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기적인 마음으로 세상을 구하자 [도서/문학]

박서련의 ‘마법소녀 은퇴합니다’ (2022)
글 입력 2022.06.10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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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에 관한 비밀이 하나 있다. 바로 종말은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다.

 

온 지구의 공룡들에게 동시에 찾아왔던 첫 번째 종말과 달리, 우리의 종말은 느리게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지구의 생명을 두 번째로 몰살하는 종말은 이번에도 준비를 단단히 한 모양이다. 이미 활동을 시작한 종말은 아래부터 차례대로 생명을 없애가고 있다. 누구도 종말에 대비할 수 없도록, 은근하게.


우리는 생각보다 아래를 잘 내려다보지 않는다. 그래서 윗 칸에 사는 이들은 바로 아래 칸까지 종말이 찾아온 후에야 위협을 느낀다. 하지만 벌써 턱 끝까지 쫓아온 종말을 피하기는 어렵다. 미리 대비를 해두었으면 좋았으련만. 이 와중에도 아주 위에 있는 이들은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고는 ‘아직 멀었네’라고 생각하며 여유를 즐긴다. 종말은 그 이기심을 먹으며 여유롭게, 동시에 쉼 없이 지구를 타고 올라간다. 이번에는 정말 단 하나의 생명도 남기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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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리인지 복수인지 모를 자연의 구조 조정에서 가장 먼저 내쳐지는 건 바닥에 붙은 사람이었다. 전염병이 돌자 맨 아래 직급이었던 ‘나’가 먼저 해고당했다. 걸어둔 할부를 갚지 못했고, 빚은 자꾸만 늘어났다. 그래서 '나'는 종말이 오든 말든 상관없었다. 윗층의 사람들처럼 종말이 한참 남았기 때문이 아니라, 갚지 못한 신용카드 빚 때문에 어차피 일찍 죽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종말 같은 건 알 바도 아니었다 ‘나’에게 종말은 매달 숨통을 조여 오는 신용카드 빚이었다.


 

전염병이 퍼지지 않았어도, 그래서 내가 일자리를 잃지 않았어도, 나는 조금씩 더 가난해졌을 거야. 오랜 시간에 걸쳐 티 안 나게 조금씩 가난해질 수 있었는데 큰일이 생겨서 그 과정이 엄청나게 단축되었을 뿐. (p.14)

 


문득 등장한 아로아가 ‘나’의 죽음을 가로막으며 건넨 말은 황당했다. 마법소녀라니. 스물아홉이 어떻게 마법소녀가 되냐는 물음에 아로아는 애초에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소녀라고 불러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로아는 종말의 원인이 기후 변화라고 했다. ‘나’는 지구의 존속에 큰 관심이 없었음에도 아로아의 말이 완전히 허튼소리가 아니라는 건 알았다. 지구 끄트머리로 내몰아지는 생명체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북극곰, 그리고 섬나라 사람들. 기후 변화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손 쓰지 않는 문제였다. 지구의 다른 모든 문제처럼 말이다.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의 당사자로서 당장 탈출이 시급한 이들이 있다. 기후 난민은 가라앉는 국토에서 도망쳐야 하고, 전쟁 난민은 쑥대밭이 된 터전에서 도망쳐야 한다. 비단 세계적인 문제뿐만이 아니다. 가정폭력 피해자와 같은 이들도 도망칠 데가 필요하다. 개인적인 문제든, 전 세계적인 문제든 그들의 피난처는 쉽사리 구해지지 않는다. 각자의 이해관계가 얽힌 세상에서, 갈 곳을 잃은 자들만이 선택지 없이 덩그러니 남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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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시간의 마법소녀는 종말을 앞당기겠다고 선언한다. 두 번째 종말은 잔인하기에, 그는 어떤 사람들의 삶은 이미 종말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안다. 가장 아래층의 사람들에게 종말은 현재이고, 그들은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다. 그는 가장 먼저 사라질 이들을 위한 자비이자 가장 늦게 사라질 이들을 위한 형벌로써 시간을 빠르게 감겠다고 말한다.


 

영상이 시작될 때에는 생생한 꽃봉오리 상태였던 장미꽃이 이분 남짓한 이미래의 연설 시간 사이에 완전히 시들어있었다. 시간의 마법소녀가 장미꽃의 시간을 가속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힘이 자신에게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p.136)

 


없는 종말을 만들겠다는 것도 아니다. 차곡차곡 쌓인 인간 이기심의 산물을 코앞에 보여주겠다는 거다. 하지만 시간의 마법소녀와 마찬가지로 바닥 어딘가를 기어 다니던 ‘나’는 그와는 반대로 세상을 구하려고 한다. 세상이 딱히 그에게 베풀어준 것도 없는데, '나'는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최선을 다해 싸운다.

 

 

“혹시 일이 잘 안 풀리면 세상에서 제일 이기적인 사람이 되려고 해봐요. 나만 살면 된다. 그렇게 생각해줘요, 알겠죠.” (p.158)

 

 

‘나’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 이유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자신을 믿는 아로아를 구하기 위해, 혼자 도망칠 수는 없어서, 지금 죽을 수는 없어서. 여러 이유로 ‘나’의 머릿속이 복잡하지만 결국 이 모든 이유는 하나의 생각으로 귀결된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동시에 ‘이기적으로 굴어달라’는 아로아의 목소리도 맴돈다. 그래서 ‘나’는 이기적으로, 한때 종말에 굴복했던 ‘나’를 구하기 위해 세상을 구한다. 시간의 마법소녀와 독대한 '나'는 계속 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 하나로 각성하고, 곧장 시간의 마법소녀를 무력화한다.


내내 종말을 얘기한 것치고는 허무한 결말이다. 시간의 마법소녀는 힘을 잃고, 모두 일상으로 돌아간다. 일상을 되찾았다고 매일의 하늘이 푸른 건 아니다. 세상은 여전히 이기적이고, 여전히 느리게 종말을 향해간다. 해피엔딩도 배드엔딩도 아닌 애매한 분위기로 이야기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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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전체의 종말은 일단 미뤄두었으니 한 사람의 종말을 다시 바라보자. 신용카드 빚을 이겨내지 못하고 개인적인 종말을 맞이하려던 ‘나’는 일련의 전투 과정에서 삶의 의지를 얻고 죽음을 포기한다. 쉽지 않은 삶이지만, 지구까지 구했는데 못할 게 뭐냐며 아등바등 살아간다. ‘삶을 소망하는 마음'으로 지구를 구한 그다운 발상이다.


시간의 마법소녀가 힘을 잃은 후, 그의 힘이 파편화되어 다른 소녀들에게 깃든다. 아로아는 그 후로 부쩍 마력을 가진 이가 늘어났다며 놀라워한다. 세계가 나름의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 것 같다며 제법 이상적인 소리를 하기도 한다. 아로아의 말처럼 세상의 힘이 점차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비로소 균형을 향해가고 있다면, 그 균형이 과연 종말보다 빠르게 찾아올 수 있을까.

 

 

“가장 약한 존재들에게 가장 필요한 힘이 부여되기 때문에 소녀들에게만 마법의 힘이 부여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 그게 내 생각이에요.” (p.120)

 


종말이 공평하지 않다면 맞서 싸우는 마음도 그래야 한다. 바닥에 붙어있던 '나'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구했듯, 새로이 탄생한 마법소녀들도 거듭 이기적인 마음으로 세상을 구하길 바란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들이 세상을 구할 필요도 없이 오롯이 자신의 삶만을 감당하길 간절히 바란다. 그 어떤 소원보다 판타지스러운 소원들을 빌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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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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