들은 불과 몇 시간 전까지 갖고 있던 찌르는 듯한 생명력을 뒤로 하고 평등하게 차분해진다. 모든 사물이 고유의 색을 반납하고 새로운 빛깔을 내보이는 그 차분한 시간이 마음에 스며들 때가 있다. 매번 실패 없이 나를 치유하는 시간대이다.


*

 

사실 실컷 싫다고 표현하니 덜컥 겁부터 나기 시작했다. 나에게도 분명 마주하는 이의 귀와 신경을 찌르는 언어가 있을 텐데. 그 단어란 대체 무엇일까. 내가 달고 사는 말과 습관이 대체 어떤 나를 보여주고 있을까. 알 수 없지만, 이 기회를 통해 깨달을 수 있다면 최대한 금지해야겠다. 관계란 최선을 다하는 것만큼 최악을 피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서로가 꺼리는 행위만 하지 않아도 편안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니 말이다. 혹시 이 글을 보았다면 서로의 굳은 습관을 양보해볼 수 있기를.

 

 

[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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